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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야리아 기지 부산진구 범전동 64의 3 및 연지동 130번지 일대 16만 8천여 평에는 하야리아 부대라는 미군 부산 기지 사령부가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1천 2백여 m 길이의 넓고 시원하게 펼쳐진 초원에서 식민지 조선 민중의 수탈을 대가로 희희낙락 경마를 즐기던 경마장으로 사용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버마(지금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남방 각지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용 보내기 위한 임시훈련소로 쓰이다가, 일본패전과 더불어 미군이 진주하게 된 고난과 비극의 상징적 땅이기도 하다. 일본이 항복한 뒤 우리나라에 진주해 온 미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초대 미군 부산기지사령관의 고향 이름인 ‘베이스 하야리야’의 이름을 빌어 이곳의 애칭으로 삼았다. 1948년 우리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철수하자 주한미군 사령부는 해체되고 주한 미군군사 고문단이 설치되어 이곳을 계속 사용했다. 하야리아 부대는 1950∼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둔 미군이 1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4백여 명에 불과하다. 원래는 8부두를 통해 들어오는 물품과 무기를 보급·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지금은 군사부대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하였다. 땅이 협소한 부산에서 지나치게 많은 땅을 시가지 중심지에 소유하고 있어 부대가 사용하지 않는 땅은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 부산첨사 정발 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왜인이 침략할 기미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다. 1592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군 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여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자는 요구를 하였으나 정발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 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 안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 다수의 병력을 가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쳐들어왔다. 정발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결국 정발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영조 37년(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조 42년(1766) 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려 충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 천연기념물 • 부산진 배롱나무 - 제168호, 양정 1동 산 73-28
• 구상반려암 - 제267호, 전포 2동 산 12-20
■ 유형문화재(시지정) • 동모 - 제18·19호, 부전 2동(시립박물관 복천분관 보관) • 동파두 - 제20호, 부전 2동(시립박물관 복천분관 보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