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가장 큰 특징은 백제와 가야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임실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유역에서는 가야토기가 일색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토기와 섞여 있거나 지역색이 강한 가야토기의 경우도 대가야와 소가야양식이 동일 지역에 혼재된 조합상을 보인다. 그리하여 임실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의 실체와 그 발전과정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삼국시대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매우 미진한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실군 임실읍 일대에 가야계 소국인 上己汶이 있었던 것으로 본 견해48)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1972년 4월 전북 임실읍 금성리 화성마을 남동쪽 산에서 나무를 심는 사방공사를 실시하던 중 수습된 유개장경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당시 3기의 고분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49) 워낙 심하게 유구가 훼손되어 고분의 구조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수혈식 석곽묘로 추정된다. 석곽은 대체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을 가지고 수직으로 쌓았는데, 그 길이는 모두 300cm를 넘지 않는다.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유개장경호를 제외하면 대부분 백제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철기류는 鐵製大刀와 蛇曲劍, 鐵鎌, 鐵鉾, 模造鐵斧·鑄造鐵斧, 마구류와 살포 등이 조합상을 보였다. 임실 도인리 1호분에서 環頭大刀가 출토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임실 금성리에서 나온 가야계 유개장경호를 5세기 후반 대가야와 기문 사이의 교역을 하였다는 증거물로 제시하고 당시 대가야가 교역로를 통하여 기문으로 침공해 들어간 것으로 보았다.50) 그런데 유개장경호를 제외하면 단경호와 광구장경호, 원형투창고배, 장방형투창고배가 함께 수습되었는데, 이 토기들은 모두 백제계 혹은 백제토기이다. 토기류의 조합상에서 백제토기가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소량의 가야토기가 포함되어 있다. 임실 석두리에서는 백제토기와 가야토기가 섞인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하나의 토기에 백제토기와 가야토기의 특징이 함께 표현된 광구장경호도 신평면에서 나왔다. 청웅면 구고리에서는 삼족토기와 단경호, 甁 등 백제토기가 일색을 이루었다. 섬진강유역의 강한 지역성으로 백제와 가야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梁職貢圖』 百濟國使條에 상기문이 백제 변방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점51)에서 그 독자성52)이 입증된다. 그렇다면 상기문이 6세기 초엽까지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하였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해 주는 고고학 자료를 찾는다면, 그것은 가야계 고총의 존재이다. 그러나 섬진강유역에서는 마한과 관련된 재지계 토기류만 부장되고, 현지 주민들이 말무덤으로 불리는 30여 기의 분구묘만 조사되었다. 특히 上己汶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된 전북 임실군 임실읍과 장수군 번암면53) 일대에서는 가야계 고총이 포함된 분묘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가야계 최고급 위세품도 출토되지 않았다.
흔히 가야계 고총이란 봉토의 평면형태가 호석에 의해 원형 혹은 타원형의 분명한 분묘단위를 갖추고 있는 대형고분을 말한다. 가야의 지배자 무덤으로 위세품 및 대규모 성곽과 함께 가야계 소국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아직까지 임실군에서는 가야계 고총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운봉고원과 진안고원에 속한 장수군에는 가야계 고총이 밀집 분포되어 있다.54) 금남호남정맥을 자연경계로 임실군과 인접된 진안고원 내 장수군에는 장계분지와 장수분지, 대성고원 일대에 20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남아있다.55)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사이로 수계상으로는 금강의 최상류에 속한다.
백두대간 산줄기 동쪽에 위치한 운봉고원에도 봉토의 직경이 20m 내외 되는 10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자리하고 있다.56) 운봉고원의 아영분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풍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 월산리에 10여 기와 이곳에서 동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남원 두락리에도 4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남원 두락리에는 봉토의 직경이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 가야계 고총도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어, 당시 운봉고원에 기반을 둔 가야세력57)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융성하였다는 발전상도 입증되었다. 그리고 4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한 곳에 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운봉고원 속 己汶國이 상당 기간 동안 존속하였음을 방증해 주었다.
2010년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에서 석곽의 평면형태가 세장방형으로 가야후기 고분의 속성이 담긴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가 조사되어58)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임실 구고리 산성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자락 정상부로 2기의 봉토분이 조사되었다. 오래 전 도굴로 유물의 출토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섞인 상태로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가 나왔다. 특히 1호분 내 3호 석곽에서 10여 점의 못이 출토되어, 섬진강유역 가야묘제의 지역성이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임실군 일대로 가야의 진출 혹은 가야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로서는 가야와 관련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논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기59)를 제외하면 섬진강유역에 대한 주도권이 백제에 의해 줄곧 행사되고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는 섬진강유역에서 가야계 고총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武寧王의 人口推刷策이다. 무령왕은 피폐해진 농가경제를 회복하고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두 가지의 경제정책을 펼쳤다.60) 하나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농토에서 이탈하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다시 농토에 안착시키는 游食者歸農策이며, 다른 하나는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성을 본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던 人口推刷策이다.
백제의 인구추쇄책은 인구파악과 농업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성들을 대상으로 절관한지 3~4세가 지난자들까지도 쇄환대상에 포함시켜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제 백성의 쇄환지역으로 임실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유역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그 이유는 임실 금성리·석두리에서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섞여있는 상황에서 시기상으로도 백제의 인구추쇄책이 추진된 시점61)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백제는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 任那四縣과 己汶, 帶沙를 두고 급기야 가야계 소국과 갈등을 초래한다.
삼국시대 때 임실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에 복속되었는지, 언제부터 임실군이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백제 때 설치된 행정치소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임실군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된 것만은 분명하다. 백제 때 임실군 임실읍에 任實郡, 청웅면에 突坪縣, 임실군 지사면과 장수군 산서면 일대에 居斯勿縣이 설치되었다. 이를 증명해 주는 백제계 분묘유적이 임실읍 두곡리와 청웅면 구고리·석두리, 지사면 원산리에서 발견되었다.62) 그런가 하면 백제의 행정치소와 관련이 없는 운암면 운정리63)와 신평면 대리·호암리64)에 횡혈식 석실분이 폭 넓게 분포되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섬진강유역에 속한 남원시와 순창군, 곡성군에서는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무덤이 발견되었지만, 임실군에서는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임실 도인리 20호 주거지에서 마한의 상징적인 조형토기가 출토됨으로써 임실군이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임실 석두리에서 마한부터 백제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임실군이 한성기 때 백제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6세기 초엽에 이르러 백제가 섬진강유역으로 진출하였다든지,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까지 문헌에 등장하는 가야계 소국인 기문이 임실군을 비롯한 섬진강유역에 있었다는 주장65)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임실군 일대에 간선교통로가 통과하거나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에 백제의 행정치소가 설치된 점에서 백제와의 관련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다가 백제의 웅진 천도와 그에 따른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해 백제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갑자기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임실군 일대가 한 동안 가야의 영역에 편입된 것66)이 아닌가 싶다. 임실 석두리·도인리에서 가야후기의 수혈식 석곽묘와 임실 금성리·도인리에서 가야 후기의 가야토기가 출토됨으로써 그 가능성을 암시해 주었다. 또한 임실군의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을 통해서도 가야와의 관련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67)
2. 2.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과 그 의미
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위상을 이해하는 데 산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만경강에서 섬진강유역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슬치 주변에 산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호남정맥 산줄기가 그다지 험준하지 않아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 슬치이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 만경강유역에서 임실과 남원 등 섬진강유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넘어야 하였던 큰 관문으로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와 전라선이 이곳을 통과한다. 이 고개의 서쪽 산봉우리에 임실 슬치리 산성과 그 동북쪽에 완주 만마관산성, 섬진강과 인접된 곳에 임실 대리·방현리·성미산성 등 5개소의 산성이 있다.68)
섬진강 남쪽에 우뚝 솟은 성미산(430m)에 성미산성이 있는데, 지형이 비교적 완만한 서쪽 기슭을 아우르는 산정식이다. 산성의 평면형태가 사람의 왼쪽 발바닥과 거의 흡사한 모양으로 그 둘레가 517m이다. 백제 무왕 때 쌓은 각산성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는데,69) 2007년 발굴조사에서 성벽과 집수시설, 구들유구가 조사되었다.70) 성벽은 내·외벽을 모두 판석형 할석을 가지고 쌓은 협축식으로 산성의 가장 낮은 남서쪽에서 그 평면형태가 원형을 띠는 2기의 석축 집수시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지방통치제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五部名 印章瓦가 출토되어, 이 산성의 역사적인 의미를 더해 주었다.
호남정맥 슬치 못지않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 가는정이다. 섬진강댐 내 임실 운정리 서쪽에 호남정맥에서 가장 큰 관문인 가는정이가 있다. 호남정맥 묵방산과 성옥산 사이 고갯마루로 섬진강에서 동진강유역으로 나아갈 때 꼭 거쳐야 하는 큰 고갯길이다. 호남정맥 가는정이를 넘어 팽나무정과 장성백이를 통과하면 호남평야 동쪽 관문인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 다다른다.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다양한 문화유적이 가는정이 부근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동진강 하구의 加耶浦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가는정이의 북쪽 산봉우리에 임실 마암리 산성이 있다.71)
임실군의 산성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이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산성이다.72) 이 산성은 삼한시대 古城址로 학계에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변에 임실 월평리 산성이 있는데, 전북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에 속한다. 성수산에서 발원해 줄곧 서쪽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그 방향을 남쪽으로 꺾는 오수천 동쪽에 산성이 있다. 이 일대에서 오수천은 남천으로 불리는데, 남천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쭉 뻗은 산줄기에 산성이 있다. 남천 동쪽에 두 개의 산봉우리를 거느린 산이 있는데, 북쪽 산봉우리에 산성이 있으며, 남쪽 산봉우리 남쪽에 성밑마을이 있다.
임실 월평리 산성은 세 갈래의 산자락 사이에 형성된 두개의 계곡을 아우르는 포곡식이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남쪽 두 개의 골짜기 구간을 제외하면 성벽은 대부분 산자락의 정상부를 통과한다. 성돌은 할석을 장방형으로 거칠게 다듬어 만들었는데, 성돌과 성돌 사이는 소형 할석편과 기와편으로 메꾸었다. 성벽은 남쪽 구간이 대부분 석성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구간은 산봉우리의 가파른 지형을 그대로 살린 토성혼축성이다. 산봉우리 정상부에 그 주변지역이 잘 조망되는 세 곳에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내부는 대부분 계단식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곳에 다양한 성격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표조사 때 토기편과 자기편,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는데, 기와편이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한다. 토기편은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 기벽이 얇은 고려토기편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자기편은 문양이 없는 순청자편을 중심으로 상감청자편, 분청사기편, 조선후기의 백자편까지 포함되어 있다. 유물의 종류와 그 속성을 근거로 산성의 존속 기간은 백제부터 조선까지 1000년 이상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 시기적인 폭이 넓은 유물이 산성에서 함께 수습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그만큼 임실 월평리산성이 줄곧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남강유역의 내륙교통로가 임실 월평리산성에서 합쳐진다. 예컨대 금강유역에 속한 진안 와정토성을 경유하여 진안고원을 종단하는 간선교통로와 만경강유역에서 호남정맥의 슬치를 넘어 온 웅진기 간선교통로가 만난다. 동시에 백두대간의 치재를 넘어 운봉고원을 거쳐 경남 서부지역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치재로와 호남정맥의 석거리재를 넘어 고흥반도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 동진강하구의 加耶浦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따라서 임실 월평리 산성은 섬진강유역에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져 내륙교통망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섬진강 중류지역을 동서로 횡단하는 오수천을 따라 산성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임실군 오수면에서 순창군 동계면까지의 구간으로 그 길이가 대략 10km 정도 된다. 오수천은 성수산에서 발원하여 줄곧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천과 율천을 합치고 三溪石門을 지나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에서 섬진강 본류에 합류한다. 오수천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크고 작은 분지들이 연속되어, 이를 합쳐서 오수분지라고 부르는데 오수천과 율천이 합류하는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삼계석문 북쪽 산봉우리에 임실 삼은리 성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임실 삼계리 산성 A·B, 남서쪽에 임실 홍곡리 산성과 임실 세심리 산성이 있다.
금강 상류지역인 진안고원을 종단하여 고흥반도까지 이어지는 남북방향 교통로를 비롯하여 영산강유역을 곧장 연결해 주는 동서방향 교통로가 모두 이곳을 통과한다. 특히 임실 덕계리 산성73)은 고흥반도까지 이어진 교통로와 오수분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두 갈래의 교통로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오수분지를 관통하는 오수천을 따라 선상으로 연결된 내륙교통로를 관할하기 위해 임실 우번리 산성과 순창 신흥리 산성 등 10여 개소의 산성을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봉수란 그 주변지역이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서 밤에는 횃불을 피우거나 낮에는 연기를 올려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는 통신제도이다.74) 1894년 우리나라에 근대의 통신시설인 전화기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변방의 급한 소식을 가장 신속하게 중앙에 전달하는 통신방법이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서신을 전달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담당하였다. 고려 말의 봉수선로가 대체로 계승되어, 조선 초기에 정비된 5봉수로의 직봉과 간봉이 통과하지 않는 임실군에서 10여 개소의 봉수가 발견되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북 동부 산악지대에는 진안고원과 그 주변지역에 80여 개소의 봉수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배치되어 있다.75) 특히 20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밀집 분포된 진안고원의 장수군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면서 그곳을 방사상으로 에워싸고 있다. 지난해 백두대간 영취산·봉화산 봉수 발굴조사를 통해 산봉우리 정상부에 장방형 단이 마련되고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삼국시대 봉수로 그 성격이 파악되었다. 섬진강유역에는 임실군을 중심으로 진안군 일부 지역에만 봉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76)
진안고원 속 장수군에서 시작된 한 갈래의 봉수로가 임실 봉화산 봉수까지 이어진다. 임실 봉화산 봉수는 산봉우리 정상부에 장방형의 단이 마련되어 유구의 속성이 장수군에 밀집 분포된 봉수와 상통한다. 임실분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임실 국화봉 봉수, 남쪽에는 임실 봉화산 봉수와 북쪽에는 임실 용요산 봉수, 서쪽에는 임실 무제봉 봉수가 있다. 청웅분지가 한눈에 잘 조망되는 임실 백이산 봉수를 지나 임실 학암리 봉수에서 섬진강을 건너 호남정맥의 임실 경각산 봉수에서 멈춘다.
임실군 중심부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산줄기에도 봉수가 있다. 임실 봉화산 봉수에서 남쪽으로 3.1km 남짓 떨어진 임실 망전리 봉수와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5.5km 가량 거리를 둔 임실 세심리 봉수가 있다. 현재 임실군에서는 10여 개소의 봉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또 다른 봉수가 더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직은 봉수의 설치시기와 설치주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지만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 가야계 고총과 봉수의 분포망이 서로 일치하고 있으면서 모든 봉수로의 종착지가 진안고원 속 장수가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임실군에는 산성 및 봉수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삼국시대 때 교통의 중심지와 전략상 요충지라는 고고지리적인 요인과 관련이 깊다. 호남정맥의 슬치를 넘어 전주에서 임실군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임실군 관촌면 일대와 섬진강 중류지역을 가로지르는 내륙 교통로가 통과하는 삼계면 일대에 산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임실 성미산성에서 그 초축 시기가 백제 웅진기로 밝혀져 임실군의 산성들이 삼국시대 때 초축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이해하는 데 10여 개소의 봉수도 빼 놓을 수 없다. 진안고원의 장수군에서 시작된 한 갈래의 봉수로가 임실 봉화산 봉수에서 다시 서북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임실군의 산성 및 봉수가 서로 연관관계를 보이고 있는 점에서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가야의 진출과 함께 한 동안 임실군이 가야의 영역에 속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기를 제외하면 백제의 영향력이 줄곧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48) 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49) 全榮來, 1974, 「任實 金城里 石槨墓群」, 『全北遺蹟調査報告』 第3輯, 西景文化社. 50)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51) 백제의 변방에 있는 伴跛,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眈羅 등의 소국들이 백제에 부용한다는 내용이다. 52) 바꾸어 말하면 상기문은 6세기 초엽까지도 백제 혹은 대가야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지 않고 엄연히 가야계 소국의 하나로 존속한다는 점이다. 53) 어찌 보면, 전북 동부 산악지대에서 가장 험준한 곳으로, 동쪽의 백두대간과 북쪽의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다. 아직까지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세력과 관련된 문화유적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수계상으로는 섬진강유역에 속한다. 54) 군산대학교 박물관, 2004, 앞의 책. 55) 전상학, 2013, 「진안고원 가야의 지역성」, 『호남고고학보』 43, 호남고고학회, 35~66쪽. 56) 군산대학교 박물관, 2004, 『전북동부지역 가야문화유산』, 전라북도. 57) 종래에 남강유역의 가야세력 혹은 운봉고원의 가야계 국가단계의 정치체, 운봉지역의 가야, 운봉고원의 가야, 운봉가야 등으로 불렸는데, 이를 문헌 속 기문국으로 비정하였다. 58) 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0, 앞의 자료. 59) 한성의 상실로 백제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갑자기 상실하는 시점부터 이를 극복하고 동성왕 9년(487) 帶山城을 공략하여 다시 장악한 시점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60) 盧重國, 1991, 「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 『百濟文化』 第21輯, 公州大學校附設 百濟文化硏究所. 61) 아직은 고고학 자료가 충분치 않지만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혼재된 상황에서 이들 토기류의 중심 연대가 대체로 6세기 전반대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62) 郭長根, 2007, 「蟾津江流域으로 百濟의 進出過程 硏究」, 『湖南考古學報』 26, 湖南考古學會, 89~123쪽. 63) 한수영·조희진·김은정·김미령·오대종, 2012, 「임실 옥정호 수몰지구 내 유적의 실태와 향후 과제」, 『연구논문집』 제13호, 호남문화재연구원, 113~129쪽. 64)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임실 상가 윷판유적 북쪽에 임실 호암리 고분군이 있다. 임실군 신평면 호암리 상천마을 북동쪽 산봉우리 남쪽 기슭 중단부로 이곳에 백제 사비기 때 널리 유행한 판석형 할석만을 가지고 축조된 단면 육각형의 횡혈식 석실분이 자리하고 있다. 65) 이동희, 2007, 「백제의 전남동부지역 진출의 고고학적 연구」, 『한국고고학보』 64, 한국고고학회. 朴天秀, 2009, 「호남 동부지역을 둘러싼 大伽耶와 百濟 -任那四縣과 己汶, 帶沙를 중심으로-」, 『韓國上古史學報』, 韓國上古史學會. 66) 곽장근, 2011, 「전북지역 백제와 가야의 교통로 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3, 한국고대사학회. 67) 임실문화원, 2013, 『고대 전략적 요충지 임실 관방유적 임실의 산성과 봉구』, 임실군. 68) 곽장근, 2008, 「호남 동부지역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 『영남학』 제13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69) 全榮來, 2003, 『全北古代山城調査報告書』, 全羅北道·韓西古代學硏究所. 70) 서지은·조명일·김유리나, 2009, 『임실 성미산성』, 전북문화재연구원·임실군. 71) 全榮來, 2003, 앞의 책. 72) 文化財管理局, 1975, 『文化遺蹟總覽』. 73) 全州歷史博物館, 2007 앞의 책. 74) 조병로, 2003, 『한국의 봉수』, 눈빛. 75) 조명일, 2004, 「전북 동부지역 봉수의 분포양상」,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성과』, 호남고고학회. 76) 조명일, 2012, 「금강 상류지역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과 성격」, 『호남고고학보』 41호, 67~9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