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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 이일걸의 지식창고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다큐먼트소개 자료실
지식지도
작업내역
2021년 1월
2021년 1월 4일
태행산 대협곡 중 팔천협(八泉峽)을 유람하다
2020년 12월
2020년 12월 30일
중국의 아시아의 그랜드캐년인 태행산 여행을 떠나다
2020년 12월 20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하다
2020년 12월 13일
사슴돌 비석 삽화에서 몽골 ‘북두칠성’숭배신앙 발견하다
2020년 12월 12일
몽골 적석총의 구조 형식과 타리아트군(郡)의 적석총 사슴돌 비석을 탁본하다
2020년 11월
2020년 11월 29일
몽골 사슴돌 비석의 유형과 의미 및 타리아트군(郡) 적석총의 규모
2020년 11월 22일
가장 뛰어난 몽골의 적석총과 사슴돌 비석의 분포 현황
2020년 11월 17일
몽골의 신성스러운 다얀산에서 천제를 지내다
2020년 11월 9일
알타이 산에서 천제(天祭) 지내 조국부강 기원하다
2020년 11월 4일
알타이시를 향해 천리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2020년 10월
2020년 10월 25일
삭막한 회색의 도시 비얀홍고르를 향해 승용차는 달렸다
2020년 10월 20일
몽골제국 초기 수도 ‘카라코룸’의 흔적을 찾아
2020년 10월 11일
민족의 뿌리 찾아 나선 몽골 알타이산맥 탐험
2020년 10월 4일
하바롭스크 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다
2020년 9월
2020년 9월 27일
연해주 항일투쟁의 자취 따라 우수리스크를 답사하다
2020년 9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연방대학교’와 ‘바틀리나 곶’을 답사하다
2020년 9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연해주 항일투쟁의 요람 신한촌 답사기
2020년 9월 6일
블라디보스톡 여행과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과정
2020년 8월
2020년 8월 30일
대문구(大汶口) 박물관과 태산(泰山)을 다시 오르다
2020년 8월 23일
안양의 문자박물관과 곡부(曲阜)의 공묘(孔廟)를 관람하다
2020년 8월 16일
하남성 박물관·악비묘(岳飛廟) 및 은허박물관를 가다
2020년 8월 9일
낙양고묘박물관·중악묘·소림사·용문석굴을 방문하다
2020년 8월 2일
화산(華山)을 오르고 천하에 제일 험했다는 함곡관(函谷關)을 가다
2020년 7월
2020년 7월 26일
서안(西安)의 비림박물관과 섬서성박물관 및 반파유적지를 답사하다
2020년 7월 19일
중원지역의 서안(西安)을 답사하다
2020년 7월 12일
청도(靑島)시의 도교(道敎) 명승지인 노산(嶗山)을 오르다
2020년 7월 5일
태산(泰山)과 곡부의 공부(孔府)를 답사하다
2020년 6월
2020년 6월 28일
중국의 고대 역사유적지 안양(安陽)의 은허박물관을 답사하다
2020년 6월 23일
일제와 투쟁했던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여순 감옥으로 향하다
2020년 6월 15일
遼 태조릉과 제단 및 요상경(遼上京) 유지(遺址)를 답사하다
2020년 6월 10일
적봉(赤峰) 박물관과 옹우특기(翁牛特旗) 박물관을 견학하다
2020년 6월 2일
우하량 홍산 문명의 핵심과 요중경박물관 전시기록의 유감
2020년 5월
2020년 5월 26일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지와 적봉시의 홍산(紅山)으로 가다
2020년 5월 17일
대련의 대흑산(大黑山)과 북진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오르다
2020년 5월 11일
미창구(米倉溝) 장군묘와 호산장성 대신에 봉황산에 들리다
2020년 5월 4일
환인지역의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2020년 4월 27일
장군총과 환도산성 및 국내성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18일
고구려 장천1호분과 국동대혈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12일
제3차 고구려 역사유적 및 산성을 답사하다.
2020년 4월 5일
청조의 조종산인 장백산이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을 향하다
2020년 3월
2020년 3월 29일
고구려의 흔적 고구려산성을 답사하다
2020년 3월 22일
두만강가에서 꽃제비를 만나고 모아산(帽兒山)에 오르다
2020년 3월 15일
백두산 현명봉과 토문강, 두만강 원류를 답사하다
2020년 3월 8일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다시 오르다
2020년 3월 1일
간도개척과 항일투쟁의 중심지 용정을 가다
2020년 2월
2020년 2월 23일
봉오동 전투현장과 두만강가 ‘사이섬’으로 가다
2020년 2월 16일
KBS 역사스페셜 팀과 토문강·두만강 원류 탐사를 떠나다
2020년 2월 9일
발해만 지역의 고구려산성을 처음으로 답사하다
2020년 1월
2020년 1월 30일
태자하(太子河)에 접한 난공불락의 백암성(白巖城)을 답사하다
2020년 1월 19일
심양 고궁(古宮)과 요령성 박물관을 관람하다
2020년 1월 5일
연변대의 학술세미나 거부당하고 국동대혈을 답사하다
2019년 12월
2019년 12월 23일
모용황, 정말 미천왕릉을 도굴해 시신을 가져 갔을까
2019년 12월 17일
광개토호태왕릉비와 장군총을 다시 찾다
2019년 12월 9일
고구려 벽화의 상징적 사상과 미적 아름다움에 빠지다
2019년 12월 2일
세계의 문화유산인 아름다운 고구려 벽화를 보다
2019년 11월
2019년 11월 25일
집안에서 ‘고구려문화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다
2019년 11월 12일
중국의 고도 낙양·서안서 5천년 전 성황당 원형 발견
2019년 11월 4일
세칭 중원문화의 중심지 정주(鄭州)를 향하다
2019년 10월
2019년 10월 21일
동양평화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역에서
2019년 10월 14일
안중근의 기개 어린 송화강가의 하얼빈시를 가다
2019년 10월 8일
길림시의 고구려시기 용담산성에 오르다
2019년 10월 7일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다
2019년 9월
2019년 9월 30일
다시 구름이 가득 낀 백두산을 오르다
2019년 9월 22일
웅장한 장군총과 꿈에 그리던 광개토대왕비를 만나다
2019년 9월 16일
수많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만나고 환도산성에 오르다
2019년 9월 8일
집안의 고구려 벽화를 실제로 보기로 결심하다
2019년 9월 1일
북경의 만리장성에 오르고 유리창 거리를 거닐다
2019년 8월
2019년 8월 25일
연변 동포들의 문학과 예술의 수준은 어떠할까
2019년 8월 18일
남·북한·미국 및 연변대 동포학자들과 어울린 학술회의
2019년 8월 12일
연변대학의 조선학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다
2019년 8월 4일
꿈에 젖은 이별의 강, 두만강을 마주하다
2019년 7월
2019년 7월 28일
동간도지역 개척지의 첫 마을 용정을 가다
2019년 7월 21일
백두산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며…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기원
2019년 7월 13일
백두산의 천지와 주변 봉우리 명칭은 누가 지었나
2019년 7월 6일
우리 민족의 성산…백두산의 천지를 오르다
2019년 6월
2019년 6월 29일
간도 첫 답사…‘요하문명’의 실체는 ‘홍산 문화 유적’
2019년 6월 22일
간도 대륙 역사를 시작하며…아직 살아있는 간도협약
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9.21. 16:55 (2020.09.21. 16:55)

【역사】안양의 문자박물관과 곡부(曲阜)의 공묘(孔廟)를 관람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천년이 넘는 고목들 사이에서 아사달의 흔적을 느끼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편이다. 허난성 안양의 문자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8시에 출발하였다. 이윽고 박물관 주차장에 주차한 후 입장하였다. 박물관 건물 앞에 자(字)를 크게 형상화한 건축물이 25미터 높이로 서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새로 신축한 5층 건물로 웅장한 편이다. 이미 한 번 방문한 곳이다.
 
이들이 문자박물관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마 동방의 문자를 자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문헌에 의거하면, 동방문자(漢字·한자)는 황제의 사관인 창힐(蒼頡)이 새 발자국을 보고 최초로 만들었는데 창힐은 동이인(東夷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등장하는 갑골문 역시 은나라의 상족(商族)이 만들었는데 이들 역시 동이인이다.
 
이와 같은 문헌조차 낙빈기는 그의 저서인 금문신고(金文新考)에서 문자 창조의 실상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하였다. 낙빈기는 동방문자의 기원이 되는 금문이 갑골문보다 천년 정도 앞선 문자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신농(神農)계가 동방문자를 처음 만들었으며, 후대 황제계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등 왜곡시켰다고 밝혔다.
 
박물관은 4층까지 전시실로 구성돼 고대 중원지역에서 만들어진 문자와 그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문자의 시작인‘도편문자부터 갑골문·금문·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순으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각 문자체에 대한 역사와 유명 서법가들의 글씨체도 보인다. 특히 이들의 문자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문자 체계는 갑골문을 최초의 글자로 본다는 점이다. 이곳 문자박물관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금문보다 갑골문을 앞세우고 있었다.
 
더구나 서기전 23세기 이전에 나타나는 금문 형태의‘족씨명칭(族氏名稱)을 족씨명호(族氏名號)라고 부르며 갑골문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실제 갑골문 글자는 고금문(古金文)의 형태로 기술하였다. 족씨명칭은 은상(殷商)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서기전 25세기 전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서기전 23세기 말에 사라진다. 즉 족씨명칭은 갑골문 시기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100년 전 나타났던 의고학파(擬古學派)의 고힐강(顧頡剛)의 ‘고사부정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후 이들은 은상 이전의 역사 실체를 부정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기전 17세기 이전에 제작된 청동기 비정 시기도 모두 서기전 16세기 이후로 간주하였다. 또한 서기전 16세기 이전에 나타난 금문을 부정하고, 서기전 16세기에 나타났던 갑골문을 최초의 문자로 단정하였다.
 
1층에 내려와서 문자학에 관련된 서책 몇 권을 구입하고 버스에 승차하였다. 버스는 복양(濮陽)시의 서수파유지(西水坡遺址)에 있는‘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을 보기 위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중간 휴게소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도달한 곳은 고속도로 변의 높은 구릉에 외롭게 서 있는 거대한 용(龍)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 둔 ‘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이었다. 3층의 계단을 올라가니 주변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다시 주차장으로 오다가 낡은 건물에 몇 명의 아낙네들이 보여 박 교수, 윤 박사와 들어가니 벽에 오색 줄과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의 초상화를 걸어둔 무당집이었다. 여인 셋은 모두 무당으로 자매 사이이며, 큰 언니가 두 명의 여동생을 소개해주었다. 서로 반갑다면서 수박을 꺼내오며 먹으라고 한다. 종교학자인 윤 박사는 신이 났다. 사진도 찍고 유쾌하게 떠들다가 나왔다.
 
우리 일행은 오후 3시 경에 승차하여 곡부(曲阜)의 공묘(孔廟)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니 공림(孔林)을 지나치고 있었다. 거의 공부(孔府)에 온 모양이다. 나와 고향친구인 셋은 이미 왔던 곳이다. 공묘 주변은 사람들도 많아 매우 시끄러웠다. 버스를 주차시키고 공묘의 출입문까지 걸었다. 입장권을 끊어 공부에 들어가니 천년이 넘는 측백나무·향나무·은행나무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여러 개의 문을 지나서 공부의 장서루(藏書樓)인 규문각(奎文閣)이 나타나고 대성문(大成門) 안에는 대성전(大成殿)·침전(寢殿)·성적전(聖跡殿)이 배치되어 있었다. 대성전 좌우에는 동무·서무 등의 건축군이 위치하였다.
 
현재의 공부는 후한 말 환제(桓帝) 때인 서기 153년에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저택을 확장하여 건립되었으며, 3만7500평의 면적에 620여 칸이 있는 건축물이다. 대성전 중앙에는 안회·증참·맹가 등 12명의 성현이 모셔져 있으며, 본전의 앞뒤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한 석주가 10본이 있었다. 또한 좌우에는 각 4본의 석주에 1면당 9마리의 용을 8면에 새겨 놓았다.
 
고향친구 무리인 우리 일행 6명은 지난 방문 때 못 찾은 공자의 무덤을 찾으려고 했지만 주어진 시간 관계로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현재의 곡부시는 공부 지역이 중심지역이다. 서기 전 2500년 이후 고대시기에 곡부로 도읍한 왕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전 2517년에 신농제(神農帝·43년 재위·서기전 2517~2475)가 이 곳 곡부에 처음으로 도읍하였다. 다음으로 제소호(少皞金天·소호김천·서기전 2474~2468)가 7년 동안 황제를 대신하여 정사(政事)를 보았다. 또한 200년 후 제익(帝益·서기전 2303~2298)이 제우(帝禹)를 이어 6년 동안 곡부에 도읍하여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 제우의 아들 하계(夏啓)가 왕위 승계에 불만을 품고 남편 제우의 제삿날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곡부에서 제익(帝益)과 함께 안양에 왔던 자신의 어머니인 사모무(司母戊)와 매형 제익을 살해하였다. 하계는 하(夏)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 인해 220년 동안의 신농계와 황제계의 연합정권은 무너지고 동시에 양급제(푸날루아·Punalua)의 왕위계승제가 끝났다. 이후 하계의 부자계승제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서기전 23세기 이전의 동방 사회는 신농계의 이(夷)족과 황제계의 화(華)족이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지만, 하계의 쿠데타 이후 이족과 화족이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제익이 다스리던 도읍지인 곡부는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자연 신농제의 유적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소남자 김재섭 선생은 곡부가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찾았던 아사달이며, 현재의 공부는 공구(孔丘·공자)가 신농제의 유적을 차지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지적하였다. 고대시기 곡부에 처음 도읍한 왕은 신농제였다. 이후 제소호·제익이 뒤를 이었기 때문에 김재섭 선생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6시 경에 승차하여 숙소인 제녕(濟寧)시 가열주점(佳悅酒店)으로 향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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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시 (1)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