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地理)에 관한 기록(誌)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니 멀리는 하(夏)나라 때의 우공(禹貢)1)과 주(周)나라 때의 직방(職方)2)이 그것이며, 가까이는 명(明)나라의 일통지(一統志)3)와 우리 조선왕조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그것이다. 그러나 온 나라의 지리를 한곳에 모아 기록한 지리서(地理書)들은 여러 지방을 총괄(總括)하 는 데에 중요한 목표를 두고 있어, 한 지방이나 한 고을에 전념(專念)하지 아니하므 로 한 지방이나 한 고을로 말한다면, 진실로 빠뜨린 것이 많게 된다. 이것은 마땅히 한 지방이나 한 고을을 다스리는 이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주현(州縣)을 다스리는 이들이 때때로 온 경내(境內)의 사실을 갖추어 지지(地志)를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내가 신해년(1671) 봄에 외람되게 이 고을(임실현:任實縣)을 맡아 다스릴 때, 고을에 선인(善人)들의 유적과 명성이 있는 고관(高官)들의 남은 발자취가 많았는데, 만일 이를 기록하여 전해줄 책이 없다면 지금은 그래도 이를 전해주는 한두 사람이 있다지만, 이들이 죽은 뒤에는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질 것이 틀림이 없다.
내가 이에 마음에 느끼고 의도(意圖)하는 바 있어, 작년 여름에 『운수지(雲水誌)』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때 고을 사람 중에 『함주지(咸州誌)』를 바친 사 람이 있었는데,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함안(咸安)군수로 있을 때 저술한 것이었으므로, 운수지의 규모(規模)와 절목(節目)은 대체로 이 책을 따랐다.
고을에 한필상(韓必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절개가 굳은 사람이었다. 글 짓고 쓰는 것과 산천(山川)과 고적(古蹟)에 뛰어났으므로, 먼저 각 면에서 상부 (上府)에 보고한 문장(文狀)들을 모아서, 한필상으로 하여금 순서대로 배열하고 편집하여 책을 만들게 하였고, 한편 이시연(李時然)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 됨이 정 하고 자세하였으므로, 이시연으로 그 일을 돕게 하였다.
나는 이를 위하여 다만 정리하는 것만을 담당하였는데, 예사로운 잘못을 줄이고 편차(編次)를 바꾸느라 여러 달이 지나서야 책이 완성되었다. 이미 어리석고 분수 에 넘침을 헤아리지 않고 책을 만들었으니, 또한 일이 진행되어온 경과에 대한 서술이 없을 수 없는 것이라 여기에 이 글을 쓴다.
숭정(崇禎) 기원 후 48년(1675) 숙종 원년 1월 하순 행(行)현감 고령(高靈) 신계징(申啓澄) 삼가 지음.
지리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다. 천하에는 천하의 지지(地誌)가 있고, 한 나라에는 한 나라의 지지(地誌)가 있으며, 한 고을에는 한 고을의 읍지(邑誌)가 있다. 땅이 있고 지지(地誌)가 없으면 산천의 형세와 인물의 성쇠 (盛衰)에 대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 포박자(抱朴子)4)가 말하기를, 연대(年代)에는 옛날과 오늘의 차이가 있으나 토지에는 옛날과 오늘의 다름이 없 는데, 어찌 우주에 만물의 원기(元氣)가 충만하여 있는 신묘(神妙)함을 보지 않았 을 것인가!
다만 한 원기가 처음 천지를 나눌 때부터 충만해 있는 정기(精氣)가 순환하여 어긋나지 아니하고, 오행(五行)의 맑고 아름다운 기운이 뒤섞여 어울려 일어나서, 천문(天文)과 지리(地理)가 가로·세로로 서로 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 운수(雲水)는 백제의 옛 영토였던 고현(古縣) 청웅(靑雄)으로서,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에 끼어 있어 가히 한 나라의 적을 방어하는 보루(堡壘)와 장벽이 될 만하다. 그 동쪽으로 말하면 고덕산과 성수산의 뾰족이 빼어난 봉우리들을 이끌 고, 그 서쪽으로 말하면 운암(雲岩)과 갈담강(葛潭江)의 깊고 맑은 물에 에워싸여, 폭과 둘레의 넓이가 100여 리이며, 방면(坊面)의 수가 18이다. 변경방어(관방:關防)의 견고함과 물산(物産)의 풍부함으로 볼 때, 참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한 땅이다.
현감 신계징(申啓澄)이 읍지를 편찬한 지 200여 년 뒤에 지사(志士)와 뛰어난 인물들의 선행(善行)과 기이한 행적, 효자·열녀의 충성스럽고 신실함이 남긴 미 풍(美風)과 전하는 운치(韻致)들은 아득히 멀어서 상고할 수가 없어 고을 사람들 이 탄식한 지 오래다. 임실군의 향교 유생 이정의(李廷儀)·한광석(韓光錫)은 문 학적 재능과 학식으로 온 고을에 그 명성이 청고(淸高)하였는데, 개연(慨然)히 기존의 읍지에 이어 읍지를 편찬하자는 논의를 하고 그 범례(凡例)와 격식(格式) 은 여러 고을의 읍지들을 널리 참고하며, 널리 모으고 두루 찾아서 중요한 핵심을 잘 파악하여 전혀 소홀히 하여 빠뜨림이 없었다. 또한, 시작(始)과 끝(終), 본(本) 과 말(末)이 정연하고 질서가 있어 마치 등불을 비추고 수량을 헤아리는 것과 같 이 처리가 명확하여 그릇됨이 없었다.
대체로 사람이 능히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뜻(목표)이 있기 때문이니, 머지않아 곧 그의 정력의 얕고 깊음을 세상에는 반드시 능히 알아보는 이가 있어 나머지 말을 기다리지 않고 신임하는 것이다. 천지(天地)는 무궁한데 인생은 100년의 한계가 있고, 게다가 시간은 풀잎 끝의 아침 이슬과 다름이 없는 순간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읍지를 보니 영원히 이름을 전하는 이 몇 사람이던가! 이를 전해주는 것은 기록이다. 내(泰一)가 이 읍지에서 느낀 바가 깊은지라, 결코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또한 감히 사양할 수도 없어서 마침내 붓을 들어 이 글을 쓴다.
고종(高宗) 41년(1904) 갑진년 12월 하순 남원인 참판 윤태일(尹泰一) 삼가 지음.
1) 운수지 구지(舊誌)는 숭정(崇禎) 후 48년(乙卯:1675)에 처음 편찬하였으니, 즉 강희(康熙) 14년의 일이다. 임실군수 신계징(申啓澄)이 고을의 선비 한필 상(韓必相)·이시연(李時然)과 함께 고대(遠代)의 유적들을 한데 모아서, 한 강(寒岡) 정구(鄭逑)가 함안(咸安)군수로 재직할 때 저술한 읍지의 규모와 절목(節目)을 모방하여 이 읍지를 완비하였으므로,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간행한다. 2) 산천(山川), 면리(面里), 형승(形勝)5), 물산(物産)을 소상하게 싣는다. 3) 성묘(聖廟)의 그림(圖式), 관사(館舍), 원우(院宇), 재안(宰案)6)을 차례로 기 록한다. 4) 충・신(忠・信), 절・의(節・義), 효・열(孝・烈) 및 선행(善行) 현행(見行)7)을 빠 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수록된 인물들을 한결 같이 옮겨 베끼고, 그 외에는 모두 수단(收單)8)과 유사단자(有司單子)에 따 라서 추가로 기입한다. 5) 문과(文科)・사마(司馬)・음사(蔭仕)・무과(武科)와 고적(古蹟)・역원(驛院)・ 정대(亭臺)・재각(齋閣)・불우(佛宇)를 낱낱이 기록한다. 6) 귀천(貴賤)과 대인(大人) 소인(小人)을 막론하고 선행(善行)과 덕행(德行)이 있는데 이를 알고도 기술하지 않으면, 원래 공평한 마음(公心)이 아니니, 유 사(有司)는 두루 수집하고 널리 찾아서 들은 바에 따라 모두 기록한다. 7) 구지(舊誌)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의 성명이 만일 신지(新誌)에 누락되면, 단 지 직무를 맡은 사람만을 책망할 뿐이 아니니, 공론이 있었던 것이 아니면 반드시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누락하였다는 탄식이 없게 할 것이다. 8) 만일 선행(善行)이 있으면 할아버지, 아들, 손자, 형, 아우, 아저씨, 조카라도 혐의치 않고, 구지(舊誌)에 의거하여 낱낱이 기록한다. 9) 연대가 뒤바뀌고 위아래(上下)가 뒤섞여서 그 순서가 잘못된 것이 많으면, 비록 자세히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구지의 예에 의거 하여 기록한다. 10) 최근에 덕행이 있는 사람들은 진필회(晉必檜)가 평생 동안 정교하게 베껴 모았으나, 이번에 모두 추가로 기록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을 끝내 기록하 지 못했으니 모두 애석한 일이다. 11) 구임실지는 원래 책을 간행하여 널리 유포(流布)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번에 간행하였는데, 몇백 년 뒤에 서로 뜻이 같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다시 간행 하면, 후인들이 오늘을 보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地之有誌古也遠則夏之禹貢周之職方近則 皇明一統志 國朝輿地勝覽是也1)然而綂會之書主於兼總諸方而不專於一方一邑自一方一邑言之則固多有遺落者此則宜爲有一方一邑者之責在所不巳也是以我東方爲州縣者徃徃備一境之事實以爲之志以傳之者余於辛亥春叨守是縣縣有善人遺蹟名宦餘躅而若無紀傳之書今猶有一二相傳者後此則並與之泯没無疑余於是慨然有意上年夏始事邑人有納咸州志者寒岡鄭先生宰咸安時所述也規模節目多遵是冊邑有韓生必相介士也善文筆山川古蹟先聚各面文狀使韓生撰次成篇又有李時然爲人精詳使助其役余爲之就加整理刪减凡累易帙累閱月而成旣不揆愚僣而爲之書則又不無顚末之敘於是乎書
崇禎紀後四十八年今 上元年乙卯正月下浣行縣監高靈申啓澄謹識
地之有誌其來舊矣天下則有天下之誌壹國則有一國之誌一邑則有一邑之誌而地而無誌山川之形勢人物之盛衰無以知其實矣於乎抱朴子曰年代有古今之異土地無古今之殊曷嘗觀于宇宙一氣坱軋之妙乎是自一元肇判兩儀磅礴之精巡環不忒五行淸淑之氣轇轕相發天文地理交結經緯惟玆雲水百濟舊疆靑雄古縣介在湖嶺之要衝可作邦國之保障以其東則控高德聖壽山之尖秀以其西則帶雲巌葛潭江之泓澄幅員之廣百餘里坊面之多十有八關防之壯物産之豊眞天府之地也自申候修誌二百餘年後志士高人懿行異跡孝烈忠信流風餘韻邈然靡考鄕人之茹歎久矣本郡齋儒李廷儀韓光錫文華學識爲一鄕望雅慨然有續集之議其凡例格式則愽考諸州所著傍搜曲採綱提領挈一無踈漏始終本末循循有序若燭照數計大柢人之所以能立世間者以其有志巳而此其精力之淺深世當有能識之者不待余言而後信也天地無窮而人生也有涯百年光陰無異草頭之朝露雖然觀此誌流名之不朽幾人耶傳之者書也泰一之於是誌所感湥矣果不得當又不敢辭遂染翰而爲之書
上之四十一年甲辰臘月下澣南原人參判尹泰一謹識
1. 舊誌始於崇禎後四十八年乙卯卽康熙十四39)年也郡宰申啓澄與鄕儒韓必相李時然類聚遠代遺跡而依放鄭寒岡宰咸安時所述邑誌規模節目備具此誌故依舊例刊行 1. 山川面里形勝物産昭詳載錄 1. 聖廟圖式館舍院宇宰案次第記蹟 1. 忠信節義孝烈及善行見行勿爲遺漏而湖南三綱錄人一例抄出其外一從收單有司單子加錄 1. 文科司馬蔭仕武科與古蹟驛院亭臺齋閣佛宇壹一懸錄 1. 無論貴賤大小人民雖有一善一行聞而不述則本非公心故有司曲採傍探隨所聞盡錄 1. 舊誌入錄之人姓名若漏新誌則非但任事者咎責非公議之攸在故費盡心力俾無遺漏之嘆 1. 如有善行則不嬚祖子孫兄弟叔侄依舊誌一一入錄 1. 年代倒錯上下混雜失其次序者多雖未免不察之責然依舊誌例隨錄 1. 挽近有實行之人晉必檜平生精工抄集今不必加錄而其人未克終始切爲可惜事 1. 舊誌本無鋟梓傳布故今爲刊行而幾百年後同志之人嗣而復刊則後之視今猶今之視昔
1) 서경(書經)하서(夏書)의 편명(篇名)인데 중국을 9주(州)로 나누어 교통, 지리, 산물 및 공부(貢賦)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2) 지방의 장관으로 9주(州)의 지도를 관장하고 지방에서 들어오는 공물을 다루었다. 3) 중국 전역의 지리서(地理書) 4) 진(晉)나라 사람 갈홍(葛洪)의 호(號)이다. 5) 산천의 빼어난 경치와 요충지(要衝地). 6) 선생안(先生案) 즉 임실현감을 말한다. 7) 드러난 행실. 8) 거두어들인 명단(名單).
39) ‘三’자를 ‘四’자로 바로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