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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백인걸(白仁傑)
백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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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백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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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걸 (白仁傑)
[1497 ~ 157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수원이며 자는 사위(士偉)이다. 또한, 호는 휴암(休菴)이며 처음의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나중에 고친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왕자 사부(王子師傅) 익견의 아들이며, 조광조의 제자이다. 김안국에게서도 학문을 익혔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백인걸 (白仁傑) 기호 학파 사림파 서인 주자학 현량과 김식 성혼 이이 조광조 김굉필 김안국 김자점 김장생 남곤 송익필 신 사임당 심정 안방준 어숙권 유몽인 류성룡 이귀 이항복 이황 정엽 정철 조헌 이연경 김정국 성수침 이우 한교 이서 이명준 훈구파 격몽요결 경연일기 사서율곡언해 성학집요 율곡전서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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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4) 백과 류성룡 (3) 백과 성수침 (3) 백과 이황 (3) 백과 훈구파 (3) 백과 기묘사화 (2) 백과 김굉필 (2) 백과 김안국 (2) 백과 남곤 (2) 백과 사림파 (2) 백과 을사사화 (2) 백과 이기호발설 (2) 이언적 (2) 백과 조광조 (2) 백과
▣ 백과사전
[1497 ~ 157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수원이며 자는 사위(士偉)이다. 또한, 호는 휴암(休菴)이며 처음의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나중에 고친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왕자 사부(王子師傅) 익견의 아들이며, 조광조의 제자이다. 김안국에게서도 학문을 익혔다.
 
그는 당시의 유림계 인물들인 이이와 성혼, 유희춘, 송인수 등과 가깝게 지내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스승 조광조의 친구인 김식 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문 풍토를 펼치자 학문 의 도를 이루고자 더욱 정진하였다. 특히, 조광조 집 옆에 집을 짓고 살며 스승의 학문을 잇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에 남곤을 비롯하여 심정, 홍경주 등이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조광조 등의 신진 세력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자(기묘사화) 백인걸은 스승과 친구를 모두 잃은 슬픔과 분노심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숨어 지냈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 1531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537년에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는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 사림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성균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예문관 검열이 되어 이조(吏曺)가 사람을 쓰는 일에 있어서 그 잘잘못을 적는 옛일을 복구하여 시행하였다. 그 후에는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 현감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그는 현의 일을 충실히 했을 뿐 아니라 학당을 세워 교육에도 힘을 써 그 공로로 벼슬이 더욱 높아졌다.
 
특히, 1545년에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유림을 널리 쓰자 지평과 호조 정랑을 거쳐 정오품인 헌납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인종이 죽고 나이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 왕후와 외삼촌인 윤원형 등의 '소윤 세력'이 인종을 받들던 '대윤 세력'인 윤임과 유관 등을 몰아내려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때 백인걸은 임금의 잘잘못을 지적하여 고치게 하는 헌납으로 있으면서 문정 왕후가 내린 밀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화가 난 문정 왕후는 백인걸을 벼슬에서 내쫓고 옥에 가두었다. 그 후, 정수붕과 최보한 등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 났으나, 1547년에 문정 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벽서가 양재에서 발견되자 이에 관련되어 안변으로 귀양 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 양재 벽서 사건'이란 애초부터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세력이 그 때까지 남아 있던 대윤 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 꾸며낸 일로서 이와 관계된 사람은 모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할 수 있다.
 
1551년에 귀양 에서 풀려난 백인걸은 고향으로 돌아와 한동안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 1565년에 문정 왕후의 죽음에 따라 윤원형의 세력이 몰락하자 다시 승문원 교리로 등용되었다. 이듬해에는 사도시첨정과 선공감부정을 지냈으며 1567년에는 양주 목사로 벼슬이 올랐다.
 
특히, 양주 목사로 있을 때 나라에 물건을 바치는 공납의 잘못된 점을 고쳐 고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 1568년에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기대승이 특별히 추천하여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 때 16세인 선조를 대신하여 인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수렴청정을 거두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로 그는 같은 해에 공조 참의와 대사헌을 거쳐 병조 참판에 그 벼슬이 이르렀다. 이 때부터 백인걸 은 자신의 스승인 조광조의 위패를 문묘에 모실 것을 선조 에게 여러 번 요청하였다. 또한, 선조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인 덕흥군에게 왕의 칭호를 주려고(추존) 하자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선조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를 두둔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유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물러났다. 한편, 이 때부터 조정의 유림 사이에는 분열 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백인걸은 이준경의 의견 에 따라 이것을 막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노력들은 선비들을 해치려는 음모라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백인걸은 1571년 파주로 물러났다. 그가 계속 파주에 머물러 있자 그를 아끼는 선조는 대사헌 과 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받는 대신에 군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도에 대해 상소 를 올렸다. 그러다 1579년(선조 12)에는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어 벼슬길로 나왔는데, 이 때 조정의 유림은 이미 동과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 백인걸은 이이와 함께 붕당이 나라를 망칠 것이니 서로 조화를 이루라고 설득하였다. 또한, 군비를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등 나라 일에 여러 가지 의견을 내 놓았다. 백인걸 스스로는 청렴하고 결백하여 선조 때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을 편찬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그가 지은 책으로 《휴암집》이 전해진다.
 
남평의 봉산 서원과 파주의 파산 서원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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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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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정보
백과 참조
스승 : 김식 / 조광조
제자 : 성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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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