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자료 추천
|
|
|
2023.12.26
|
|
|
|
용담 진안 龍潭 鎭安 우왕6년 (1380년) 8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고려 조정에 급히 아뢰기를 ‘나졸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밀려오는데 돛대가 잇달았다 하오니 조저원수를 급히 보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당시 수도행정의 책임자인 라세와 심덕부, 그리고 화통도감의 화약주임인 최무선을 급파하여 전함 1백 척으로 왜구를 쫒아 잡았고 여기에서 쫒긴 왜구들은 다시 해안을 돌아 진포(지금의 금강하구)를 타고 상륙하여 노략질과 방화 살인을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
|
라인수 (1)
|
|
(0|0) |
|
2023.12.26
|
|
|
|
아직은 봄이라 해도 곳곳에 잔설이 있는 이른 봄이었다. 집 주변에 터를 잡고 사는 새들만이 봄을 끌어당기고 있고 언 땅을 밀고 올라와 개별꽃이 피고 있었다. 개별꽃은 복수초보다 더 지독한 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꽃잎이 확인 되는 아주 작은 꽃이다. 오래전에 계획을 했던 생암산 생 왕 처 이야기를 쓰면서 한가한 농한기에 설화로 전해지는 지역 지명을 찾아 답사를 다녔다. 마을회관에는 연세 높은 어른들이 계셔서 자료를 수집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이야기를 녹취하여 그것을 원고지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생암산 주변 지명을
|
|
라인수 (1)
|
|
(2|2) |
|
◈ 조회순
|
|
2024.01.04
|
|
|
【향토】
삼계면 소재지에서 순창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홍곡리 괘평마을에 이르면,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재실은 경주 김씨 쌍송당(雙松堂)파 계림군의 9세손인 김광석(金光奭)의 재실로서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토기와 건물로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는 대청마루가 있다.
|
|
|
|
2024.01.02
|
|
|
【향토】
이 재실은 오수면 용정리 용정마을 제각골 안쪽에 있다. 이로재(履露齋)는 효령대군의 증손인 춘성정의 차손 이경윤(李慶胤)의 재실로, 팔작지붕 위에 기와를 얹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문중에서 1940년에 지었다. 현판은 11대손 윤의가 썼고 6개의 주련이 있으며 앞에는 대문이 있는데 대문은 5칸으로 가운데가 솟을대문이고 양쪽에 2칸씩의 공방이 있다.
|
|
|
|
2018.07.30
|
|
|
【저작】
성수의 현존사찰 / 성수산 상이암聖壽山 上耳庵 / 상이암(上耳庵)은 성수면 성수리 산 85번지에 있다. 운수지(雲水誌) 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在縣東五十里聖壽山中古有伽餘神僧始創焉趙侯性憙尹參判泰一有重修記文懸板巖石上刻名京鄕道內之人許多不得記之’라고 되어 있고,
|
19 (+2) | |
|
|
2018.07.12
|
|
|
【향토】
육우정은 일명 봉산에 건립하여 봉남정(鳳南亭) 이라고도 불리운다. 건립 시기는 1919년이다. 육우정은 지역에 사는 우곡 심진표(愚谷 沈鎭杓), 우석 홍종익(愚石 洪鍾翼), 우촌 양기형(愚村 梁奇衡), 우계 노학규, 우당 이광의(愚堂 李光儀), 우천 송응진(愚泉 宋應溱)이 뜻을 같이하여 건립하였다. 이들 여섯 인물의 호는 한자로 모두 어리석을 우자(愚字)로 지었기에 육우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
|
|
|
2018.07.31
|
|
【저작】
제1절 任實邑의 3·1萬歲運動 / 3․1 운동에 관한 제반 연락이 임실읍에 전해진 것은 3월 2일이었다.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하여 임실 교구장 韓榮泰에게서였다.
|
15 | |
|
|
2018.07.30
|
|
|
【저작】
1. 지세와 산세 / 아름다운 성수의 지세地勢 / 임실군은 전라북도 14개 시·군 가운데 하나로 도의 동남부 중앙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남원시와 장수군, 북쪽으로 진안군과 완주군, 서쪽으로 정읍시, 남쪽으로는 순창군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
15 | |
|
|
2024.01.27
|
|
|
【향토사】
|
14 | |
|
|
2024.01.05
|
|
|
【향토】
덕치면 물우리 섬진강변에 세워진 월파정(月波亭)은 조선식 건축양식으로 정교한 조각과 우아한 선, 화려한 단청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빚어놓고 있다. 특히 섬진강 맑은 물이 급류로 흐르다가 바위 사이를 감돌아 월파정 아래에 이르면 소(沼)가 되어 유유자적하며, 강기슭의 기암괴석과 천 년 묵은 낙락장송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연산하게 하고 있다.
|
|
|
◈ 최근등록순
|
|
2024.06.14
|
|
【향토】
역사는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여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주이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드시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의례히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
3 (+1) | |
|
|
2024.06.13
|
|
【향토】
속금산束金山에서 곧바로 금산을 거쳐 개경으로 향하여 반드시 우왕에게 황산대첩의 전말을 소상히 보고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당시 도원수 이성계는 방향을 바꿔 자시의 고향인 전주에 들러 李氏종친들을 오목대에 불러놓고 거창한 개선자치를 벌리게 된다.
|
3 (+2) | |
|
|
2024.06.13
|
|
【향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예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인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일러져 오고 있다.
|
7 | |
|
|
2024.06.12
|
|
【향토】
과거 전통사회에 있어서 한 왕조의 창업에 관한 도참은 아마 절대 필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용출산(마이산)이나 팔공산(성수산)만이 도참에 관련된 명산이었던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
2 (+1) | |
|
|
2024.06.12
|
|
【향토】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 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
11 | |
|
|
2024.06.11
|
|
【향토】
용출산이 속금산으로 바뀐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금극목金克木의 원리에 따라 조선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는 도참적 성격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다시 “산의 사면四面은 온 돌이 깍은 듯 높고 돛대처럼 우뚝 솟아 철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낸다.
|
2 (+1) | |
|
|
2024.06.11
|
|
【향토】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칠일동안 천제를 마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친 곳은 황산줄기의 나지막한 정봉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황산의 남쪽은 제법 넓은 냇물이 흘러 나가는 좁은 계곡이 있고 북쪽으로는 아영의 사창과 인풍리를 지나 함양으로 통하는 울도치가 보인다.
|
6 (+2) | |
|
|
2024.06.10
|
|
【향토】
전주침공을 위해 구라치를 넘어오던 왜구의 척후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진기리에서 박살낸 이성계는 몇 명 살아남지 않은 적의 줄행랑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곧장 발길을 남원으로 옮겼다.
|
4 | |
|
|
2024.06.10
|
|
【향토】
天馬가 東에서 오다가 힘이 다하여 그 상제마霜蹄馬가 도중에서 지친 채 이 용출산湧出山에 쓰러져 있구나,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겼더니 그 두 귀가 용출해 두 봉우리로 화하여 하늘을 뚫고 있구나. 라는 詩는 이성계가 용출산주필대 큰 바위 위에서 말을 탄 채 읊었던 시로 전해진다.
|
3 (+2) | |
|
|
2024.06.09
|
|
【향토】
함양 사근역 혈투에서 패전의 쓰라림을 맛본 우리 군사들은 가까스로 남원으로 물러앉아 개경으로부터의 구원병을 애타게 기다리며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삼도도원수로 급파된 이성계는 일단 장수 습진번덕에서 군사를 조련 한 뒤 용계리의 닭울음소리를 신호로 때 아닌 밤중에 출정을 하게 된다.
|
4 | |
|
|
2024.06.09
|
|
【향토】
도선암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성계는‘일천一千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상像이요 장안 만호가 일제히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는 산오속응山嗚俗應의 세勢이며 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결結과 자연自然의 운運, 거울이 깨진 것은 명진서해名振西海의 성聲,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국조창업의國朝創業의( )를 뜻하며
|
3 (+1) | |
|
|
2024.06.08
|
|
【향토】
짙은 안개 속에서의 방황 끝에 애써서 찾은 팔공산 도선암의 입구 수천리에서 굳이 또 깊은 계곡을 따라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가.
|
5 (+1) | |
|
|
2024.06.07
|
|
【향토】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이곳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2 (+1) | |
|
|
2024.06.06
|
|
【향토】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 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
2 | |
|
|
2024.06.05
|
|
【향토】
아침이 밝아오자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승전을 기원하는 맹세를 겸한 조찬을 서둘러 끝내고 왜구가 진치고 있는 황산을 향해 부랴부랴 잔뜩 낀 아침 안개를 헤치며 행군의 길을 떠났다.
|
7 (+3) | |
|
|
2024.06.04
|
|
【향토】
헬리콥터를 타고 성수산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산세를 발견하게 된다.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치달아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 나아가고 있다.
|
9 (+2) | |
|
|
2024.01.27
|
|
【향토사】
현풍곽씨 회진리 장동 문중, 동래정씨 회진리 문중, 동래정씨 신기문중, 고흥유씨 부흥리 문중, 밀양박씨 상필 문중, 삭녕최씨 백여리 문중, 전주이씨 이목마을 문중, 화순최씨 백련리 문중, 강화노씨 이윤문중, 장수황씨 율치문중
|
2 | |
|
|
2024.01.27
|
|
【향토사】
임실군(任實郡)은 지형적으로 전라북도의 동 남쪽 내륙에 위치하고 대부분은 섬진강 상류 의 중산간지로 전체면적 598㎢중 75%가 임야에 속하며 20여%가 농경지 이다.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에 속하여 북동쪽으로 진안군, 남동쪽으로 남원시, 남쪽으로 순창군, 북서쪽으로 정읍과 완주군에 접해 있다. 노령산맥이 군을 지나고 있어 산지가 많은 편이고, 일부 지역에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
3 (+1) | |
|
|
2024.01.27
|
|
【향토사】
해방 직후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식민지 지주제의 속박으로부터 농민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인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본 조건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지주-소작인 간의 신분관계를 해체하여 근대적 사회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계급적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
2 (+1) | |
|
|
2024.01.27
|
|
|
【향토사】
임실 운수지의 기록에 의하면 임실군의 행정구역상 지명은 1900년대를 기준으로 당시 부르던 이름이 지금과는 약간 다른데 지금의 임실군 소재지가 일도면(壹道面)에 있었으며 그 전에는 현내면(縣內面)이라고도 하였다. 임실현의 동쪽에는 고덕산(高德山)이 남북으로 달리는데, 서쪽으로 달려서 임실의 진산(鎭山)인 용요산(龍腰山)이 되고, 동쪽으로 울대뼈[結喉]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솟아올라 봉황산(鳳凰山)이 되었으니, 바로 임실현의 주산(主山)이다.
|
13 | |
|
|
|
|
|
|
|
▣ 지식창고
|
▶ 공개자료실
|
|
|
|
|
(A) 내 지식자료
|
Ο 다큐먼트작업
|
|
|
|
|
|
|
|
|
|
|
|
|
|
|
|
|
|
about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