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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시 정보
◈ 동해시의 역사문화자원
『제왕운기』와 두타산 -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는 『동국여지승람』 삼화사조에 의하면 10여년 동안 삼화사 장경각에 있는 불경을 모조리 독파했다고 한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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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제왕운기』와 두타산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는 『동국여지승람』 삼화사조에 의하면 10여년 동안 삼화사 장경각에 있는 불경을 모조리 독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독서는 그가 두타산에 은거한지 7년만인 충렬왕 13년(1287)에 완성한 『제왕운기』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보물 제 41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 최인규의 항일신사참배 거부 사건
1930년대 후반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신사참배, 국민서사, 동방요배,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였는데 이에 최인규는 “한국의 얼과 정신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으니 일본인이 될 수도 없고 일본국에 충성할 수도 없다” 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거부하니 다니던 천곡감리교회 신도들도 호응하여 일제히 불응하였다. 이 일로 1940년 5월 불경죄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삼척, 강릉경찰서를 거쳐 이듬해 10월 함흥재판소 재판정에서 “너희는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일본은 우리 민족을 못살게 하는 죄악을 회개치 않고… 해하면 과거 로마처럼 받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라고 선언하고 징역 2년형을 언도 받았다.
 
1941년 10월(음) 주로 사상범이 수감되는 대전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면서도 온갖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그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옥고에 지쳐 병이 들어 향년 63세로 1942년 12월 16일 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45년 9월 20일 천곡감리교회에 안장되었고 순교비가 남아 있다.
 
 

1.2. 내 고장의 문화유산

 
■ 보물
◈ 삼화사 3층석탑 제1277호 삼화동
◈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제1292호 삼화동
 
■강원도 유형문화재
◈ 북평 해암정 제63호 북평동
◈ 용산서원 학규현판 제78호 쇄우동
◈ 심상열가옥 제82호 단봉동
◈ 김형기가옥 제83호 지가동
◈ 지상사철불 제126호 이원동
 
■강원도 문화재자료
◈ 부곡지석묘 제46호 천곡동
 
■강원도 기념물
◈ 묵호봉수대 제13호 대진동
 
 
 

1.3.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약천 남구만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1689년 기사환국으로 화를 입어 동해로 유배되었다. 1년만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 약천은 숙종 당시 격동의 정국을 이끌다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약천은 국사를 결정할 때 사사로움 없이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학문이 깊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선비가 1백여명이 되었다 한다. 약천 남구만이 망상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689년 4월 이때가 그이 나이 61세 때였다. 우리가 지금도 애송하는 ‘동창이 밝았느냐...’ 는 유배된 이듬해인 1690년 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심곡마을에는 시조에 등장하는 ‘재넘어’와 ‘사래긴밭(長田)’이 실제로 소재한다. 약천 샘에서 산쪽으로 약 50미터 올라가면 약천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약천사는 심곡마을에서 1년여를 머물다 한양으로 되돌아간 남구만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격에 반한 마을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영정을 모시던 곳이다. 약천선생의 영정을 모신 마을이라 이곳을 ‘영당마을’이라고 불렀다. (참고자료 : 동해문화원, 『동해시 망상동 남구만유적과 기층문화』 1998)
 
◈ 한익동(韓溢東) 서화가로서 동해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성중, 호는 옥람인데 ‘藍田 採 玉滄海 獲珠’에서 玉자와 濫자를 따서 호를 지었다. 청주한씨이다. 조부인 춘사 진유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중년이후는 자학자습하였다. 옥람은 강원 영동지방과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서 서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북한 지방에 그의 유묵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평양 대동강 부벽루 액자도 그가 썼다. 그는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오랜 세월 객지 생활을 하였으며 옥람이 44세되던 해에 쓴 동해시 북평에 있는 만경대 현판글씨는 묵중한 기품이 있다. 『옥람시고』 1책이 전한다. (참고자료 : 『강원도사』, 『진주지』, 『옥람시고』)
 
◈ 홍낙섭(洪樂燮) 1874년 서화가로 송정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자천, 호는 용대, 석사, 만제이다. 그는 송정 솔밭인 담안에서 성장했으며 소남 이희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해강 김규진과 동문수학하였다. 소남은 만재를 가리켜 “낙섭은 역시 눈썰미가 있다. 수제자 감이다” 라고 하였다. 해강은 만재의 해서체에 대해 “동대문 밖은 자네가 맡게” 라고 하면서 그의 필적을 칭찬하였다. 이 후 만재는 소남의 맥을 이었으나 4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만재집』과 『강회계록』이 전하며 지역내 상량문, 제문, 묘표, 행장 등 많은 필적을 남겼다. 특히 ‘致巖棠’ 이라 쓴 해서체는 동대문 밖에서 따를 수 없다고 전해올 만큼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제자 심지황, 최중희 등도 일가를 이루었다.(참고자료 : 『강원도지』)
강원도 동해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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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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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