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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9.21. 16:55 (2020.09.21. 16:55)

안양의 문자박물관과 곡부(曲阜)의 공묘(孔廟)를 관람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천년이 넘는 고목들 사이에서 아사달의 흔적을 느끼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편이다. 허난성 안양의 문자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8시에 출발하였다. 이윽고 박물관 주차장에 주차한 후 입장하였다. 박물관 건물 앞에 자(字)를 크게 형상화한 건축물이 25미터 높이로 서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새로 신축한 5층 건물로 웅장한 편이다. 이미 한 번 방문한 곳이다.
 
이들이 문자박물관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마 동방의 문자를 자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문헌에 의거하면, 동방문자(漢字·한자)는 황제의 사관인 창힐(蒼頡)이 새 발자국을 보고 최초로 만들었는데 창힐은 동이인(東夷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등장하는 갑골문 역시 은나라의 상족(商族)이 만들었는데 이들 역시 동이인이다.
 
이와 같은 문헌조차 낙빈기는 그의 저서인 금문신고(金文新考)에서 문자 창조의 실상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하였다. 낙빈기는 동방문자의 기원이 되는 금문이 갑골문보다 천년 정도 앞선 문자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신농(神農)계가 동방문자를 처음 만들었으며, 후대 황제계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등 왜곡시켰다고 밝혔다.
 
박물관은 4층까지 전시실로 구성돼 고대 중원지역에서 만들어진 문자와 그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문자의 시작인‘도편문자부터 갑골문·금문·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순으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각 문자체에 대한 역사와 유명 서법가들의 글씨체도 보인다. 특히 이들의 문자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문자 체계는 갑골문을 최초의 글자로 본다는 점이다. 이곳 문자박물관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금문보다 갑골문을 앞세우고 있었다.
 
더구나 서기전 23세기 이전에 나타나는 금문 형태의‘족씨명칭(族氏名稱)을 족씨명호(族氏名號)라고 부르며 갑골문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실제 갑골문 글자는 고금문(古金文)의 형태로 기술하였다. 족씨명칭은 은상(殷商)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서기전 25세기 전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서기전 23세기 말에 사라진다. 즉 족씨명칭은 갑골문 시기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100년 전 나타났던 의고학파(擬古學派)의 고힐강(顧頡剛)의 ‘고사부정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후 이들은 은상 이전의 역사 실체를 부정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기전 17세기 이전에 제작된 청동기 비정 시기도 모두 서기전 16세기 이후로 간주하였다. 또한 서기전 16세기 이전에 나타난 금문을 부정하고, 서기전 16세기에 나타났던 갑골문을 최초의 문자로 단정하였다.
 
1층에 내려와서 문자학에 관련된 서책 몇 권을 구입하고 버스에 승차하였다. 버스는 복양(濮陽)시의 서수파유지(西水坡遺址)에 있는‘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을 보기 위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중간 휴게소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도달한 곳은 고속도로 변의 높은 구릉에 외롭게 서 있는 거대한 용(龍)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 둔 ‘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이었다. 3층의 계단을 올라가니 주변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다시 주차장으로 오다가 낡은 건물에 몇 명의 아낙네들이 보여 박 교수, 윤 박사와 들어가니 벽에 오색 줄과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의 초상화를 걸어둔 무당집이었다. 여인 셋은 모두 무당으로 자매 사이이며, 큰 언니가 두 명의 여동생을 소개해주었다. 서로 반갑다면서 수박을 꺼내오며 먹으라고 한다. 종교학자인 윤 박사는 신이 났다. 사진도 찍고 유쾌하게 떠들다가 나왔다.
 
우리 일행은 오후 3시 경에 승차하여 곡부(曲阜)의 공묘(孔廟)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니 공림(孔林)을 지나치고 있었다. 거의 공부(孔府)에 온 모양이다. 나와 고향친구인 셋은 이미 왔던 곳이다. 공묘 주변은 사람들도 많아 매우 시끄러웠다. 버스를 주차시키고 공묘의 출입문까지 걸었다. 입장권을 끊어 공부에 들어가니 천년이 넘는 측백나무·향나무·은행나무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여러 개의 문을 지나서 공부의 장서루(藏書樓)인 규문각(奎文閣)이 나타나고 대성문(大成門) 안에는 대성전(大成殿)·침전(寢殿)·성적전(聖跡殿)이 배치되어 있었다. 대성전 좌우에는 동무·서무 등의 건축군이 위치하였다.
 
현재의 공부는 후한 말 환제(桓帝) 때인 서기 153년에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저택을 확장하여 건립되었으며, 3만7500평의 면적에 620여 칸이 있는 건축물이다. 대성전 중앙에는 안회·증참·맹가 등 12명의 성현이 모셔져 있으며, 본전의 앞뒤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한 석주가 10본이 있었다. 또한 좌우에는 각 4본의 석주에 1면당 9마리의 용을 8면에 새겨 놓았다.
 
고향친구 무리인 우리 일행 6명은 지난 방문 때 못 찾은 공자의 무덤을 찾으려고 했지만 주어진 시간 관계로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현재의 곡부시는 공부 지역이 중심지역이다. 서기 전 2500년 이후 고대시기에 곡부로 도읍한 왕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전 2517년에 신농제(神農帝·43년 재위·서기전 2517~2475)가 이 곳 곡부에 처음으로 도읍하였다. 다음으로 제소호(少皞金天·소호김천·서기전 2474~2468)가 7년 동안 황제를 대신하여 정사(政事)를 보았다. 또한 200년 후 제익(帝益·서기전 2303~2298)이 제우(帝禹)를 이어 6년 동안 곡부에 도읍하여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 제우의 아들 하계(夏啓)가 왕위 승계에 불만을 품고 남편 제우의 제삿날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곡부에서 제익(帝益)과 함께 안양에 왔던 자신의 어머니인 사모무(司母戊)와 매형 제익을 살해하였다. 하계는 하(夏)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 인해 220년 동안의 신농계와 황제계의 연합정권은 무너지고 동시에 양급제(푸날루아·Punalua)의 왕위계승제가 끝났다. 이후 하계의 부자계승제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서기전 23세기 이전의 동방 사회는 신농계의 이(夷)족과 황제계의 화(華)족이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지만, 하계의 쿠데타 이후 이족과 화족이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제익이 다스리던 도읍지인 곡부는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자연 신농제의 유적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소남자 김재섭 선생은 곡부가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찾았던 아사달이며, 현재의 공부는 공구(孔丘·공자)가 신농제의 유적을 차지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지적하였다. 고대시기 곡부에 처음 도읍한 왕은 신농제였다. 이후 제소호·제익이 뒤를 이었기 때문에 김재섭 선생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6시 경에 승차하여 숙소인 제녕(濟寧)시 가열주점(佳悅酒店)으로 향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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