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으로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임실의 선사와 고대문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북 임실군은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 산줄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수계상으로는 섬진강 상류지역에 속한다.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크고 작은 평야와 구릉지가 발달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임실군이 자리한 섬진강유역은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남강유역을 하나로 묶는 가교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사시대 이래로 줄곧 사통팔달하였던 내륙교통로가 거미줄처럼 잘 갖춰져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를 이루었다. 더욱이 임실군을 중심으로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진 내륙교통망이 교차하여 일찍부터 거점지역으로 발전함으로써 문화상으로 점이지대를 이루었다.
전북 동부 산간지대에서 선사시대의 문화유적 밀집도가 높고 그 종류가 다양한 곳이 임실군이다. 특히 임실 상가 윷판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신평면 일대에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문화유적이 밀집되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를 토대로 선사시대부터 거점지역으로 발돋움하였고, 삼국시대 때는 백제와 가야문화가 공존하였다.
종래에는 임실 금성리 출토품인 목긴항아리를 근거로 가야계 소국인 上己汶이 임실읍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었지만, 그것을 증명해 주는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백제의 대규모 분묘유적을 중심으로 산성 및 봉수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한 동안 섬진강유역으로 가야의 진출과 함께 일시적으로 가야의 영역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임실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최고로 높인 곳인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산성이다. 이 산성은 삼한시대 옛 성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진안 와정토성을 경유하여 진안고원을 종단하는 간선교통로와 만경강유역에서 호남정맥의 슬치를 넘어 온 교통로가 만난다.
백두대간의 치재를 넘어 운봉고원을 거쳐 경남 서부지역으로 나아가는 백제 한성기 간선교통로, 호남정맥의 석거리재를 넘어 종착지인 고흥반도까지 이어진 남북교통로,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가 나뉘는 분기점이다. 동시에 섬진강유역에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져 내륙교통망의 관제탑과 같은 허브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동진강 하구의 加耶浦를 가야의 거점포구로 비정하였다. 동진강유역에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진 내륙 수로와 내륙 교통로의 종착지인 가야포는, 서해 연안항로의 기항지이자 제사유적인 부안 죽막동에서 그 위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중국 사행이 서해의 연안항로를 따라 이루어졌다면, 섬진강 하구의 경남 하동 못지않게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도 그 유력한 후보지로 보았다.
백두대간의 육십령과 치재를 넘어 임실 월평리 산성을 거쳐 가야포까지 도달하는 데 거리상으로 가장 가깝고 교통로의 필수 조건인 경제성과 안정성도 모두 충족시켜 주었다. 이를 근거로 대가야를 비롯한 영남 내륙지역과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계 소국이 남제 등 중국과 교류할 때 주로 이용하였던 국제교역항으로 추론하였다.
호남 동부지역에 밀집 분포된 산성은 대략 100여 개소에 이른다. 섬진강과 남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면서 아영분지와 운봉고원의 서쪽 자연경계인 백두대간과 섬진강 중류지역을 동서로 횡단하는 오수천을 따라 산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만경강유역에서 섬진강 상류지역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호남정맥의 슬치 부근, 공주와 부여 일대에서 진안고원 등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려면 주로 넘었던 금남정맥의 싸리재 부근, 금산분지의 북쪽을 휘감는 산줄기에도 산성이 밀집되어 있다.가야계 분묘유적과 산성의 분포권이 서로 중복된 점에서 상당수의 산성은, 백제 및 영산강유역에 기반을 둔 세력집단에 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세력에 의해 처음 축성된 것으로 보았다.
금강과 섬진강의 상류지역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밀집 분포된 80여 개소의 봉수는 대체로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의 분포권과 일치한다. 특히 1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된 장계분지와 장수분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면서 그곳을 방사상으로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산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나타내며 장계분지와 장수분지로 통하는 여러 갈래의 내륙 교통로가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입지를 두었다. 봉수에서 수습된 토기의 속성과 봉수의 분포양상만을 기준으로 추론한다면, 봉수의 설치주체는 대가야 혹은 장계분지와 장수분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발전하였던 가야세력과의 관련성이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이전까지 줄곧 임실군에 속하였던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는 후백제에 의해 운영된 것으로 보았다. 후백제 견훤이 45년 동안 중국청자의 본향인 오월과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월주요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임실 진구사지에서 나온 초기청자는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는 그 역사성을 높게 인정받아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외궁리 경우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아직도 행정당국의 관리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고 있다. 진안 도통리의 정식 발굴조사와 함께 전라북도 등 행정당국에서 문화재 지정 논의가 시작되었으면 한다.
2007년 임실군 전 지역을 대상으로 종합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한 뒤 그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담아낸 책자도 발간되었다. 이를 계기로 임실군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수많은 문화유적이 밀집 분포된 문화유적의 보고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임실 상가 윷판유적과 그 서쪽에 자리한 하가 구석기유적은 임실군의 선사시대를 대표한다. 임실 금성리·도인리·석두리에서 백제토기와 가야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삼국시대 때 문화상 점이지대로서 임실군 고대문화의 지역성을 보였다. 향후 임실군의 선사 및 고대문화를 보다 더 심층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실체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매장문화재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이를 근거로 종합적인 규명작업이 다시 행해져야 할 것이다.
1. 2. 임실군 도자문화의 전개과정과 우수성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백제 때 지명을 지금도 쓰고 있는 곳이 임실군이다. 어찌 보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통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백제의 지명을 지키겠다는 임실사람들의 강한 자긍심의 발로이다. 동시에 씨앗이[任] 튼실하게 영그는[實] 동네라는 지명 속 의미처럼 일찍부터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데 빼어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줄곧 거점지역을 이루었고, 삼국시대 때는 가야와 백제문화가 공존하였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내륙교통로가 교차하는 임실 월평리 산성은 내륙교통망의 허브로서 조선시대까지 교통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임실군의 자연환경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 낸 것이 임실군의 도요지이다.
임실군의 도요지는 임실군 도자문화의 전개과정과 그 역사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생산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행정 구역상으로 임실군에 속하였다. 진안 도통리에서 생산된 초기청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이 임실 진구사지이다. 후백제 때 임실의 발전상을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진안 도통리는 벽돌가마에서 흙가마로 바뀌고 오직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그런데 936년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가 갑자기 침체기에 빠진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茶器와 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의 왕실과 전주로의 유통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안 도통리는 후백제의 최첨단 국가산업단지로 추정된다.
이 무렵 진안 도통리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거나 고려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고 고려의 지방 통치제도 정비에 따른 해상교통로의 발달로 진안 도통리 장인집단이 고창, 부안 등 서해안으로 이동하였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 이후 진안고원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이주 혹은 이동함에 따라 마침내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가 문을 닫았다. 반면에 부안 유천리에서는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 상감청자와 비색청자를 생산하였다.
전북 부안과 전남 강진에서 만든 천하제일의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는 고려 말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맡는다. 고려의 대몽항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부안, 강진의 청자문화가 쇠퇴한다. 이 무렵 임실군을 중심으로 진안군과 순창군, 남원시 일대에서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왜구의 잦은 침입과 극심한 피해로 가마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당시 최고의 도공들이 안전한 내륙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임실 구담 도요지 북쪽 구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당시 장인집단의 이주를 고고학적으로 방증해 준다.
부안 유천리를 운영하였던 최고의 도공들이 호남정맥의 가는정이와 마치, 구절재를 넘어 전북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것 같다. 후백제 수도 전주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진안 도통리를 가려면 호남정맥 마치를 넘었는데, 마치는 본래 왕의 길, 즉 후백제 견훤왕이 넘던 고개로 추정된다.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회봉리,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백운면 반송리에서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함께 섞여있는데, 모두 호남정맥 마치를 넘던 내륙교통로와 관련이 깊은 도요지들이다. 11세기 이른 시기 진안 도통리를 떠났던 장인집단이 고려 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동진강 하구 부안군 계화면 염창산 부근에 가야포가 있다. 삼국시대 때 국제 교역항으로 운봉가야 및 장수가야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서해의 거점포구로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포까지 가려면 대부분 호남정맥 가는정이를 이용하였다. 호남정맥 구절재도 동진강과 섬진강유역을 곧장 이어주던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던 큰 고갯길이다. 고려시대 부안 일대에서 청자문화를 꽃피웠던 장인집단이 호남정맥 가는정이, 구절재를 넘어 임실군과 순창군, 남원시 일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죽계리 도요지와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도요지가 이를 방증해 준다.
원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임실 학정리 도요지는 상품의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순백자, 옹기가 폭 넓게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서쪽 구역에서 순백자와 옹기가 서로 붙은 상태로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본래 사구실마을로 불리던 학정마을은 도요지의 분포 범위가 동서길이 700m에 달한다. 전북지역 내 분청사기 도요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현지조사 때 학정마을 입구에서 가마의 벽체로 민가의 담장을 두른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조사단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임실 학정리 도요지를 중심으로 도요지가 밀집 분포된 것은 백자와 분청사기의 원료인 백토 혹은 백석의 산지와 관련이 깊다. 임실군의 백토와 장인들의 지혜가 하나로 합쳐져 명품의 순백자와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임실군 분청사기 도요지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는다. 아직은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이유를 단정할 수 없지만 정유재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정유재란 때 분청사기를 만들던 최고의 도공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 아무튼 임실군 분청사기 도요지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그 이후 한 세기 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선 후기의 백자 가마터가 임실군 곳곳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아직은 지표조사 자료만으로 도자문화를 정리하였기 때문에 향후 임실군 도자문화의 실체와 그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