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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10.05. 16:41 (2020.10.05. 16:41)

연해주 항일투쟁의 자취 따라 우수리스크를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비인간적 대우에도 성실히 노력하여 황금옥토를 일궜던 한인들 추모
오늘은 연해주 답사 사흘째다. 이곳 날씨도 완연히 가을이다. 가로수 잎도 붉은색에서 바래져 옅은 누른 황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 일행은 아침식사 후 9시경 항일투쟁가들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의 고택과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 유허비가 있는 우수리스크로 출발하였다.
 
도로변 가로수의 낙엽들이 떨어져 뒹구는 모습이 이미 이곳은 늦은 가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차창에는 붉은 벽돌에 양철 지붕을 얹은 집들도 많이 보였다. 특히 산등성이 마루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도 여러 번 보였다, 아마 혼란시기에 이주한 러시아인들이 마을의 보호와 생명의 안전을 위해 높은 지역에 집을 지었을 것으로 보였다.
 
한 시간 후 버스는 ‘라즈돌노예’ 역에 도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지점인 이곳은 1937년 9월 9일 스탈린에 의해 최초로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역이다. 첫 이주 한인들은 503명으로 35가구였다. 라즈돌노예 역은 부근에 마을도 형성되지 않은 변두리의 시골역이다. 주변은 넓은 들이 펼쳐져서 이곳이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주한 한인들이 반세기 이상 이곳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았던 곳이다.
 
당시 한인들이 하루 이틀 전에, 길게는 5일 전에 이주명령을 받고 씨앗과 귀중품만을 챙겨 떠나야 했던 곳이다. 그들은 왜 이주해야 하는지, 가는 목적지도 모른 채 동원된 39대의 열차에 있던 124대의 동물 운반용 짐칸에 실린 채 6000㎞를 달려 중앙아시아에 강제이주 당했다. 스탈린은 이와 같은 한인들의 비인도적인 추방에 대한 반발에 대비하여 고려인 지식인들을 선별하여 이주 전에 재판 없이 처형시켰다.
 
이주 도중에 난방조차 없는 짐칸에서 추위로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이 희생당하였다. 러시아의 이와 같은 강제이주의 주요 이유는 ‘일본 스파이’를 방지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유는 연해주의 이주 한인들의 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외에 근면한 고려인들을 이용해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시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드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주 한인의 ‘일본 스파이’ 문제는 추방에 대한 명목상의 이유이며, 러시아의 이주 한인의 진짜 목적은 이주 한인들의 연해주 인구증가와 지식층의 증가였고, 연해주 러시아인조차 갖지 못하는 대학을 여러 개 만든 이주 한인들의 성장속도였다. 이를 막기 위해서 한인들을 강제분산하고 이주시키려는 러시아의 쇼비니즘의 발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이주 규모는 9월 21일 1차 이주에서 카자흐스탄 2만1296명, 우즈베키스탄 3만명으로 총 1369가구 5만1299명이었다. 2차 이주는 9월 24일 실시되어 85대의 열차를 동원하여 연해주 지역 한인 전부를 이주시켰다. 10월 25일 한인 이주정책이 완료되었는데, 총 124대의 운송열차에 의해 17만1781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는 비인간적인 고초를 겪었다.
 
우리 일행은 라즈돌노예 역의 철로로 걸어보기도 하였다. 80년 전 이곳에서 열차에 오르며 강제로 끌려간 이주 한인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해가면서 이주했던 중앙이시아에서도 성실히 노력하여 황금옥토를 일구었던 이분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당시의 황당한 순간들을 연상해보았다.
 
역사 앞에서 파는 커피 한잔을 사먹고 있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했던 수송열차가 굉음을 내면서 라즈돌노예 역을 향해 오고 있었다. 모두들 휴대폰을 내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마치 이주 한인들을 싣고 갔던 열차를 연상하면서 나도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이 세운 ‘고려인문화센터’로 향했다. 11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이주 한인들이 연해주를 개척했던 사진들이 많은 ‘고려인역사관’을 관람하였다. 12시 30분에 장학금 전달식이 시작되었다. 남학생 4명과 여학생 3명이 장학금을 받았다. 이중 고려인 후손은 남학생 2명과 여학생 3명이었다.
 
부근에 있는 연해주 항일투쟁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 고택을 방문하였다. 큰길 모퉁이에 면한 100평 남짓한 주택으로 보인다. 인부들이 한창 주택 전체를 수리 중이었다. 그리고 한 구석 벽면에 붙은 낡은 페치카(러시아풍의 난로)가 보였다.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페치카를 두고 모여 앉아 항일투쟁의 방략을 토론하였을까.
 
연해주 항일투쟁의 대부인 최재형은 1920년 4월 7일 일본군이 자택에서 체포함에 따라 사베스카야 언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빨치산 부대로 피신하라는 가족들의 독촉을 거절하고, 자신의 피신으로 인한 가족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피신하지 않고 자택에 있다가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상해에서는 상해거류민단의 주최로 3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재형 선생과 순국한 인사들을 위한 추도회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휘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각 부의 총장 전원이 참석하였다. 1821년 상해 임정 대표단이 니콜스크-우수리스크를 방문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위로하였다고 하였다.
 
최재형은 1860년 함북 경원에서 출생해 연해주 연추 지신허 마을에 이주하였다. 11살에 집을 나와 러시아 상선의 견습수부가 되어 6년이나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우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무역과 통역원으로 일하였다. 이후 최재형은 군수업의 부를 축적하였으며, 연추의 도헌(군수)과 연추 한인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될 정도로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 및 학교와 교회 설립 등을 도와 한인들의 신뢰와 덕망을 쌓았다.
 
1907년에는 항일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에 취임한 뒤 이범윤․홍범도․안중근 부대에 무기를 공급하였으며, 대한의군의 의식주를 지원하고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09년 대동공보 사장으로 안중근과 함께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모의하고 직접 지원하여 암살을 성공시킨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배후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전후 사정을 볼 때 동의회와 대동공보사의 경영을 맡고 있는 최재형이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계로 최재형을 동의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며,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에서 안중근․우덕순 등 7명의 한국인이 시국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때 이토 히로부미의 하르빈(하얼빈) 방문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당시 제3차 의병전투에 실패한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항일인사들로 구성한 블라디보스토크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 ‘권업회’가 조직되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4년 1월에는 러시아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0년 제2회 ‘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는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19년에는 3․1항일투쟁 전후에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와 같이 최재형 선생은 모든 재산의 대부분을 항일투쟁에 사용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자녀들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개척자이며 항일투쟁의 대부로 활동했던 최재형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시다가 일제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에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지만 상훈이 실제보다 낮게 평가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李相卨․1870~1917․호는 보제․충북 진천 출신)의 유허비를 답사하였다. 가까이 수빈강이 흐르고 있었다. 48세롤 일기로 조국 광복을 못보고 병으로 눈을 감으면서 동해로 흐르는 수빈강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 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이여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마라.”
 
우리 일행은 유허비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이상설은 1894년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관장, 한성사범의 교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수빈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발해의 옛 성터인 ‘솔빈부’가 있어 답사하기로 하였다. 솔빈부는 주위보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탓으로 주변을 조망하기에는 적격이었다. 이때 먼 산 아래에서 말 십여 필을 몰아 이끌고 오는 말 탄 젊은이가 보였다. 모두들 신나게 가까이 오는 말들의 광경에 넋 나간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곳 솔빈부가 발해 명마의 고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탐사회원 일행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저녁식사 후 오늘밤 하바롭스크행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향했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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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