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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항일학생운동의 시발점 일제는 중일전쟁 후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중학생에게도 군사훈련을 강요하였다. 1939년부터는 경남의 중학교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체력훈련이란 명목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횡포는 학생들의 반일 감정을 들끓게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부산공설운동장 학생의거이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라는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학교의 명예뿐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노다이를 비롯한 일본인 심판들이 일본인 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민족 차별과 부정 판정을 일삼은 데 있었다. 동래중학과 부산2상 등의 한국 학생들은 시가행진에 들어가 “일본은 물러가라!”, “일본놈 죽여라!” 등의 반일 구호를 외치고, 나아가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이 옥고를 치렀고, 퇴학·정학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명수와 김선갑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출옥 후 2주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부산 학생운동사건은 폭악한 일제에 항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발휘한 학생의거이며,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적인 학생운동으로서 우리의 독립정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밝힌 것이었다. 당시 일제의 엄중한 보도관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 학생운동사건보다도 더 큰 학생운동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 이승만대통령과 임시수도 1950년 한국전쟁은 부산을 크게 변모시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정치·사회·경제 모든 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제2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피난민의 집중으로 인한 판자촌의 난립 등 오랫동안 부산 발전에 짐이 되는 요인들 또한 가지게 되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였던 곳으로 152점의 기록사진과 유품이 전시되고 있어 한국전쟁시 임시수도 부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 국보 • 개국원종공신녹권 - 제69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동궐도 - 제249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보물 • 안중근 의사 유묵 - 제569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초충도 수병 - 제595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융기문 토기 - 제597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마두식 각배 - 제598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쌍자 승자총통 - 제599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의령 보리사지 금동여래입상 - 제731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조대비 사순 칭경진하도병 - 제732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헌종 가례도병 - 제733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지자총통 - 제863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지장보살 삼존도 - 제1287호, 서대신동 2가
■ 유형문화재 (이하 시지정) • 3층석탑 - 제10호, 동대신동 3가 1 동아대학교 박물관
■ 무형문화재 • 부산농악 - 제6호 서대신동 산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