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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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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23년 12월 23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베이징 남당과 조선 연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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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곤여전도(坤與全圖)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 소현 세자(昭顯世子)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蕩若望) 이이명(李頤命) 홍대용(洪大容) # 마테오 리치 묘 # 만국전도 # 베이징 베이징 남당 # 연행사 # 이기지
최근 3개월 조회수 : 2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3.12.23. (최종: 2023.12.26. 09:31)) 
◈ 베이징 남당과 조선 연행사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핸드폰을 분실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통화도 했는데 핸드폰이 귀신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공항에서 짐을 버스에 넣을 때 잠시 옆에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핸드폰을 분실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통화도 했는데 핸드폰이 귀신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공항에서 짐을 버스에 넣을 때 잠시 옆에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버스는 공항을 떠나 베이징 시내로 정신없이 달렸다. 전화를 걸어보니 중국 사람이 국제공항에서 전화를 받았다. 가이드가 핸드폰을 가진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핸드폰을 맡길 장소를 알려주고는 10일 후에 베이징에 다시 돌아오니 그때 핸드폰을 받겠다고 말했다. 중국인은 “공항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해 바로 식당 〈郭林〉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베이징 식당 '郭林家常菜'
 
 
대원들은 맛있는 중국 가정식 백반(쟈창차이, 家常菜) 을 먹은 후 핸드폰이 도착할 때까지 식당 주변을 산책했다. 얼마 후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나타나 핸드폰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감사의 인사로 사례를 하였으나, 그냥 교통비만 받고 휭하니 사라졌다, 대원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가이드는 "여권과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오! 부탁"하고는 여권을 걷었다, 중국 호텔에 도착하면 여권을 모두 제출하고, 한 사람씩 개인 사진을 찍어서 제출한다고 설명했다. 버스가 답사 첫 방문지인 베이징 남당으로 향했다.
 
 
베이징 남당 방문 기념사진
 
 
식당을 출발한 버스는 10분도 안 돼 한가한 사거리에 버스를 정차했다. 성당 십자가가 보였지만, 다른 관광객이 없었다. 성당 입구에 도착하니 출입문이 공사로 굳게 닫혀있었다. 조선에서 연경에 온 연행사들의 작은 흔적을 보려고 큰 기대를 하였는데 성당 출입문이 잠겨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대문 틈새로 내부를 보았다. 가이드는 다른 성당을 방문한다고 알려주었다.
 
중국 수도 베이징에는 17개의 성당이 있는데, 청나라가 초기에 인가한 천주교 성당은 4개이다. 마테오 리치(1552~1610, Matteo Ricci, 이마두, 利瑪竇, 利子)는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나 1571년 예수회에 가입했다. 1578년 포르투갈 국왕의 비준을 받고 리스본을 출발, 9월 13일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4년을 머문 리치는 1582년 말라카를 거쳐 명나라 광동성 자오칭(肇慶, 조경, 마카오)에 도착했다.
 
리치는 승려 복장을 하고, 미켈레 구지에리(Michele Ruggieri, 1543~1607) 신부에게 언어를 배웠다. 6년간 중국어와 유교, 불교 경전을 두루 공부하며 동서양의 문화를 회통(會通)했다. 1601년에 유학자의 차림으로 연경 자금성에서 황제 만력제를 만나 자명종과 프리즘을 선물하고, 정주(定住) 허락을 받았다. 황제에게 지도를 만들고 싶다고 간청하여 1602년 마테오 리치 신부는 이지조의 도움으로 《곤여만국전도》를 작성했다.
 
이때 서해의 이름이 황해가 되었다. 1603년 《천주실의》 교리서를 한역하고, 1605년 황제의 도움으로 남당을 건립했다. 1603년 북경에 연행사로 간 이광정과 권희 등이 1602년 마테오 리치 신부와 이지조가 만든 《곤여만국전도》를 조선으로 가져왔다.
 
 
《곤여만국전도》(사진:문화재청)
 
 
홍대용(1731~1783)은 1765년 11월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숙부 홍억(洪檍)을 수행하여 연경을 방문할 때 거문고를 가지고 갔다. 그는 연경에 도착하여 성당 신부에게 대화를 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다시 서신을 보내고 청심환, 부채 등 선물을 보낸 끝에 허락받고 1월 9일 일관(日官) 이덕성, 역관 홍명복을 대동하여 남당을 방문한다.
 
독일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 1703~1774)과 포우관(鮑友官, Anton Gogeisl)에게 천주교 교리에 관한 질문을 하고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서양 신부는 홍대용에게 연주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음악에 정통한 홍대용은 통역을 통해 연주법을 듣고는 바로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했다. 신부들은 깜짝 놀라 홍대용의 얼굴을 뚫어질 듯 보았다.
 
 
2023 홍대용과학관 행성체험교실 (사진: 천안홍대용과학관)
 
 
홍대용은 천문역법, 시계류 등을 보았지만 망원경은 접하지 못했다. 홍대용은 중국에서 서양악기 양금을 조선에 들여와 1772년 자기 집에서 유춘오 등 여러 친구를 초대해 연주를 하였다. 자리에 동석했던 연암 박지원은 신비한 악기 연주를 듣고 《연암집》에 수록했다.
 
김창업, 이기지, 홍대용, 이승훈, 김순협, 박지원 등은 연경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면서 흠천감 선교사 숙소이며 성당으로 사용하는 남당을 방문하고 신부들과 대화를 했다. 연행사들은 유리창(琉璃廠) 서점 거리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과 선진문물, 서양의 생활문화를 체험하고 신기한 물건들을 사서 조선으로 가져왔다. 조선에 들어온 주문모 선교사의 파견은 주교관인 남당에서 결정되었다.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기 위한 고부사(告訃使)로 조정은 이이명을 임명한다.
 
이이명은 아들 이기지(李器之, 1690~1722)와 함께 북경으로 향한다. 젊은 선비 이기지는 북경에서 성당을 14번 방문해 포도주를 마셔보고, 천주교 성물인 마리아와 성모자상(聖母子像)을 그린 서양화를 감상하고 조선에 가져왔다. 그의 가문은 대단한 왕족 가문이었고, 이기지는 한학 실력을 겸비한 박학다식한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 중국에 다녀온 다음 해 아버지가 경종 임금을 시해할 목적으로 청에서 독약을 몰래 가져왔다는 황당한 누명을 받았다.
 
이기지는 중국 북경에 사절로 다녀온 지 1년 만에 옥에서 고문으로 심한 매를 맞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기지는 북경에 62일간 머물면서 30일간 프리델리 신부를 14번 만났다. 프랑스 신부인 부베(Joachim Bouvet), 레지, 자르투, 코르도스, 쾨글러 신부 등을 만나 대화하며 포도주와 카스텔라 빵을 대접받고, 수도꼭지, 자명종, 만년필, 성냥 등 서양의 일상생활용품 등을 보았다. 그는 서양 천문학과 수학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베이징 남당 (박헌렬 교수)
 
 
마테오 리치 묘는 베이징 서성구(西城區) 지하철 2호선 처공좡역(車公庄站)에서 가까운 북경행정학원 교내 정원에 있다. 무덤 중앙에는 28년간 연경에서 머물다 1610년 5월 11일 선종한 마테오리치 신부의 묘가 있고 옆에는 독일 선교사 아담 샬(湯若望, Johannes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의 무덤과 베르비스크 신부의 묘가 있다.
 
 
신부 마테오리치 묘
 
 
아담 샬은 천문학자로 조선의 소현세자와 친하게 지냈다. 소현세자는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로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서 9년간 머물었다. 세자는 서양 문물 수용에 적극 앞장을 섰던 인물이다. 아담 샬은 1622년 명나라에 도착하여 서양식 역법을 적용한 시헌력을 만들어 권장했다. 순치제는 신부를 존경하여 만주어로 아버지의 존칭어인 ‘마법(瑪法)’으로 높혀 불렀다.
 
1653년에는 ‘진리를 통달한 선생’이란 뜻을 가진 통현교사(通玄敎師)란 봉호를 내렸다. 마담샬은 순치제가 죽고 어린 강희제가 즉위하자, 모함을 받고 반역죄로 체포되어 1664년에 사형에 처한다는 중형을 받았다. 신부들이 적극 구명을 위해서 나섰으나 허사였다. 다음 해에 병으로 죽고 ‘통현교사’ 봉호를 취소했다. 나중에 강희제가 신부의 억울한 누명을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시켰다.
 
벨기에 출신인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南懷仁, Ferdinand Verbiest, 1623~ 1688) 신부는 1659년 베이징에 도착하여 강희제의 두터운 신임으로 정2품 공부 시랑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는 흠천감이 되어 역법의 개정에 이바지하고 관상대를 건립했다. 1673년 오삼계 등이 강남에서 일으킨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대포를 만들어 청조에 도움을 주었다. 1674년(康熙 13) 세계지도 《곤여전도》를 목판으로 만들었다.
 
 
페르비스트 《곤여전도》 (사진: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페르비스트가 1674년 작성한 《곤여전도(坤輿全圖)》는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를 양 반구형 세계지도로 개정한 작품이다. 조선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연행사들이 연경에서 가져온 세계지도를 보고 세계관을 넓혔다.
 
 
여필(汝弼) 박정실 필사,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 1661년 제작( 사진:문화재청)
 
 
당시 중국 황제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고 있던 마테오 리치는 1602년에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만들면서 동아시아를 중앙에 오도록 배치하고, 서양 나라 이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1630년 정두원이 명나라에 진주사로 갔다가 귀국할 때 로드리게스 신부로부터 홍이포, 천리경, 지도가 들어있는 《직방외기》를 얻어왔다. 선교사 알레니(Aleni·1582~1649)는 복건성에서 주로 활동했다.
 
선교사는 1623년에 한문판 휴대용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세계지도 〈만국전도〉를 포함했다. 문신 박정설(朴廷薛, 1612~1693)이 1661년 필사한 세계지도 〈만국전도, 70.2×132cm〉는 알레니의 지도를 그린 것으로 〈만국전도〉의 제작 연대가 제일 오래되었다. 지도는 1994년 휘경동 자택에서 도난을 당해 그동안 행방을 몰랐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2019년 경북 안동의 한 식당 내부 벽지 속에서 문화재를 발견하고 회수하였다.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 박재문 소유자는 1989년 9월 1일 보물 제1008호로 지정된 문중 전적 46점을 포함한 유물 180점을 2020년 9월 예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베이징 북당(北堂) 스테인드글라스
 
 
중국 천주교 신자는 약 1,200만 명으로 중국천주교애국회(中國天主敎愛國會) 소속이다. 신자들은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리지만, 특별한 종교 모임을 하지 않는다. 천주교는 청나라 황제의 도움으로 일찍 안착했지만, 금교(禁敎), 아편전쟁, 가경제의 선교사 추방령(1811),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지원금 중단 등 여러 요인으로 신자가 증가하지 않았다.
 
 
베이징시 천주교애국회(中國天主敎愛國會) 간판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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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인조
형제 : 소현 세자, 봉림 대군, 인평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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