5세손인
성여완(成汝完)이 1336년(고려 충숙왕)에 문과에 급제하여 민부상서와 정당문학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문하시중(門下侍中)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성여완의 장남 성석린(成石璘)도 창녕부원군으로서 1415년(태종 15년) 영의정에 올랐고, 차남 성석용(成石瑢)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삼남 성석인(成石因)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36명, 상신 5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을 배출하였다.
성석인의 손자 성봉조(成奉祖)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과 결혼하여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성석인의 증손자
성준(成俊)은 1503년 영의정에 올랐고,
성현(成俔)은 대제학을 지냈다. 성현의 손자
성세창(成世昌)은 1545년(명종 1) 좌의정에 올랐다. 성석인의 6대손
성혼(成渾)은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산군(昌山君)
성사달(成士達)의 현손
성희안(成希顔)은 중종반정을 주도하여 1513년 영의정에 오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