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호남정맥119)이 동서로 횡단하면서 진안고원을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유역으로 갈라놓는다. 그리하여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120)이 고문헌 및 고지도에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로 등장한다. 진안 용담댐으로 상징되는 금강유역은 진안군 북부권으로 진안천·부귀천·정자천·주자천·안자천을 따라 협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금남호남정맥의 팔공산 북쪽 상추막이골 데미샘121)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진안군 남부권을 적셔준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는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진안군 백운면과 성수면 일대에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진안 도통리·외궁리 등 초기청자 요지122)를 비롯하여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생산된 진안 중길리·반송리 도요지도 자리하고 있다. 진안 도통리는 진안고원에서 호남정맥의 마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나아갈 때 대부분 거처야 하는 내륙교통로의 길목이다. 종래에 진안고원의 지표조사에서 청자편이 수습된 섬진강유역의 도요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23)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륙에 위치한 초기청자 요지가 진안고원에 있다.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로 진안고원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전북 진안군 성수면과 백운면 경계인 내동산(887.4m)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진 여러 갈래의 산자락으로 감싸여 마치 배 모양의 자연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해증이들이라 부른다. 내동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줄곧 북서쪽으로 흘러온 도통천이 해증이들을 비스듬히 관통하고 있으며,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중자동마을에서 섬진강 본류로 흘러든다. 섬진강 지류인 도통천은 양지마을과 중평마을의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진안군 마령면과 성수면 소재지를 연결해 주는 49번 지방도가 해증이들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剛朱所의 치소124)가 있었던 해증이들은 계단식 지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1995년 경지정리사업을 통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본래의 지형을 살필 수 없지만 해증이들 중앙부에 2개소의 우물지를 비롯하여 원님터, 감옥터 등의 지명이 구전으로 전해진다.
내동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진 산자락 북서쪽 기슭 말단부에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북쪽 기슭 말단부를 계단식으로 다듬고 민가가 조성됐는데, 오래전 상당한 깊이로 흙을 파내어 대부분의 유적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본래의 지형이 얼마간 보존된 일부 도로는 초기청자 요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통천에서 서쪽으로 250m 가량 떨어진 모정 부근까지 불에 그을린 벽돌과 갑발편, 초기청자편이 폭 넓게 흩어져 있다. 현지조사 때 주민들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정이 들어선 중평안길 13 전덕훈씨 집 부근에 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당시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평탄하게 다듬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며 “모정 동쪽 중평안길 13-1 권기화씨 집 부근을 파면 찰진 진흙이 많이 나온다”고 제보해 주었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요도구인 갑발로 민가의 기반공사를 실시할 정도로 갑발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 민가의 담장에 불 먹은 벽돌이 박혀있거나 벽돌편과 갑발편에 섞인 상태로 군데군데 쌓여있다.
종래의 지표조사에서 유물은 완·발·접시·U자형 청자, 요도구인 갑발과 갑발 받침, 전축요의 부재인 벽돌이 수습되었다. 초기청자의 굽은 선해무리굽과 중국식해무리굽, 한국식해무리굽, 변형해무리굽이 모두 확인된다.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그 색조가 녹갈색 혹은 황갈색 계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125) 요도구인 갑발은 초기청자 요지에서 발견되는 발형·원통형·복발형이 공존한다. 민가의 담장을 갑발로 쌓을 정도로 그 양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 마을 양쪽에 산봉우리처럼 쌓인 유물도 대부분 갑발이 차지했다고 한다. 불에 탄 벽돌이 넓은 구역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전축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청자 요지에서 북쪽으로 250m 가량 떨어진 해증이들 논둑에도 소량의 초기청자편과 갑발편, 외면에 돌대가 돌려진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이들 유물과 관련된 유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본래 해증이들에 설치됐던 강주소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126)
내동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전북 진안군 마령면과 성수면의 자연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내동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한 도통천을 경계로 동쪽에 양지마을과 서쪽에 중평마을이 있다. 양지마을에서 북쪽으로 350m 떨어진 중성골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진안군 마령면과 성수면 자연경계인 산줄기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갈라진 두 갈래의 산자락 사이에 중성골이 있는데, 그 길이가 500m 내외이다. 이 골짜기 중앙부에 한 갈래의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 물줄기는 중성골 입구에서 도통천에 합류한다. 이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비교적 세장한 충적지가 논과 밭으로 개간됐으며, 현재 중성골 논은 대부분 잡초가 무성한 휴경지이다. 그리고 중성골 상단부 북쪽 기슭에 개간된 밭의 경우만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다. 중성골 남쪽 기슭은 일부 민묘구역과 과수원127)을 제외하면 대부분 임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 하단부에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한 소로가 개설되어 있다.
진안 도통리 중성골 북쪽 산줄기와 직교된 두 갈래 골짜기를 경계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가’·‘나’·‘다’구역으로 설정하였다. ‘가’구역은 산줄기의 남서쪽 기슭 하단부로 소로를 중심으로 그 위쪽에 함창 김씨 묘역과 아래쪽에 계단식 논이 있다. 이 구역에는 3개소의 요지가 소로의 절단면에 남아있으며, 소로와 계단식 논을 조성하는 과정에 유구가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구역은 남쪽 기슭 하단부로 민묘구역과 과수원을 제외하면 소나무가 무성한 대부분 임야지대를 이룬다. 이 구역의 서쪽에서 3개소의 요지가 확인됐는데, 이미 과수원으로 조성된 150m 내외의 구간에서만 요지가 확인되지 않았다.128) 이들 요지는 소로를 개설하는 과정에 얼마간 유구가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되며, 절단면에서 파악된 요지의 폭은 200cm 내외이다. ‘다’구역은 길이 100m 구역에 요도구인 갑발편이 흩어져 있으며, 요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골짜기와 인접된 산자락 말단부에 요지로 추정되는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현지조사 때 유물은 ‘가’·‘나’지구의 요도구인 갑발 퇴적층에서 초기청자와 조질청자인 녹청자가 함께 수습되었다.129) 초기청자의 굽은 선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이 있으며, 후자는 중평마을 수습품보다 기벽의 두께가 얇고 굽의 접지면도 좁아 약간 퇴화된 속성을 보인다. 아직까지 전축요의 증거인 벽돌은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요벽의 벽체가 많아 전축요에서 토축요로 전환된 시기에 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나’지구의 요지 절단면에 마치 벽돌처럼 생긴 방형 혹은 장방형의 불 먹은 할석이 노출되어 있는데, 그 용도가 연소실 불턱이나 번조실의 요벽에 사용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조질청자인 녹청자는 굽을 대충 깍아 정형화되지 않은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요도구로는 갑발과 도지미, 봇극이 있다. 갑발은 원통형 갑발로 주로 완을 번조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지미는 원반형과 원통형이 있으며, 원방형은 그릇이 놓였던 곳이 움푹 들어갔다. 봇극은 나무물레의 축에 끼워서 사용하는 부속용구로 물레의 마찰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130)
진안 도통리 요지에서 남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전북 진안군 성수면 소재지에서 49번 지방도를 따라 진안읍 방향으로 향하면 성수재제소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400m 쯤 떨어진 곳에 점촌마을이 있다. 이 마을 북쪽에 비교적 험준한 산줄기가 북서방향으로 뻗어 내렸는데, 이 산줄기가 성수면 외궁리와 도통리의 자연경계를 이룬다. 이 산줄기 남서쪽 기슭 하단부에 점촌마을이 있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회관 뒤편에 3개소의 요지가 있었다”고 한다.131) 이 마을 민가는 대부분 남서쪽 기슭을 계단식으로 다듬고 그 위에 조성됐는데, 계단식 지형은 그 높이가 3m 내외이다. 최근에 점촌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면담조사를 실시한 뒤 먹구실골까지 포함하여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마을 위쪽 갑발편이 흩어진 비교적 넓은 구역을 대상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했지만, 요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점촌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120년 전 옹기를 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지조사 때 점촌마을과 그 위쪽 밭에서 유물이 수습되었다. 유물은 옹기편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갑발편과 백자편, 옹기편, 소토가 혼재된 상태로 수습되었다. 요도구인 갑발편은 그 양이 많지 않지만 비교적 넓게 흩어져 있으며, 그 기종은 발형과 원통형으로 추정된다. 다만 1990년대 초기청자와 녹청자 계통의 요지로 알려졌으며, 굽안바닥에 ‘十’가 표시된 한국식 해무리굽완도 채집되었다. 그리고 요도구인 갑발은 북쪽에 인접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흡사하여 서로 비슷한 시기에 외궁리 초기청자 요지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주민들은 “마을 남동쪽에 상수도 물탱크가 있는데, 몇 년 전 물탱크를 설치하기 위해 3m 깊이로 흙을 파냈는데, 불 먹은 흙과 옹기편이 섞인 흙이 계속돼 그 위에 물탱크를 세웠다“고 하였다. 본래 초기청자 요지는 점촌마을이 들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오래 전 민가를 계단식으로 조성하는 과정에 대부분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132)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에서 북서쪽으로 7km 가량 떨어진 곳에 진안 중길리133) 도요지가 있다. 호남정맥의 만덕산(762m)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산자락 말단부로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사기점마을에 속한다. 이 마을 입구 남쪽 기슭 밭에 1호 요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50m 가량 떨어진 남동쪽 산기슭에 2호 요지가 있다. 달리 점촌 혹은 점터라고 불리는 곳으로, 본래 장인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현재 요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다. 1996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청자편과 분청사기편, 요도구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청자류는 상감 연당초문과 여의두문·국화문·육원문 등이 시문된 대접과 접시들로 그 시기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의 퇴락한 청자이다. 분청사기류는 역시 대접과 접시로 그 내·외면에는 상감격자문과 인화우점·연판문, 귀얄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굽은 죽절굽과 다리굽이 섞여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분청사기는 그 시기가 15세기에서 16세기 초로 비교적 넓다.
134)
진안고원 남동쪽에 위치한 진안 반송리 도요지135)로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두원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전주최씨 일가 모친 무덤 옆 경작지에 백자편이 수습된 1호 요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산골짜기로 100m 떨어진 감나무골에 2호 요지가 있다. 2호 요지에서 고려 말 청자편과 조선 초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수습되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자기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류는 대접과 접시, 완으로 굽은 투박한 다리굽이며, 문양은 무문을 비롯하여 상감 당초문, 여의두·국화·육원문 등으로 다양하다. 분청사기류는 상감 연판문, 우점문·연판문·국화문·와문, 조화박지 초화문 등의 문양이 시문된 대접과 접시, 병, 항아리, 제기 등이 수습되었다. 백자류는 투박한 다리굽의 대접과 접시 기종으로 문양이 시문되지 않은 무문이다. 요도구는 자연석 도지미와 경사진 원형 도지미, 절구형과 대형 도지미 등이 수습되었다. 유물은 14세기에서 15세기 초의 퇴락한 청자부터 17세기의 백자까지 그 시기적인 폭이 넓다.
136)
순창군 인계면 심초리 도요지이다. 성미산에서 노령을 지나 두류봉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임실군과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산줄기의 남쪽 기슭 하단부에 심초리 도요지가 있다. 순창군 인계면 심초리 심초마을 뒤편 대나무 밭으로 현지조사 대 후기청자와 분청사기편이 다량으로 채집되었다. 자기류는 대접과 접시가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구연부가 외반된 항아리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굽은 죽절굽 형식이며, 문양은 국화문과 연화문, 당초문이 섞여있다. 흙 받침 혹은 耐火土 비짐눈으로 포개어 구웠으며, 도침은는 경사진 원형과 방형이 섞여있다. 이 도요지에서 ‘정릉’ 명 상감청자대접과 유사한 후기청자편이 채집되었고, 녹청색이 거칠게 시유된 상감의 선문·당초문이 시문된 대접·접시·호편이 발견되고 있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가마터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이어주던 해상교통로는 세 갈래가 있다.137) 하나는 황해북부 연안항로이고, 다른 하나는 황해중부 횡단항로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황해남부 사단항로이다. 옛날 고속도로인 강과 바다는 일찍부터 해양 문물교류에 큰 몫을 담당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강과 바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교역망이 잘 갖춰진 곳이 환황해권 동쪽 중앙부인 새만금138)해역139)이다. 종래에 群山灣140)으로 설정된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해양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다. 군산 가도·노래섬·띠섬·비응도·오식도 패총에서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양문화를 비롯하여 내륙문화의 요소도 함께 확인되어,141) 새만금해역이 신석기시대부터 해양 문물교류의 허브였음이 입증되었다. 아마도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잘 구축된 것이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고조선 멸망 이후 준왕의 남천으로 익산·전주·완주 등 만경강유역이 당시 테크노벨리로 급성장한 것은142) 새만금해역을 통한 선진문물의 유입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전래와 해상교통로의 발달로 패총의 규모가 갑자기 커진다.143) 현재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군산지역에서 발견된 패총은 100여 개소로 우리나라에서 밀집도가 가장 높다. 특히 군산 개사동 패총은 그 규모가 100m 내외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동시에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위치한 군산지역이 소금생산을 기반으로 발전했던 해양경제의 보고였음이 입증되었다. 이를 암시해 주는 마한의 지배층 무덤으로 밝혀진 말무덤144)이 군산지역과 동진강하구에 집중적으로 산재해 있다. 군산 신관동·관원리 등 군산지역 18개소의 분묘유적에서 발견된 말무덤은 그 기수가 30여 기에 달한다. 특히 군산 축동유적145)에서는 마한의 전통적인 묘제인 분구묘에서 최고위층 무덤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원통형토기와 흑색토기가 출토되었다. 어찌 보면 새만금해역의 해양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금강과 만경강 사이의 군산지역에는 해양경제를 토대로 발전했던 두 세 개의 마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해양문화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곳이 부안 죽막동이다.146) 백제와 가야, 왜가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하다가 잠시 들러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147) 고창 봉덕리에서 중국제 청자와 일본계 토기가 출토됨으로써 한·중·일의 고대문화가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전개됐음을 암시해 주었다. 동진강하구의 가야포148)는 국제교역항으로 새만금해역의 거점포구를 이용하여 백제, 가야 등이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149) 금강하구인 군산 산월리는 마한부터 백제까지의 계기적인 발전과정150)이 담긴 곳으로 한성기 백제의 중앙을 비롯하여 금강과 만경강유역 내륙지역의 문화요소가 공존한다. 게다가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새만금해역이 해양 문물교류의 거점지역으로 더욱 융성하였다. 삼국시대 때 국제 해양문화의 심장부인 새만금해역은 한 동안 전쟁터로 그 무대가 바뀌었다.151)
통일신라시대 때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로 황해남부 사단항로가 개척되었다. 이 항로는 주로 영산강하구의 회진포를 출발해 절강성 명주에 곧바로 도달하는 데 장보고 선단이 주로 이용하였다. 장보고 선단은,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에서 출발해 북상하다가 황해남부를 사단한 뒤 흑산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지역의 도서·연안지역을 거쳐 경주로 혹은 개경으로 혹은 일본으로 항해하였다.152) 또한 인도 포타락카에서 절강성 주산군도153) 보타낙가산을 경유하여 한반도 서해안 해문인 변산반도와 고군산도, 태안반도, 경기만 강화도까지 이르는 해상항로인 동아시아 해상관음로154)도 새만금해역을 통과하였다. 그만큼 새만금해역은 연안항로를 비롯하여 횡단항로, 사단항로를 이용할 때 대부분 거쳐야 하는 해상교통로의 관문이자 기항지로서 해양 문물교류가 왕성했던 곳이다. 새만금해역과 인접된 부여와 익산에서 중국 월주요의 상림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玉璧底碗이 출토되어155)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런데 장보고 선단이 주로 이용했던 사단항로로 후백제의 견훤이 중국과의 국제외교를 가장 역동적으로 펼쳤다. 892년 무진주에서 도읍을 정한 견훤은, 장보고 선단이 구축해 놓은 사단항로로 그해 吳越에 사신을 보냈다.156) 당시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국제적인 위치를 인증 받는 것157) 못지않게 장보고의 청해진 해체 이후 누적된 청자 수입과 공급도 주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900년 완산주로 도읍을 옮겨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로 선포한 뒤 다시 오월에 사신을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백제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후백제는 오월, 후당158)과의 국제외교를 활발하게 펼쳤는데, 이는 백제-장보고로 연결된 국제 해양교류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159)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오월은 越州窯의 후원을 토대로 번영하였고, 중국 청자의 본향인 월주요는 해무리굽과 전축요로 상징된다. 후백제 전주성인 전주 동고산성에서 해무리굽 초기청자편이 출토됐는데, 진안고원에서도 해무리굽 초기청자편과 함께 전축요가 자리하여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새만금해역의 군산도는 해상교통로와 내륙수로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해상교통의 기항지였다.160) 그리하여 후백제부터 고려까지 국제 해양 문물교류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군산도의 선유도 망주봉 동쪽 기슭에서 초기청자편과 상감청자편, 고려시대 기와편과 토기편, 중국제 자기편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1123년에는 김부식이 군산도를 방문해 송나라 사절단을 군산정으로 초대하여 국가차원의 영접행사가 열릴 정도로 당시 국제외교의 관문이었다. 현재 선유도 망주봉 주변에는 崧山行宮을 비롯하여 사신을 맞이하던 群山亭, 바다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五龍廟, 사찰인 資福寺와 관련된 건물지가 잘 남아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최고의 청동거울과 중국 송·원대 자기류가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되어, 군산도 해양문화의 국제성과 역동성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줄곧 해양 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해 왔던 새만금해역의 거점포구를 통해 오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로 유입됐을 개연성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초기청자 요지는 축요 재료를 기준으로 전축요와 토축요161)로 나뉜다. 중국 절강성 월주요는 해무리굽과 길이 40m 이상 되는 대형의 전축요로 상징된다. 그리고 초벌구이를 하지 않고 건조된 그릇에 유약을 입혀 한 번만 굽는 단벌구이로 알려져 있다. 종래에 龍仁 西里162)와 始興 芳山洞163) 등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전축요는 길이 40m, 내벽의 너비 200cm 내외로 측면에 출입구와 선해무리굽완이 상징적인 유물로 알려졌다.164) 우리나라 대형 전축요의 유구와 유물의 속성은 월주요와의 긴밀한 관련성을 보였다. 그러다가 여주 중암리와 서산 오산리, 대구 진인동, 칠곡 창평리, 진안 도통리 등은 요지의 길이가 반으로 축소되었고,165) 일부 선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완을 생산하다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166) 우리나라 전축요의 분포양상을 근거로 전축요의 축조기술과 청자의 제작기술이 중서부에서 남서부로 확산된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中先南後說’167)로 우리나라의 중서부가 남서부보다 전축요가 토축요보다 앞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168)
주지하다시피 전축요는 지표면을 약간 파낸 뒤 바닥면을 정리하고 요를 세운 지상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축요를 대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도 요의 규모와 그 구조를 상세하게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더욱이 진안 도통리 A 요지의 경우에는 지표조사만으로 그 규모와 유구의 속성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최근에 진안 도통리 B 요지의 중성골 정밀 지표조사에서 내벽이 200cm 내외로 파악됐는데, 요의 너비는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 등 대형 전축요와 차이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진안 도통리 A 요지에서는 대형 전축요의 표식적인 유물로 알려진 선해무리굽완의 비율이 매우 높고 중국식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도 모두 공존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는 그 규모와 속성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요지의 길이만을 근거로 진안고원의 전축요를 모두 중형 전축요로 분류하기가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진안고원의 초기청자 요지를 누가 조성했을까?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의 운영주체169)와 관련하여 국가차원의 관리체제가 적용된 官窯, 왕실에 자기를 공납하던 瓷器所, 호족세력과 관련된 私窯 등이 있다. 종래에 진안고원은 서남해안 호족세력과의 관련성이 제기됐지만,170) 이를 증명해 주는 유적 및 유물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안고원 초기청자 요지의 규모와 강주소의 설치배경을 주목해야 한다. 해증이들에 설치된 剛朱所를 중심으로 동쪽에 도통리 A, 북쪽과 남쪽에 도통리 B와 외궁리 요지가 직경 1km 구역에 마치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진안 도통리 A는 그 운영시기가 가장 앞서는 곳으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7개소의 요지가 남아있었다171)고 한다. 진안 도통리 B 요지에서도 6개소의 초기청자 요지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강주소는 마령현172)에 속했던 곳으로 진안고원을 무대로 성장했던 호족세력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강주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대규모 초기청자 요지가 어떤 구획성과 정형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호족세력보다 후백제의 국가차원에서 조성됐을 개연성이 높다.
그럴 가능성은 후백제와 오월의 돈독한 국제외교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선사시대부터 해양 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해 왔던173) 새만금해역은 후백제 때 국제 문물교류의 거점이었다. 851년 장보고 선단의 거점인 淸海鎭을 없애고 그곳의 사람들을 碧骨郡으로 이주시켰는데,174) 이들은 후백제 건국 이후 중국과의 국제교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175) 견훤은 전주로 도읍을 옮긴176) 뒤 새만금해역의 거점포구를 출발해 군산도를 경유하는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吳越에 사신을 보냈다.177) 그리고 918년 후백제가 사신과 더불어 말을 오월에 보내자 927년 오월국 사신인 班尙書가 서신을 갖고 후백제를 방문하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견훤이 줄곧 큰 비중을 두었던 오월과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 제작기술이 최초로 후백제에 전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에 중국 오대십국의 혼란기 때 중국인 장인집단이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본 주장178)도 있다. 그런데 월주요의 장인집단은 오월로부터 국가차원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의 망명보다 오히려 국제외교를 통한 후백제로의 파견 내지 유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후백제와 선종 불교와의 돈독한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견훤은 신라 말 최고의 선종 산문인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실상산문을 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는 실상산문의 편운화상을 적극 후원했는데, 그 이유는 신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후백제는 당시 유행하던 선종 불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선종 산문이나 선승들은 국가를 유지하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다.179) 무엇보다 茶文化를 중시했던 선종 산문과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청자의 안정적인 공급과 확보가 매우 절실했는데, 중국 청자의 중개무역을 독점하던 장보고 선단의 무역선이 끊김으로써 청자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선승들이 남중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도움을 받아 892년 견훤이 처음으로 오월에 사신을 보냈다. 중국 문물에 익숙한 유학승들의 도움으로 오월과의 국제외교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청자 제작기술의 도입은 가장 중요한 외교문제로 대두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안고원의 초기청자가 언제 처음 출현했을까? 우리나라 초기청자의 출현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그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중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오월이 송에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도자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되어 그 기능을 전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청자가 발생하였다는 견해180)가 있다. 또한 한반도의 청자 제작은 지방호족세력인 해상세력에 의해 시작되었고, 청자의 수입만으로는 그 수요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청자 제작을 시작했다181)는 것이다. 진안고원의 초기청자도 서남해안 호족세력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제작되었고, 그 출현시기를 10세기 후반으로 비정하였다.182) 그런데 전주 동고산성에서 진안고원 출토품과 흡사한 선해무리굽과 중국식해무리굽이 출토되어, 진안고원 초기청자가 후백제 멸망 이전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설정해 두고자 한다. 다행이 전주 동고산성 주문인 서문지의 학술발굴이 곧 착수될 예정으로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출현시기와 관련해서는 일단 유보해 두려고 한다.
후백제의 전주성183)으로 밝혀진 전주 동고산성은 6차례의 학술발굴184)을 통해 그 전모가 파악되었다.185) 이 산성의 중앙부에 자리한 주건물지는 그 길이가 82.4m로 우리나라의 왕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아마도 견훤은 평상시 평지성186)에 머물러 있다가 위급할 때 동고산성으로 이동했는데,187) 마치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는 고구려의 도성체제와 똑 같다. 長水 合米山城188) 등 전주 동고산성과 축성기법이 거의 흡사한 많은 산성들이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189) 이들 산성은 후백제의 도성인 전주의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부분 후백제에 의해 개축되었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을 따라 후백제가 구축해 놓은 외곽 방어선 안쪽에 진안고원의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호남정맥의 馬峙190)를 넘으면 전주에서 곧장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에 손쉽게 도달할 수 있다. 진안고원 초기청자 요지와 전주 동고산성 사이에 조형적 유사성이 입증됐기 때문에 그 운영주체가 후백제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남원 실상사191)와 익산 미륵사지192)에서 상당량의 초기청자가 출토되어 역시 후백제와의 관련성을 높였다. 남원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로 문을 연 실상산파의 본사로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서 귀국한 홍척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한 이후 실상산문에 큰 관심을 두어 실상사 조계암 구지에 세워진 편운화상의 부도에 후백제의 연호인 正開가 사용된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는 견훤의 미륵신앙이 김제 금산사에서 익산 미륵사지로 바뀔 정도로 익산 미륵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193) 922년에는 익산 미륵사탑을 복구하고 백제 무왕의 미륵신앙을 부활시킴으로써 전제군주로서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였다.194) 이처럼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남원 실상사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전주 동고산성 및 진안고원 출토품과 흡사한 초기청자가 출토되었다. 종래에는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초기청자를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195)했기 때문에 향후 초기청자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연구방법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진안고원의 초기청자는 후백제의 멸망과 함께 침체기를 맡는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茶器와 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196)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 왕실과 전주로의 공급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진안 도통리에 설치된 강주소의 설치목적과 그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최고의 선진문물인 청자 제작기술을 가진 첨단기술 집단을 국가에서 통제하기 위해 강주소가 설치됐는데, 후백제의 멸망으로 그 운영주체가 갑자기 고려로 바뀐다. 이 무렵 진안고원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거나 고려에 의해 강제 이주됐을 가능성197)도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중서부 대형 전축요에서 초기청자의 출현시기를 10세기 2/4분기로 비정한 견해198)가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199) 또한 고려의 지방 통치제도 정비에 따른 해상교통로의 발달로 진안고원의 일부 장인집단이 고창 용계리·반암리 등 서해안 혹은 남해안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안고원 도자문화의 전개과정을 크게 5단계200)로 설정하였다. 진안고원 도자문화의 도입기는 진안고원에서 도자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진안 도통리·외궁리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시점부터 후백제의 멸망까지이다. 아직은 초기청자 요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초기청자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생산됐는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전주 동고산성에서 해무리굽 초기청자가 출토됐기 때문에 936년 후백제의 멸망 이전에 이미 진안고원의 초기청자가 생산됐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 이후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이주 혹은 이동함에 따라 침체기를 거쳐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도요지가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진안고원의 섬진강유역에서 12세기부터 14세기 전반까지는 공백기로 비색청자와 상감청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진안 도통리에 강주소가 설치된 것은, 후백제 때 초기청자 요지의 존재와 더불어 그 영향력 행사가 가장 주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끝으로 진안고원 도자문화의 부흥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고려의 대몽항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강진·부안의 청자문화가 쇠퇴201)하면서 장인들의 확산에 의해 진안고원의 섬진강유역에서는 청자가 다시 등장한다.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와 인접된 鎭安 中吉里·盤松里에서 고려 후기청자가 출현한 것은 도자생산의 확산에 따른 장인집단의 이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고원을 떠났던 장인집단이 그 선조들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와 관련된 전북 진안군의 도요지는 그 수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이 무렵 진안고원의 금강유역에 속한 진안군 주천면 일대가 새로운 도자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진안고원에서 생산된 조선시대 백자가 천혜의 교역망을 이용하여 널리 유통됨으로써 진안고원의 도자문화가 다시 융성하였다. 현재 전북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손내옹기도 옛날 화려했던 진안고원 도자문화의 전통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119)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산줄기로 장안산·수분령·신무산·자고개·팔공산·성수산·마이산·부귀산을 지나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분기점인 주화산까지 이어진다. 비록 63.3km의 짧은 거리이지만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을 백두대간에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해 큰 의미를 지닌다. 120) 본래 호수나 강이었던 마이산은 중생대 백악기의 지각변동 때 형성된 콘크리트 축조물 같은 수성암으로 동쪽의 수마이산과 서쪽의 암마이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산의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삼국시대 때는 西多山, 고려시대 때는 湧出山, 조선 태조 때 束金山으로 불리다가 태종 때 산의 형태가 말의 귀와 비슷하다 하여 馬耳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21)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심암마을 위쪽 천상데미의 상추막이골에 자리한다. 천상데미의 ‘天上’은 하늘을 오른다는 뜻이며, ‘데미’는 ‘더미’의 전라도 방언으로, 그 뜻은 물건이 한데 쌓인 큰 덩어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천상데미’는 ‘하늘을 오르는 봉우리’를 가리킨다. 122) 尹盛俊, 2010, 「鎭安地域 靑瓷窯址의 硏究」, 圓光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23) 金英媛, 1997, 『全北의 朝鮮時代 陶窯址』 -朝鮮時代 粉靑·白磁 窯址-, 國立全州博物館, 1997, 329-331쪽. 尹盛俊, 앞의 논문, 5-15쪽. 124) 尹盛俊, 앞의 논문, 84쪽. 125) 아마도 중국 월주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에 직접 전래된 경우로 당시 오월과 후백제에서 생산된 초기청자의 색상은 대체로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띤다. 그 이유는 대형 전축요에서는 녹색 또는 청색을 내기 위한 환원염 번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26) 尹盛俊, 앞의 논문, 17-43쪽. 127) 중성골 중앙부 남쪽 기슭으로 동서 길이 150m 구역에 배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128) 현재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유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유물도 수습되지 않았지만, 다른 구역과 흡사하게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본래 요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9) ‘가’지구의 북쪽에는 소로를 개설하면서 생긴 높이 130cm 내외의 절단면에 갑발편이 안정된 충위를 이루면서 쌓여있다. 그리고 민묘구역 남쪽에는 약간 볼록하게 솟아 요지로 추정되는 곳과 ‘가’·‘나’지구의 경계인 골짜기에도 상당량의 갑발편이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나’지구에도 요지로 추정되는 3개소에 요벽의 벽체와 갑발편이 소로의 절단면에 노출되어 있다. 130) 尹盛俊, 앞의 논문, 15-16쪽. 131) 조계연, 1992, 「全北地方 陶窯址의 硏究」, 圓光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91-92쪽. 132) 金英媛, 앞의 책, 323-328쪽. 133) 진안 도통리·외궁리에서 호남정맥의 마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134) 金英媛, 앞의 책, 311-319쪽. 135) 『世宗實錄地理志』에 “鎭安縣磁器所一在馬靈縣南豆彦里一在馬靈縣東東林里 皆品下”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료의 두언리 자기소가 반송리 두원마을 요지로 추정된다. 136) 金英媛, 앞의 책, 311-319쪽. 137) 정진술, 2009, 『한국의 고대 해상교통로』,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1-196쪽. 138) 호남평야의 심장부인 김제·만경평야를 달리 ‘금만평야’라고 부르는 데, ‘새만금’은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기름진 땅으로 유명한 만경·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다(송화섭, 2009, 「전북 해양문화와 새만금」, 『전북의 역사와 문화유산』, 전라북도·전주대학교 산학협력단, 296-298쪽). 139) 전북의 최대 화두인 새만금사업은, 전북 군산시 비응도에서 야미도와 신시도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까지 33km로 방조제를 쌓아 갯벌과 바다를 땅으로 전환하는 간척사업을 말한다. 이 사업을 위해 1991년 착공된 새만금방조제가 통과하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하구와 군산도 일대를 새만금해역으로 설정했는데, 그 중심부에 군산도가 있다(곽장근, 2012, 「새만금해역의 해양문화와 문물교류」, 『도서문화』 제39집, 23-32쪽). 140) 송화섭, 2004, 「후백제의 해상교류와 관음신앙」, 『후백제의 대외교류와 문화』, 후백제문화사업회, 194쪽. 141) 이영덕, 2010, 「錦江 汽水域의 新石器文化」. 『서해안의 전통문화와 교류』. 한국대학박물관협회·군산대학교 박물관, 34-36쪽. 142) 한수영, 2011, 「만경강유역의 점토대토기문화기 목관묘 연구」, 『호남고고학보』 39, 5-25쪽. 143) 최성락·김건수, 2002, 「철기시대 패총의 형성 배경」 『호남고고학보』 15, 57-82쪽. 144) 말무덤은 ‘말’을 馬의 뜻으로 보고, ‘말’이 ‘머리’ 혹은 ‘크다’의 뜻으로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관형사로 파악하여 그 피장자는 지배층으로 추정하고 있다. 흔히 왕사슴을 말사슴, 왕고추잠자리를 말고추잠자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최근 군산대학교 캠퍼스 내 미룡동 말무덤에 대한 학술발굴을 통해 그 성격이 마한의 지배층 무덤인 분구묘로 밝혀졌다. 145) 湖南文化財硏究院, 2006, 『群山 築洞遺蹟』, 韓國土地公社. 146) 國立全州博物館, 1994, 『扶安 竹幕洞 祭祀遺蹟』, 國立全州博物館 學術調査報告 第1輯. 147) 兪炳夏, 1998, 「扶安 竹幕洞遺蹟에서 進行된 三國時代의 海神祭祀」, 『扶安 竹幕洞 祭祀遺蹟 硏究』, 國立全州博物館, 187-250. 148) 호남평야를 넉넉하게 적셔주는 동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진 내륙수로와 내륙교통로의 종착지에 가야포가 있다. 전북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창북리 일대로 동진강하구의 염창산 부근이 여기에 해당된다. 149) 곽장근, 앞의 논문, 102-109쪽. 150) 최완규, 2004, 「고고학으로 본 선사·고대의 군산」, 『전라북도 역사문물전 Ⅴ 군산』, 국립전주박물관, 176-184쪽. 151) 당나라 소정방 13만 군대가 상륙했던 기벌포와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던 백강전투, 676년 당나라와 신라 수군이 최후의 해전을 펼친 곳도 새만금해역으로 추정된다. 152) 강봉룡, 2009, 「고대 한·중항로와 흑산도」, 『동아시아 고대학』 제20집, 동아시아고대학회, 1-38쪽. 153) 신라 상인의 전설과 함께 신라초 및 고려도두가 있는 곳으로 15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사단항로로 국제교류를 할 때 대부분 거쳐야 하는 해상교통로의 길목이다. 154) 송화섭, 2010, 「고대 동아시아 문화와 한반도 교류 -관음의 바닷길을 중심으로-」, 『다문화콘텐츠연구사업단 전국학술대회 발표문』,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12-13쪽. 155) 임사민, 「고대 동아시아지역 해상교류와 사단항로」, 『동아시아 해양실크로드와 부안』, 부안군·전주대학교 산학협력단, 2010, 56쪽. 156) 申虎澈, 1993, 『後百濟甄萱政權硏究』, 一潮閣, 136쪽. 157) 金庠基, 1974, 「新羅末에 있어서의 地方群雄의 對中通交」, 『東方史論叢』, 서울대학교 출판부, 439쪽. 158) 황해중부 횡단항로로 두 차례의 국제교섭이 이루어졌는데, 925년 후당에 사신을 보내자 후당은 견훤을 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라는 관작을 책봉하였다. 159) 조법종, 2006, 「후백제와 태봉관련 연구동향과 전망」, 『신라문화』 제27집, 200-202쪽. 160) 곽장근, 2012, 「군산도의 해양문화」, 『제3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자료집 2』,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여수지역사회연구소·전남대 지역사회발전연구소, 46-50쪽. 161) 崔健, 1998, 「靑磁窯址의 系譜와 展開」, 『미술사연구』 제12호, 3-20쪽. 162) 湖巖美術館, 2003, 『龍仁 西里 高麗白磁窯』, 1987; 『龍仁 西里 高麗白磁窯』 Ⅱ. 163) 海剛陶磁美術館, 2001, 『芳山大窯』, 京畿道 始興市. 164) 李鍾玟, 2004, 「고려시대 청자가마의 구조와 생산방식 고찰」, 『韓國上古史學報』 第45號, 73-76쪽. 165) 海剛陶磁美術館, 2000, 『벽돌가마와 초기청자』. 166) 이희관, 2003, 「韓國 初期靑磁에 있어서 해무리굽碗 問題의 再檢討」, 『美術史學硏究』 237, 5-48쪽. 李鍾玟, 2003, 「韓國 初期靑磁의 形成과 傳播」, 『美術史學硏究』 240, 51-75쪽. 167) 吉良文男, 2004, 「朝鮮半島の初期靑磁」, 『高麗靑磁, 高麗靑磁の誕生』,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1-8쪽. 168) 이종민, 2011, 「韓國 初期靑磁 生産窯址의 分布와 性格」, 『역사와 담론』 제63집, 154-158쪽. 169) 李喜寬, 2011, 「韓國 初期靑磁 硏究의 現況과 問題點」, 『지방사와 지방문화』 14권 2호, 35-38쪽. 170) 尹盛俊, 앞의 논문, 79-85쪽. 171) 조계연, 앞의 논문, 92쪽. 172) 백제 마돌현으로 경덕왕 16년(757) 마령현으로 그 지명이 바뀌어 임실군 영현으로 편입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 전주목에 속하였다가 조선 태종 12년(1412) 진안현으로 통합되었다. 173) 곽장근, 앞의 논문, 23-32쪽. 174) 『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文聖王 十三年 春三月 能淸海鎭 徙其人於碧骨郡” 참조. 175) 새만금해역의 중심부인 벽골군으로 이주된 이후에도 중국과의 국제교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찌 보면 후백제가 장보고 선단이 구축해 놓은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오월 등 남중국과 국제교류를 지속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개연성이 높다. 176) 친왕건계 지방세력들이 영산강유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주의 海港都市的 機能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악한 견해(송화섭, 앞의 논문, 196-198쪽)가 관심을 끈다. 우리나라에서 해양문화와 내륙문화가 하나로 조화롭게 융합된 곳이 전주이다. 177) 송화섭, 앞의 논문, 195-198쪽. 178) 이종민, 앞의 논문, 172쪽. 179) 조범환, 2011, 「후백제 견훤정권과 선종」,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341-367쪽. 180) 韓盛旭, 2010, 「康津 靑瓷의 生産과 流通」, 『文化史學』 第34號, 89쪽. 181) 曺銀精, 2003, 「韓半島 中西部 地域 土築窯 硏究 -海南 新德里를 中心으로-」, 弘益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38쪽. 182) 이에 근거를 두고 진안 도통리 A·외궁리 초기청자 요지를 고창 용계리·반암리와 비슷한 11세기 전반 경으로 진안 도통리 B를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으로 보았다(尹盛俊, 앞의 논문, 85쪽). 183) 전주역사박물관, 2006, 『후백제문화 재조명』, 전주시. 184)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92, 『전주 동고산성 건물지 발굴조사 약보고서』, 전주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97, 『전주 동고산성 발굴조사 보고서』, 전주시. 전북문화재연구원, 2006, 『전주 동고산성』, 전주시. 185) 전북 전주시 남동쪽 승암산의 삼태기형 골짜기를 휘감은 날개모양의 포곡식이다. 주문인 서문을 중심으로 동문과 북문 등 3개소의 성문이 있으며, 성의 둘레는 1,574m이다. 유물은 全州城과 武士를 새긴 막새류를 비롯하여 王·和·明·官·天·行·中方 등의 인장와가 출토되었다. 186) 전북 전주시 중노송동 전주고등학교 북동쪽 물왕멀[水王村] 부근 토성이 후백제의 평지성으로 추정된다. 187) 조법종, 2004, 「후백제 전주의 도시구성과 특성」, 『후백제의 대외교류와 문화』, 전주전통문화연구소, 103-118쪽. 188) 금남호남정맥의 큰 관문인 자고개 북쪽에 자리한 포곡식 산성이다. 마치 두부처럼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삼국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끼여 있다. 이 산성의 동쪽 기슭에 견훤이 잠시 올라 쉬었다는 왕바위가 아주 늠름한 자태로 견훤의 방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189) 곽장근, 전북일보 2012년 9월 4일, 「문화마주보기」 ‘견훤의 전주사랑과 그 자취들’ 참조. 190) 호남정맥의 만덕산과 오봉산 사이의 고갯길로 전주와 진안고원을 최단거리로 이어준다. 19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6, 『실상사 Ⅱ』 발굴조사보고서, 262-305쪽. 192) 10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제작된 2,000여 점의 청자류는 그 시문기법에 따라 초기청자의 무문을 비롯하여 음각, 양각, 퇴화, 철화, 상감, 상형기법으로 분류된다. 193) 조범환, 앞의 책, 355-366쪽. 194) 金壽泰, 1999, 「全州 遷都期 甄萱政權의 變化」, 『韓國古代史硏究』 15, 283쪽. 195) 정읍 고부구읍성에서 출토된 자기류 중 해무리굽으로 그 색조가 녹갈색과 황갈색을 띠고 있는 청자류도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하였다(전북문화재연구원, 2007, 『井邑 古阜 舊邑城 Ⅰ』, 정읍시. 196) 이종민, 앞의 논문, 173-174쪽. 197)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자 고려는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대규모로 주둔시켰다. 태조 23년(940) 전주로 다시 환원되었지만, 당시 진안고원 초기청자 장인집단이 고려에 의해 우리나라의 중서부를 비롯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된 것이 아닌가 싶다. 198) 李喜寬, 2003, 「韓國 初期靑磁에 있어서 해무리굽碗 問題의 再檢討」, 『美術史硏究』 237, 30-38쪽. 이종민, 앞의 논문, 303-304쪽. 199)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희관은 초기청자와 오대·북송시기의 문양까지 비교·검토하여 초기청자의 출현시기를 940년대 경으로 그의 주장을 더욱 구체화시켰다(李喜寬, 2009, 「高麗 初期靑磁와 越窯의 關係에 대한 몇 가지 問題」, 『史學硏究』 96, 30-38쪽). 200) 종래에 지표조사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를 도입기→침체기→공백기→부흥기→전성기로 설정하였다. 201) 韓盛旭, 2005, 「高麗後期 靑瓷의 器形變遷」 『美術史學硏究』 232, 57-9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