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趙胤)은 고려 때 충신으로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고 벼슬이 지신사(知申事, 도승지)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조윤은 두류산(頭流山)에 은둔하였고 조선 태조는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이름을 견(絹)이라 고치고 청계산으로 옮겨 제1봉에 올라가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그 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 하고 제2봉에 올라가 나라를 생각하였다 하여 국사봉(國思峰)으로 전해온다. 과천에서 청계산까지의 도로는 옛 길로는 특이하게 넓은데 이는 태조가 청계산에 은거한 고려 충신을 찾아와 함께 일하기를 권하러 왔을 때 닦은 것이라 전해온다. 후대에 청계산을 조씨에게 사패지로 내려 지금도 청계산은 조씨 종산이다. • 광주 학현(학의동) 출신 박성삼(1887∼?)은 의병대장 윤기의 부하가 되어 1907년 11월 청계산 위에서 일본 순사대와 교전하여 패하고 그 후 1908년 2월경까지 경기도 각 곳에서 군량 및 군용자금을 강탈하였다 하여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구형 5년을 받았다. • 청계리 출신 성주복(1894∼?)은 배재학당을 나왔고 1919년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청계동 431번지에서 계명강습회를 개설하고 야학을 가르쳤다. • 성주복과 동지인 이복영(李復英)은 3·1운동 때 총을 맞아 다리를 못쓰고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이봉근(李鳳根)은 직접 교편을 잡지 않았으나 같은 항일 투사였다. 이춘응은 판교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총에 맞아 순국하여 가매장하였다가 후에 청계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義逸, 학의동)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게 잡혀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는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한덕운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다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 조인규(趙仁規, 1227∼1308) 고려 때 문신, 역관. 충렬왕 원년 성절사가 되어 30여 차례 원나라를 왕래하였다. 충렬왕 33년에 평양군에 봉해지고 선충익재보조공신(宣忠翊載補祚功臣)에 올랐다. 청계사에서 살았고 경내에 기념비가 있다.
◈ 안향(安珦, 1243∼1306) 고려 때 유학자.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도입하고 그 발전에 힘썼다. 그의 사당인 안자묘가 월암동에 있다.
◈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1469) 세종의 넷째 아들. 화포·화차의 제작을 감독하는 등 병기 개발에 힘썼다. 수양대군을 피하여 은거하다가 수양이 즉위하자 조정에 나가 보좌하였다.
◈ 채세영(蔡世英, 1490∼1568) 조선 때 문신. 직제학, 대사성(1537),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天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548).『중종실록』 편찬, 공조·호조판서, 좌참찬을 지냈다. 묘는 포일동에 있다.
◈ 박응남(朴應男, 1527∼1572) 조선 때 문신. 직제학, 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간관(諫官)으로 유명하였고 도승지를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 학의동에 묘가 있다.
◈ 김징(金澄, 1623∼1679) 조선 때 문신. 정대화의 죄를 논해 벽종에 유배되었다가 송준실의 도움으로 승지로 복직되었다(1669). 이듬해 전라남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김석주의 탄핵을 받고 배천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1672). 영의정에 추증. 왕곡동 왕림에 묘가 있다.
◈ 한익모(1703∼1781) 조선 때 문신. 광주부윤(1744), 이조판서(1757), 대제학(1762), 영의정(1772)에 올랐다.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한 홍인한 등을 조사할 때 불참하였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월암동에 묘가 있다(향토유적 제1호).
◈ 한진창(韓鎭昌) 1858년 출생. 탁지부 회계국장(1897), 육군부령(1899), 육군정령, 강원도 순찰사(1904), 전북관찰사 겸 판사(1906), 육군참장, 군부차관을 지냈다(1907). 학의리 산 35(점말마을)에 묘가 있다.
◈ 이희승(李熙昇, 1896∼1989) 포일동 출생. 경성제대 법문학부(1930), 이화여전 교수, 조선어학회 간사(1932),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1942),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1945),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1967), 건국 공로훈장(1962), 동아일보 사장(1963). 저서 『국어학논고』 (1947), 시집『박꽃』등.
◈ 정인섭(鄭寅燮, 1905∼1983) 시인·학자. 와세다대학 영문학과(1929), 연희전문대 교수.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 조직(1932), 중앙대(1946), 런던대(1950), 일본 천리대 교수(1953), 펜클럽 한국 본부 위원장(1956), 외국어대 교수(1968),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장하였다(1974). 저서는 『종합변증법적세계문학론』, 시집 『산 넘고 물 건너』등.
◈ 정준모(鄭俊謨, 1893∼1958) 포일리 덕장골 출생. 1925년경 포일리에서 한문서당을 개설하였고 1929∼1943년까지 청계동 성현서당 당장으로 후진교육에 힘썼다. 이 때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성현서당이 폐당되자 포일리로 이사와서 구장 일을 보며 집에서 한문서당을 계속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 보물
• 동제은입사향완 - 제288호 • 제왕운기 - 제418호 • 삼국유사 - 제419호 • 청계사동종 - 제11-7호, 청계동 11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검재 김유선생 영정(청풍김씨종중소유) - 제117호, 왕곡동40 • 청계사목판 - 제135호, 청계동 11
■ 문화재자료
• 청계사 - 제6호, 청계동 11 • 임영대군 묘역 및 사당 - 제98호, 내손동 산 154-1
■ 향토유적
• 한익모 선생 묘 - 제1호, 월암동 산 26 • 채세영 선생 묘 및 신도비 - 제2호, 포일동 산 12
■ 전통사찰
• 백운사 - 제36호, 왕곡동 1-1
■ 비지정문화재
• 내손동 지석묘 - 내손동 갈미마을 • 청계동 지석묘 - 청계동 토골 김 선길 집안 • 삼동 지석묘 - 삼동 416 • 이동 지석묘 - 이동 오봉산 • 삼동백제토기 유적 - 삼동 부곡역에 동쪽 500m • 청계동 고분 - 청계동 토골마을 북쪽 • 금산사 미륵보살 - 내손동 금산사 • 월암동 안자묘 - 월암동 • 임영대군묘 및 사당 - 내손동 산 15-1 • 조인규 사당기비 - 청계동 산 11 • 김징묘와 신도비 - 왕곡동 • 한성우묘와 신도비 - 이동 참말 • 김유묘와 신도비 - 왕곡동 • 한장석묘와 신도비 - 이동 참말 • 성현서당 옛터 기념비 - 청계동 복지회관 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