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의 날을 맞이하여 안의사에 대하여 알아본다.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신천군 청계동에서 성장하고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 학교를 운영했으며 연해주에 망명 후 의병으로 국내 진입 작전 및 12인 단지 동맹 등의 내용을 1편에서 소개하였다. 오늘은 하얼빈 의거 계획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재판 과정, 옥중에서 저술한 자서전, 뤼순감옥의 순국까지 포스팅한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웅이여 영원하소서!
\na-;▼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왼 손가락을 잘라 맹세한 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 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고 700km가 넘는 하얼빈으로 갔다.
\na-;▼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중국 하얼빈 역의 이토 히로부미와 러시아 재무대신이 보인다.
\na-;▼ 안중근,유동하, 우덕순, 조도선 4분이 재판에 당당하게 임하고 있다.
\na-;▼ 안중근 사형, 우덕순 3년형, 유동하와 조도선은 각각 1년 6개월의 형이 확정되었다.
아 충격이다! 안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이 3년형을 마친후 만주에서 일제 밀정을 했다는 자료가 확인,공개되었다. 어찌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민족과 동지를 배반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를 죽음으로 만들었는지 지하에서 동지들은 통곡한다. -2019.8.13 KBS -
\na-;▼ 안응칠(安應七)은 안중근의 어릴 때 이름이다.
\na-;▼ 자식이 옮은 일로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가 아니며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 -모친 조마리아(1862~1927)-
\na-;▼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최후의 유언 -
\na-;▼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의사는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 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한국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na-;▼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하얼빈에 뼈를 묻었다가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그 뒤 일제는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 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안중근 묘소가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서 일제가 감춘 것이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na-;▼ 그 당시 일제의 교활함이 보이는 사진. 당당한 안의사를 초췌한 표정의 범죄자(단지 한 야쿠자)처럼 찍은 사진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옮은 일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안의사를 욕보이고 2번 죽이는 일이므로 앞으로 이런 안의사 사진은 사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na-;출처: 안중근의사 기념관, 네이버지식백과, 위키백과, 구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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