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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023년 11월 17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베를린의 조선 유학생
about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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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손기정(孫基禎) 이미륵(李彌勒) # 남승룡 # 안봉근 # 장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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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일: 2023.11.17. (최종: 2023.11.19. 13:04)) 
◈ 베를린의 조선 유학생
1936년 8월 9일, 손기정 선수는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 저녁에 일본선수단이 주최하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정상희 선배를 따라 안봉근 씨가 운영하는 두부 공장에서 열린 축하회에 참석했다. 안봉근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을 가서 독일 여인과 결혼했다.
1936년 8월 9일, 손기정 선수는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 저녁에 일본선수단이 주최하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정상희 선배를 따라 안봉근 씨가 운영하는 두부 공장에서 열린 축하회에 참석했다. 안봉근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을 가서 독일 여인과 결혼했다. 간소한 축하 자리에는 10여 명의 조선인이 모여 있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놋쇠 그릇에 있는 김치와 두부를 먹으며 오랜만에 따뜻한 정을 느꼈다. 손기정 선수는 두부 공장 벽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전율을 느끼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당시 베를린에는 조선에서 유학을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안봉근(좌측), 이미륵(중앙), 장극(張勀, 1913~2008), 1940년 Bavaria 독일 사진
 
 
안봉근은 1920년에 이의경(필명 미륵)과 함께 상해에서 배를 타고 1920년 5월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도착한다. 그는 독일 베네딕트회 Wilhelm 신부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 망명한다. 그 후 베를린에 정착해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드레스덴 박물관에 취업하여 조선의 전통문화를 소개했다. 안봉근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부님을 따라 유럽으로 가서 선교 기금을 모으는 조력자로 영어,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드레스덴 박물관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아 베를린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해 부를 축적해 나가고, 일부 수익금을 독립자금으로 후원했다. 안봉근은 독일에서 이름을 중국식 Fonken Han(한봉근)으로 바꿨지만 일본 영사관은 항상 그를 주목하고 따라다녔다. 안봉근은 나치를 피해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해방 후에 이탈리아에서 갑자기 죽었다.
 
작가, 철학자, 독립투사 이미륵의 본명은 의경(儀景)으로 필명 ‘미륵’은 본래 어머니가 지어준 어릴 때의 아명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가지려고 미륵부처님에게 기도를 열심히 하여 미륵을 얻었다. 미륵은 황해도 해주 수양산자락 서영정 마을에 부유한 상인 이동빈의 독자로 1899년 음력 3월 8일 태어났다. 위로는 3명의 누이가 있었다.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던 만 11세 때 4년 연상의 아내를 맞아 1남 1녀를 두었다. 혼자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2기생으로 진학했다. 1917년에 첫째 딸 명주를 얻었다. 1919년 3·1 운동에 깊이 가담하여 일경에 수배되어 고향 해주를 내려갔다가 상하이와 프랑스를 거쳐 1920년 독일로 망명하였다. 이미륵은 대구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큰딸은 3년 후 사망했고, 아들 명기는 1919년 상해 망명할 때 태어났다. 이미륵은 제1차 세계대전을 지켜보았다. 벨기에에서 열린 피압박민족세계대회에 참여해 일제의 부당함과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
 
이미륵은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철학·생물학을 전공하고 1928년 7월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 뮌헨대학 동양학부에 교수로 초빙되어 1948년 여름학기부터 한학과 한국어 및 한국 문학을 강의하였다. 이미륵의 제자 ‘볼프강 바우어’는 뮌헨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되었고, 제자 ‘권테 대본’은 하이델베르크 동양학부 교수가 되었다.
 
이미륵은 1931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46년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라는 자전적 소설을 발표하여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책은 뮌헨 피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60년 전혜린(田惠麟)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무던이》,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이상한 사투리》 등의 작품이 있다. 1974년 서독 에오스출판사가 간행한 중·단편집 《이야기(Iyagi)》와 1982년 한국분도출판사가 출간한 중편집 《압록강에서 이자르강까지(Von Yalu biszur Isar)》와 1984년 출간된 《이상한 사투리(Der Andere Dialekt)》의 3권의 유고집이 있다. 소설 이외에도 수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문화·정치에 관한 여러 편의 글과 《한국어문법》(1927) 등을 남겼다. 이미륵은 30년간 고향을 못 가고 독일에서 가족과 서신을 교환하다 외롭게 세상을 등졌다.
 
 
작가, 철학자, 독립투사 이미륵 그레펠핑 시립묘지
 
 
이미륵은 고향 산천이 그리워 조선과 비슷한 땅을 찾아 언덕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글을 집필했다. 동양의 현인으로 존숭받는 그의 무덤은 독일 그레펠핑 시에 있는데 고인을 존경하는 송근준 선생이 30년째 돌보고 있다. 이미륵 동판이 2019년 5월 28일 그레펠핑 시의 후원으로 시청 옆에 있는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거리에 들어섰다.
 
철학자 이미륵의 한시(漢詩)가 부인 최문호 여사에게 배달되었다. 정규화 선생은 뮌헨의 Wehrlestrasse 30번지에 살다가 알고이 지방의 Vorderhindelang에 살았던 옷토 자일러 (자일러 교수의 아들)에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있다는 유품들을 찾아봐 달라고 몇 차례 부탁했었다. 1968년 4월 초, 만났을 때 옷토 자일러 씨로부터 자기의 집에 무슨 종이 뭉치가 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973년 4월 10일 옷토 자일러 씨가 이 자료들을 들고 뮌헨에 사는 정규화 선생을 찾아와 전달했다. 그 자료 중에 부인 최문호 여사에게 보낸 것으로 추측되는 한시(漢詩)가 함께 있었다. 초안의 원본은 다른 문헌들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 (2층) 자료실에 전시되고 있다.
 
 
文回錦織緻妻思 (문회금직치처사)
斷絶恩情不學癡 (단절은정불학치)
雲雨塞歎終有別 (운우새탄종유별)
分時怒問任猜疑 (분시노문임시의)
 
곱게 짠 비단에 부인의 생각이 촘촘히 적혔구료.
사랑이 단절되었다고 어리석은 일은 배우지 않는다오.
암울한 세상에 막혀 탄식하다 끝내 이별을 택하였지만
헤어질 때 화내어 물으면서 괜한 의심을 했던 것 같소. (번역: 이주형 선생)
 
 
이미륵의 한시(漢詩)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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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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