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은 옛부터 여러 전쟁이 있을 때마다 격전지가 되어 주민들의 피해는 물론 주민들의 성향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한 것 같다. 역사에 기록된 많은 내용들을 구태여 빌지 않더라도 청일전쟁이 있을 때 아산이 무너지느냐, 평택이 깨지느냐의 속담이 생겼을 정도니 격전지로서의 양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세에 접어들면서 천혜의 온천을 갖고 있는 등 특수 여건으로 인하여 군부대 및 요양 시설 등이 많이 있었다.
◈ 임금님들의 온행 온천은 예로부터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와서 그 신효한 약효를 경험하였다. 특히 의약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온천요법의 효과가 우수하였기 때문에 왕실에서도 온천을 애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온양온천은 왕실과 고관들의 행차가 빈번하였으며, 이에 따라 탕실과 어실을 건축하여 유숙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행한 제왕들로는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다섯 임금이 빈번하게 온행을 했으며, 이중 세종대왕 14년 (1432) 세종 온행시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키고, 이듬해(세종 15년) 정월에 안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온양온천에 행행하였다. 여기서 수일간의 요양을 한 뒤 환경 하였다. 그리고 세종 22년(1440) 3월과 24년(1442) 3월에도 온양온천에 행행하여 휴양을 하고 상경하였다. 이 시기에 온양온천에는 왕실 행차에 사용하기 위한 탕실과 행간이 건축되었으며, 종육품의 현감이 배치되어 있던 온수현이 온양군으로 개명되고 승격되어 종사품의 군수가 배치되었다.
◈ 맹사성(1360∼1438) 온양출신으로 1386(우왕 12)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 된데 이어 전의사승, 기거랑, 사인, 우헌납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이 되었다.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고, 공직에 있으면서도 청렴 결백한 생활로 일관하였으며, 음악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부친이 돌아가시자 일주일간 입에 음식을 대지 않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묘 옆에 막사를 지어 3년간 통곡하여 묘 앞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매양 출입할 때는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할 정도로 검소하였다. 그가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결백하니 지금까지도 그를 정치가의 본보기로 삼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 이순신(1545∼1598) 조선중기의 명장으로서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아버지는 정, 어머니는 수림의 딸인 초계 변씨이다.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나이 8세 때 아산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둔 그는 후에 28세의 나이로 무인 선발 시험의 일종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나, 실격하고 4년 뒤인 선조 9년(1576)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권지 훈련원 봉사, 동구비 보권관, 발포수군 만호훈련원 참군, 녹도둔전사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문책을 당해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왜침을 대비하여 거북선을 제조, 노량해전과 명랑해전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나, 안타깝게도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 이지함 (1517∼1578)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하다. 본관은 한산, 자는 형백, 또는 형중, 호는 수산 또는 토정, 고려말의 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의 아들이다.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큰 영향을 받았으며, 후일에 그가 수리, 의학,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서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1578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을 구호하였다. 또는 전국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을 저술하여 어진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에 제향되었고, 숙종 39년 1713에는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종되었다. 시호는 문강이다.
◈ 홍가신 조선 선조 때 공신으로 호는 만전, 본관은 남양이다. 선생은 정여립과 같은 해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수원 수사를 지냈으며,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임진왜란때 향당을 통솔하여 의병을 일으키어 많은 공을 세웠다. 선생은 문신으로서 문장력이 아주 뛰어나고 품위가 단정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반드시 무릎을 단정히 여미고 머리에 빗질하는 것과 세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염치에 홍가신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 이간 (1677∼1727) 이간 선생은 조선시대 학자이고, 자는 공거, 호는 외암 추월헌이었고 본관은 예안이다. 송시열의 수제자이며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수암 권상하의 문인이다. 당시 제천, 한강이남 지역의 권상하 문하의 문인들이 학문에 힘쓰던 조직인 강문 팔학사의 한사람으로 지내다가 권상하가 죽자, 선생으로 추대받았으나 거절했고, 숙종 36년(1710) 장릉 참봉으로 추천 받았으나 거절했다. 6년 뒤 회덕현감, 경연관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겸 해운관, 세자익위사, 익위 등을 지냈다. 강문팔학사의 한분으로 인물의 성은 동일하다는 인물동성론을 주장했고, 또한 글씨도 잘 썼으며, 숙종이 죽었을 때 예조판서와 대제학 같은 중신들과 의논하여 국상예절을 바로 잡았다. 죽은 뒤 온양 외암서원에 제향,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고 시호는 문정공이다.
◈ 장영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 벼슬은 상호군에 이르렀으며, 역상에 관한 모든 기구를 제작하고자 할 때 정인지, 정초는 고전을 연구하게 하고 장영실은 공역을 감독하게 하여 7년만에 완성했다. 특히 세종 20년(1438) 경복궁 뜰에 운천의를 간직한 흠경각을 세웠는데 장영실이 이 모든 공역을 감독했다. 또 서양보다 근 2세기나 앞서서 측우기를 만들었고 그밖에 대소 간의대, 일시계, 일성정시계 등을 제작 감독하는 등 기계, 건축, 과학발전에 공이 컸다.
◈ 윤보선(1897∼1990)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본적은 충청남도 아산, 호는 해위, 윤치소의 6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 20세에 여운형을 따라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의정원 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을 역임했고,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 상공부장관에 기용되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1954년에 야당인 민주당 소속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4·5·6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0년 4·19의거가 일어나자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내각제 대통령으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1년 6개월만에 하야했다. 하야후에도 야당정치인으로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유신체제에 항거했고, 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 지원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11월에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발족시켰다. 1979년의 명동 YMCA 위장결혼식 사건 등으로 기소되어 입건되었으며, 10·26 이후 80년 2월에 사면복권되어 정계에 복귀하여 야권단일화를 위해 노력하는 등 한국의 민주정치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회고록 『구국을 위한 가시밭길』등이 있다.
■ 국보
◈ 이충무공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 제76호,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 조선 중기
■ 보물 ◈ 이충무공 유물 - 제326호,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 조선 선조
◈ 약사여래입상 - 제536호,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고려 초기
◈ 당간지주 - 제537호, 아산시 읍내동 255-2, 고려 초기
◈ 기사계첩 - 제639호, 아산시 배방면 세교리, 조선중기
■ 사적
◈ 이충무공 유허 - 제155호,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 이충무공 묘소 - 제112호,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 맹씨행단 - 제109호, 아산시 배방면 중리
■ 중요민속자료
◈ 성준경 가옥 - 제194호,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 외암참판댁 - 제195호,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 - 제196호,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 전세 맹고불 유허 - 제225호, 아산시 배방면 중리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온주아문 및 동헌 - 제16호, 아산시 읍내동 370
◈ 여민루 - 제17호,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 기념물
◈ 김옥균 묘소 - 제13호,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 공세 곳창지 - 제21호,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배방 산성 - 제67호, 아산시 배방면 신흥리
■ 무형문화재
◈ 아산 연엽주 - 제11호,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 아산 옹기장 - 제15호, 아산시 도고면 금산리
■ 민속자료
◈ 윤일선 가옥 - 제12호,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 윤제형 가옥 - 제13호,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 윤승구 가옥 - 제15호,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 이밖에 문화재자료로 온양향교, 아산향교 등 25건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