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남부의 동해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에 위치한 영덕군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한 기후와 오십천과 송천유역을 따라 넓게 펼쳐진 구미·금호·영해평야 등을 중심으로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역사가 깊은 고장으로 선사시대 이래로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으며, 오늘날에 와서도 그 역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무예를 숭상하고, 춤과 노래를 즐긴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이곳 사람들의 기질은 변화에는 능동적이고, 일에 있어서는 적극성을 띠고 있어 여말의 왜구침입, 1919년의 3·1만세운동 등 나라가 위급에 처하였을 때는 솔선하여 참여하여 왔다. 한편 내면적으로 흐르는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심성은 지역문화를 아끼고 다듬는 데 군민 모두가 앞장서도록 하는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서 지역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선사시대 - 지품면 신양리에서 구석기 유물 발견 수집 - 군 전체에 고인돌 발견
고대 - 진한의 우시군국, 야시홀군국이 존재
신라 757 (경덕왕 16년) 우시군국을 유린군, 야시홀국을 야성군으로 개칭
930 (신라 경순왕 4년) 고려태조 왕건에 복속
고려 940 (태조 23년) 유린군은 예주, 야성군은 영덕군으로 개칭
1258 (고종 45년) 예주를 덕원 소도호부로 승격
1310 (충선왕 2년) 예주를 영해부로 개칭
1346 (충목왕 2년) 이천년이 영해 향교 설립
조선 1410 (태종10년) 영덕 향교 설립
1840 (헌종6년) 신향과 구향간의 영해 향변 발생
1871 (고종8년) 영해 동학전쟁인 신미아변 발생
1895 (고종32년) 지방관제를 개정, 영해부를 영해군, 영덕현을 영덕군으로 개칭
근대 1914 - 부군면의 통폐합으로 영해군은 영덕군에 폐합됨
1919 - 3·18일 영해 만세 운동이 일어남
현대 1979 - 영덕면이 영덕읍으로 승격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