交通13)이라는 말은 흔히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전자는 경제적 방법에 의한 재화의 이동 관계와 인간 상호간의 일체의 동적 관계, 즉 인간 사회 생활의 전부를 말한다. 후자는 사람·재물의 장소적 이동, 즉 운송과 통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통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交通路14)이며, 그것을 인체에 비유한다면 크고 작은 가닥으로 뻗어나간 혈관을 교통로라 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국가가 형성되면서 교통로는 수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放射線式으로 뻗어 나갔고, 간선과 지선, 지선과 지선들이 環狀線式으로 연결되어 마치 거미줄 같은 교통망이 형성되었다. 일단 형성된 교통로는 사람의 왕래이건 물자의 교역을 위한 교통량이 증가함으로써 간선과 지선으로 재편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의 형태와 발달은 각 지역의 지형이나 지세와 같은 자연조건의 기준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장소에 매이는 전통문화(place-bound tradition)도 도로의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선사시대부터 고대까지 우리나라의 교통로가 어떠했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것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살필 수가 없다. 다만 정치적인 중심지를 핵으로 하여 교통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선사시대 이래로 교통로는 줄곧 정치적·군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교역품의 수송을 위한 交易路로서 경제적 의미도 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때는 각국이 더욱 광범위하게 영역을 확장해 나감에 따라 수도를 중심으로 교통로를 재편성하게 됨으로써, 그 이전 시기보다 잘 정비된 교통로의 개설과 조직망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이 더욱 광범위하게 영역을 확장해 나감에 따라 수도를 중심으로 교통로를 재편성하게 됨으로써, 그 이전 시기보다 훨씬 정비된 교통로의 조직과 개설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군사적인 요새지에 축성이라든지, 지방 행정구역의 설정, 교통장애의 제거, 교량부설, 관문의 개척 등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 아닌가 싶다.
섬진강유역은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컨대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낙동강의 큰 지류인 남강유역, 북쪽에는 금강유역, 서북쪽에는 만경강유역, 서쪽에는 동진강과 영산강유역, 서남쪽에는 탐진강유역, 남쪽에는 남해안과 접하고 있다. 그리하여 섬진강유역에서 그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내륙 교통로가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져 있다.
아직은 섬진강유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워낙 미진하여 이곳의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고대까지 교통로의 조직망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행히 금강 상류지역인 진안 용담댐15)과 탐진강유역인 장흥댐16)을 비롯하여 영산강, 남강유역에서 고고학 자료가 상당량 축적되어, 이를 근거로 섬진강유역과의 교류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종래의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섬진강유역에서 그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내륙 교통로를 추정 복원17)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섬진강과 금강유역을 이어주는 교통로이다. 금남호남정맥 산줄기를 경계로 금강의 금산·진안권18) 혹은 장수권19)으로 나가는 교통로로 나뉜다. 우선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금산·진안권인 진안고원 일대로 진출하려면 금남호남정맥의 밀북치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는 馬耳山20)에서 동쪽으로 1.2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전북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와 반월리 경계를 이룬다. 금강과 섬진강을 갈라놓는 분수령을 이루고 있지만,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가 평지를 이루어 지형상 장애요인이 거의 없다. 선사시대부터 백제의 한성기까지 백제의 수도에서 섬진강유역으로 곧장 진출할 때 주로 이용됐던 간선 교통로로 거리상으로도 최단거리를 이룬다.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에서 대전과 금산분지를 거쳐 鎭安 臥停土城에 도달하면, 이곳에서 진안고원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간선 교통로를 이용하면 밀북치까지 손쉽게 도달한다. 백제의 한성기 때 고흥반도 혹은 서부경남지역으로 나아갈 때 대부분 밀북치를 통과하는 간선 교통로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진안고원 속 장계분지와 장수분지로 나아가는 교통로이다. 금남호남정맥의 어떤 고개를 넘느냐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신광치를 넘는 방법으로,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진 마령분지와 장수분지를 연결해 준다. 다른 하나는 자고개[척치]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섬진강유역과 장수분지를 최단거리로 연결시켜 준다. 영산강유역에서 오수천을 따라 교통의 중심지인 산서분지21)에 이르면, 이곳에서 고돔치와 개치를 넘어 자고개[척치]가 자리한 대성고원에 도달한다. 이 교통로가 통과하는 곳에 지석묘의 밀집도가 유난히 높고, 삼국시대 때 3개소의 행정치소를 경유하고 있는 점에서 일찍부터 개척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다른 하나는 수분령을 넘는 방법으로 섬진강 중류지역과 장수분지를 이어준다. 남원 서부권을 동서로 횡단하는 요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북치재를 넘어 내륙 교통로가 교차하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 국포리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水分嶺22)이 있다.
둘째, 섬진강과 만경강유역을 연결해 주는 교통로이다. 이 교통로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湖南正脈23)의 瑟峙24)를 넘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호남정맥의 마근댐25)을 넘어 섬진강댐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전자는 全州川을 타고 올라가 호남정맥을 넘어 섬진강 상류지역으로 진입하는 방법으로, 종래에 백제의 섬진강 진출 경로26)로 자주 소개되었다. 만경강 지류인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류하는 完州 上雲里에서 30여 기 이상의 분구묘가 조사되었는데, 이곳은 만경강 수로와 내륙 교통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후자는 전주에서 三川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호남정맥의 마근댐을 넘어 섬진강댐으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전북 임실군 갈담리와 순창군 순창읍에서 섬진강유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교통로와 교차한다. 그리고 순창군 순창읍에서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거미줄처럼 잘 갖춰진 여러 갈래의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져 주암댐과 호남정맥의 석거리재를 넘어 고흥반도까지 최단거리로 연결해 준다.
셋째, 동진강유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이다. 동진강과 섬진강유역으로 갈라놓는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매우 험준하여 호남정맥의 가는정이·구절재·개운치 등 고갯길을 중심으로 선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는정이27)는 호남정맥의 묵방산과 성옥산 사이의 고갯마루로 호남정맥의 산줄기와 직교되게 동서방향으로 뚫린 자연협곡을 따라 양쪽 유역을 이어주는 내륙 교통로가 이곳을 통과한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과의 고갯길을 넘는 여러 갈래의 교통로는 전북 임실군 임실읍에서 하나로 합쳐져 任實 雲井里28)를 거쳐 호남정맥의 가는정이를 넘게 되면 동진강유역에 곧장 도달한다. 동진강유역에서 중대형 분구묘가 분포된 井邑 雲鶴里·知士里, 扶安 昌北里를 거쳐 서해 연안항로의 거점포구이자 동진강 하구인 加耶浦29)까지 손쉽게 나아갈 수 있다. 대가야를 비롯하여 영남 내륙지역의 가야세력이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를 넘어 서해의 가야포까지 도달하는데 거리상으로 가장 가깝다.
넷째, 영산강유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이다. 섬진강과 영산강유역으로 갈라놓는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그다지 험준하지 않아 양쪽 유역을 연결시켜 주는 교통로가 많다. 호남정맥의 순창 방축리와 과치재를 넘는 교통로가 가장 대표적이다. 순창 방축리는 덕진봉 남쪽 말단부에 자리하며, 전북 순창군 금과면 방축리와 전남 담양군 금성면 덕성리 경계로 순창과 담양을 잇는 24번 국도가 이곳을 통과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광주와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가 지난다. 순창 방축리를 통과하는 교통로는 潭陽 齊月里·西玉古墳群 등 섬진강 중류지역과 영산강유역을 곧장 연결해 준다. 이 교통로가 통과하는 獒樹川을 따라 산성 및 봉수들이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는데, 淳昌 大母山城의 경우만 유일하게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호남정맥의 묘치와 서밧재는 보성강과 영산강유역, 시목치와 웅치는 보성강과 탐진강유역을 연결해 주는 고갯길이다.
다섯째, 섬진강과 남강유역을 연결해 주는 교통로이다. 백두대간의 관문인 치재·복성이재·사치재·장치·여원치·입망치·덕치를 통해 8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 분포된 阿英盆地와 雲峰高原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남원 월산리·두락리·건지리 고분군 등 가야계 분묘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아영분지로 나아가려면 치재와 복성이재를 넘어야 한다. 백두대간의 큰 고갯길로 알려진 육십령 못지않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 치재30)이다. 이 고개의 남쪽 산봉우리에 남원 봉화산 봉수와 그 남쪽 고갯마루에 복성이재, 남원 아막성이 자리하여 전략상 요충지를 이룬다. 백제의 수도에서 금산·진안권을 경유하여 서부경남지역으로 진출하는데 거리상으로 최단거리를 이룬다. 6세기 초엽 가야계 국가단계의 정치체인 己汶을 두고 百濟와 伴跛[叛波]의 갈등사건과 7세기 초엽부터 20년 넘도록 계속된 백제와 신라의 阿莫城 전투도 백두대간의 치재와 복성이재를 통과하는 간선 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이 깊다.
섬진강 중류지역인 남원 서부권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운봉고원으로 진출하려면 사치재·장치·여원치·입망치·덕치를 이용해야 한다. 사치재는 광주와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고개로 그 북쪽에 장수 이산 봉수와 남쪽에 남원 가산리 산성이 있다. 장치와 여원치는 치재 못지않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으로 그 주변에 남원 고남산·장교리·준향리 산성과 남원 고남산 봉수가 자리하여 전략상 요충지를 이룬다. 南原 尺門里 山城과 南原 草村里 古墳群 사이를 통과하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운봉고원으로 곧장 진출하려면 백두대간의 입망치를 넘었다. 백두대간에서 약간 벗어난 덕치31)는 그 양쪽에 남원 덕치리 봉수와 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선상으로 분포된 南原熢燧路의 종착지이다. 운봉고원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섬진강유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진 南原 細田里를 경유하여 경남 하동 등 섬진강 하류지역으로 나아갈 때 주로 이용했던 고갯길이다.
마지막으로, 섬진강유역에서 남해안으로 진출하는 방법이다. 이 교통로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하동까지 도달하는 방법으로, 종래에 대가야권32)에서 설정된 내륙 교통로와 일치한다. 다른 하나는 호남정맥의 송치를 넘어 순천과 여수반도로 나아가는 교통로이다. 順天 雲坪里에서 가야계 중대형 고총과 순천 죽내리 성암마을에서 가야토기가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지만,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험준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또 다른 하나는 호남정맥의 큰 고갯길인 석거리재33)를 넘어 남해안 연안항로의 기항지이자 교역항인 고흥반도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이다. 전남 곡성군 석곡면 석곡에서 한성기 백제이식과 高興 吉頭里에서 백제계 최고급 위세품이 출토되어, 백제에 의해 일찍부터 개척되고 줄곧 관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3) 교통의 개념은 方東仁 「교통」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方東仁, 1997, 「교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404-405쪽). 14) 우리나라 말에는 넓은 길을 한길[大路]이라 하고, 시골 동네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고샅이라 하며, 사잇길, 산길, 고갯길, 지름길 등 길의 특성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최영준, 2002, 「영남대로와 문경」,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 실천문학사). 15) 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발굴조사에서 얻어진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용담댐 수몰지구의 고고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16) 장흥 탐진댐 수몰지구 발굴조사에서 쏟아진 고고학 자료를 정리 분석하여 ‘탐진강유역의 고고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17) 섬진강유역과 그 주변지역을 연결시켜 주는 내륙 교통로의 복원과 그 역할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자 한다. 18) 종래에 방위개념을 기준으로 금강의 서북부 지역권으로 설정되었는데, 이번에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금산·진안권으로 다시 설정하였다. 19) 역시 방위개념을 기준으로 금강의 동부 지역권으로 설정된 바가 있었는데, 이번에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장수권으로 새롭게 설정하였다. 20) 이중환의 『택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금강의 발원지로 소개된 곳이다. 신라 때 西多山, 고려 때 湧出山, 조선 태조 때 束金山으로 불리다가 태종 때부터 마이산으로 불리었다. 21) 백제 居斯勿縣의 행정치소로 통일신라시대 때 지방군을 十停으로 정비할 때 居斯勿停이 설치될 정도로 전략상 요충지이다. 더욱이 이곳은 동쪽으로 금남호남정맥의 자고개[尺峙]를 넘어 장계분지와 장수분지, 서쪽으로 호남정맥을 넘어 영산강유역, 남쪽으로 백두대간의 치재를 넘어 아영분지 및 서부경남지역, 북쪽으로 금강 혹은 만경강유역으로 나아가는 여러 갈래의 내륙 교통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22) 금남호남정맥의 큰 고갯길로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으로 물의 운명을 갈라놓는 곳이다. 달리 水分峙, 水分峴, 수분재 등으로도 불린다. 23) 호남정맥은 동쪽에 섬진강, 서쪽에 만경강·동진강·영산강, 서남쪽에 탐진강을 가르면서 鎭安 珠華山에서 光陽의 白雲山까지 뻗은 길이 398.7km의 산줄기를 말한다. 24) 전북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와 임실군 관촌면 슬치리 경계로, 현재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와 전라선이 이곳을 통과한다.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지형상으로 매우 완만하여 선사시대 이래로 줄곧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25) 1965년 섬진강 신댐 건설로 섬진강 물이 만경강유역으로 역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된 댐이다. 이 댐이 축조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만경강과 섬진강유역을 연결해 주는 호남정맥의 큰 고갯길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26) 李永植, 1995, 「百濟의 加耶進出過程」, 『韓國古代史論叢』 7, 財團法人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7) 호남정맥의 묵방산과 성옥산 사이의 鞍部로 호남정맥의 산줄기와 직교되게 뚫린 자연협곡이다. 현재 협곡을 따라 가는정이와 팽나무정, 장성백이 등 교통로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다. 28)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의 다양한 문화유적이 밀집된 곳으로 일부 지석묘를 제외하면, 현재 대부분 수장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29) 조선 철종 8년(1857) 김정호가 제작한 23책의 분첩절첩식 조선전도인 『東輿圖』에 가야포가 표기되어 있다. 서해 연안항로의 기항지이자 제사유적인 扶安 竹幕洞에서 20km 가량 떨어진 동진강 하구로 1970년대 계화도 간척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부안 청호저수지가 그곳에 축조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일대에서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삼국시대 토기편이 수습되어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30)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와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경계로 북쪽에 남원 짓재리토성과 남쪽 산봉우리에 남원 봉화산 봉수가 있다. 31) 종래에 ‘구동치’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에 ‘德峙’로 표기되어 구동치를 덕치로 바로잡고자 한다. 32) 朴天秀, 1999, 「考古學 資料를 통해 본 大加耶」, 『考古學을 통해 본 加耶』, 韓國考古學會. 33) 옛 승주군으로 지금의 전남 순천시 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의 경계를 짓는 곳으로, 이 고개에 섶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