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石佛) 현(縣)의 치소(治所) 동편 6리쯤에 석불을 세워 그 앞에 둘러 있게 하고, 또 연못을 파서 고달산(高達山)을 압도(壓倒)하게 하였다. 지금은 그 터가 모두 논밭이 되어있고 다만 석불만이 있을 뿐이다.
동우원(東隅院) 현(縣)의 치소(治所) 동편 6리쯤에 있었는데 지금은 빈 터만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성가괴림(城街槐林) 이것은 옛날에 풍수(風水)상의 허(虛)한 곳을 보비(補裨)하기 위하여 숲을 기른 것인데, 지금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5그루가 있다.
관서당(官書堂) 동면(東面) 유포리(柳浦里)에 있었는데 현감 김천일(金千鎰:1537~1593)이 부임 할 때, 온 경내에 학문을 제창하고 이곳에 서당을 세우고, 김제(金堤)에서 문인(文人) 아무(某)를 초청하여 관청에서 월급을 지급하였다. 다른 고장에서 학도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본고장 사람으로는 설형(薛衡)・노충민(魯忠民)・정광지(鄭廣智)・김관(金琯)・안수인(安壽仁) 등이 모두 학문을 이루었으므로 노충민으로 학장 (學長)을 삼았으나, 천계(天啓) 병인년(1626) 간에 학장이 없어서 서당이 폐지되 었다. 당초에 기와집 10여간(間)에 공전(公田) 10여 두락(斗落)과 가마솥 세발솥 등의 물건까지도 나누어 주었는데, 지금은 빈 터만 있다.
취인현(醉仁縣) 동면(東面) 유포리(柳浦里)에 있었으며, 그 남쪽에 사직단(社稷壇)과 사창(司倉)・형옥(刑獄)의 터가 있는데, 어느 시기에 설치되었다가 어느 시기에 폐지되었 는지 알 수 없다. 참판 윤태일(尹泰一)이 태어난 옛 터전인 까닭에 감격하여 다음 과 같은 절구를 읊었다.
고을 이름을 취인(醉仁)이라 하였으니, 틀림없이 어진 이 나올 걸세. 산과 물은 깨끗하고 맑으며, 길과 마을은 모두 균등하네. 건재(健齋) 김천일 원님이, 서당을 처음 새롭게 열어, 유림(儒林)들 매우 무성하고, 문학(文學) 또한 아름답고 성하니, 보낸 세월이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유적을 살필 만하다.
성 산(城 山) 동면(東面) 성저리(城底里) 뒷산에 있는데, 산 위에 옛성[古城]이 있고, 둘레는 2리에 지나지 않으며, 성의 높이도 한 길에 불과하다. 성 안에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고 전하는데, 이 성은 삼한(三韓) 때에 창건한 것으로 곡물을 저장했었다고 한다.
주 천(酒 泉) 남면(南面) 주천리(酒泉里) 남쪽 시내에 있는데, 시냇가에 외따로 작은 산이 있고, 그 곁에 반석(盤石)이 있다. 반석 가운데 절구와 같은 곳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이곳에서 술이 저절로 솟아나와서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한 잔씩을 한도로 마셨다고 한다. 한 스님이 한 잔을 마시고 곧 목이 말랐던 까닭에 술[酒]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세교(萬歲橋) 두치(斗峙)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고 다만 터만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수기석(樹旗石) 남면(南面) 만동(蔓洞)의 황폐한 마을의 남쪽 언덕에 있는데, 위에 돌을 뚫은 구멍이 있었으므로, 병사(兵使) 임정(林挺)이 기(旗)를 세웠던 돌이다. 지금은 빈 터만 있으며, 그 서쪽으로 사정(射亭)이 있다.
평당서당(坪塘書堂) 남면(南面) 평당(坪塘)마을 뒤에 있는데 작은 산기슭이 빙 둘러싸고 있다. 옛 우물이 폐지된 지가 겨우 8~9년 된다.
견잠암석교(見岑巖石橋) 현(縣)의 치소(治所)에서 20리 거리에 있었는데 고(故) 처사(處士) 장돌(張乭) 공이 만든 것이며, 지금은 다리로 이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용암서당(龍菴書堂) 구고(九臯)면 선압동(仙鴨洞) 어귀 위쪽에 반석이 있는데, 반석 위에 서재가 있었으며, 이름은 관서당(官書堂)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현감 김천일(金千鎰)이 부임할 때 관서당이 동・서로 있었는데, 이 서당과 동면(東面)의 유포리(柳浦里) 서당을 동시에 창립했다고 한다. 위전(位田)과 위답(位畓)은 지금 학정서원 (鶴亭書院)에 소속되어 있다.
명동서당(椧洞書堂) 옥전면(玉田面) 가전리(柯田里)에 있었으며, 고(故) 목사 홍석방(洪碩舫)이 건립한 것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문덕동서당(文德洞書堂) 강진면(江津面) 속필봉(束筆峯) 동편에 있었다. 운학(雲壑) 조평(趙平)과 진사 (進士) 이두연(李斗然)・박신길(朴信吉) 세 사람이 세운 것인데, 지금은 없다.
둔탄서재(屯灘書齋) 하운면(下雲面) 둔탄리(屯灘里)의 이사간(李司諫)의 집 앞에 있었다. 고(故) 참 봉 유진석(柳震錫)이 우거(寓居)할 때에 세운 것이며,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선생의 현손이 담양(潭陽)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우거하다가 다시 태인(泰仁)으로 이사하였다.
귀암서재(龜岩書齋) 신덕면(新德面) 정각산(正角山) 아래에 있었는데, 고(故) 진사 김신추(金愼樞)가 우거(寓居)하면서 세운 것이다. 정각산초당가(正角山草堂歌)가 있다.
남애서재(南涯書齋) 신평면(新平面) 창인평(昌仁坪)에 있었는데, 만류당(萬流堂) 이득환(李得寏)이 창건한 것이다.
두직고을(杜直邑) 덕치면(德峙面) 두지동(斗之洞)에 있었는데, 전해오기를, 옛날에 현(縣)의 학교와 옥사(獄舍)가 있었다고 하며, 빈 터가 지금도 있다.
오괴정(五槐亭) 남면(南面) 주천리(酒泉里)에 있는데, 이곳에 우거하던 한순(韓純)이 세운 것이다. 폭포대(瀑㳍臺)가 같은 마을에 있는데 한순(韓純)이 지은 것이다.
원잠서재(元岑書齋) 남면(南面) 원잠사(元岑寺) 옛터에 있는데, 한(韓)・곽(郭) 두 집안에서 건축한 것이다.
평당송정(坪塘松亭) 남면(南面) 평당리(坪塘里) 냇가에 있는데, 고(故) 선비 김치(金致)가 이 마을의 터를 닦을 때에, 부안 변산의 소나무를 가져다가 세운 것이다.
대 정(大 亭) 신안면(新安面) 대정리(大亭里)에 있는데, 옛날 판서 오황(吳況)이 세운 것이다.
낙천정(樂天亭) 신안면(新安面) 낙천리(樂天里)에 있는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경여(韓慶餘)가 세운 것이다.
은행정(銀杏亭) 구고면(九臯面) 양지서원(陽地書院) 아래에 있는데, 인덕정(仁德亭) 선생이 살던 곳이며 그 크기는 세 아름쯤 된다.
명학정(鳴鶴亭) 구고리(九臯里)마을 북쪽에 있었다. 이종원(李宗元)이 서울로부터 와서 우거 (寓居)하면서 세운 것인데, 지금은 늙은 느티나무 몇 그루가 있다.
관가정(觀稼亭) 신평면(新平面) 마항(馬項) 벌판 위에 있었는데, 학록(學錄) 정설(鄭渫)의 누정 (樓亭)이며, 지금은 빈 터만 남아있다.
시담정(侍潭亭) 덕치면(德峙面) 회문(回文)산 아래에 있었으며, 충의(忠義) 한응빙(韓應聘)의 누정(樓亭)이었는데, 지금은 빈 터만 남아있다.
石佛 在縣東六里許立石佛回坐其前又鑿池以壓高達山今基地皆爲田庄只有石佛
東隅院 在縣東六里許今有遺地載勝覽
城街槐林 卽古補虛長藪今有連抱老槐五株
官書堂 在東面柳浦里金候千鎰莅任時倡學一境創建書堂於此邀致金堤文士某官給廪料他官學徒多聚而本里薛衡・魯忠民・鄭廣智・金琯・安壽仁䒭皆成就魯忠民因爲學長天啓丙寅間以無學長因廢焉當初瓦家十餘間劃給屬公田庄十餘斗落釜子食鼎等物今有遺址
醉 160)仁縣 在東面柳浦里南有社稷壇司倉刑獄基未知何代興廢尹參判泰一桑弧舊基故感而吟四絶曰縣名醉161)仁必出賢人山水淸淑道里平均健齋金候書堂剙新儒林濟濟文學彬彬年過數百遺跡可詢
城山 在東面城底里後峯上有古城周回不過二里城高不過一丈中有古井傳云三韓時所剙以藏穀物云
酒泉令 南面酒泉里南澗邊有獨山傍有盤石石中如臼諺云古時有酒自涌過者各飮一杯爲限有一僧飮一杯卽自渴故因名以酒
萬歲橋 在斗峙下今廢只有基地載勝覽
樹旗石 在南面蔓洞廢里南岸上有石穿穴故林兵使挺所樹旗石也今有遺地西有射亭
坪 162)塘書堂 在坪塘村後小麓環繞今古井廢才八九年
見岑巖石橋 在縣二十里故居士張乭公所造今廢行
龍菴書堂 在九皐仙鴨洞口上有盤石石上有書齋名稱官書堂人言金候千鎰莅任時官書堂在東西此與柳浦里同時創立云位田庄今屬鶴亭院
椧洞書堂 在玉田柯田里故牧使洪碩舫所建今廢有基
文德洞書堂 在江津面束筆峯東趙雲壑平李進士斗然朴信吉三人所建今廢
屯灘書齋 在下雲面屯灘里李司諫家前故參奉柳震錫寓居時所建柳公卽眉巖先生玄孫自潭陽寓居此又移去泰仁
龜岩書齋 在新德正角山下故進士金愼樞寓居所建有正角山草堂歌
南涯書齋 在新平昌 163)仁坪李萬流得寏所剏
杜直邑 德峙斗之洞傳云古有縣校獄遺址尙存
五槐亭 在南面酒泉里寓居韓純所植瀑布臺在同里同人所築
元岑書齋 在南面元岑寺古地韓郭二家所創
坪164)塘165)松亭 在南面坪166)塘里川邊故士人金致 開基本里時取扶安邊山松所植
大亭 在新安大亭里古判書吳况所植
樂天亭 在新安樂天里中僉知韓慶餘所植
銀杏亭 在九皐陽地書院下仁德亭先生所居處其大三圍
鳴鶴亭 在九皐村北李宗元自京來寓居所植今有老槐數株
觀稼亭 在新平馬項原上學錄鄭渫亭今有遺基
侍潭亭 在德峙回文山下忠義韓應聘亭今有遺址
160) ‘就’자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여 역자가 ‘醉’로 바로잡았다. 161) ‘就’자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여 역자가 ‘醉’로 바로잡았다. 162) ‘平’자를 역자가 ‘坪’으로 바로잡았다. 163) ‘倡’자를 역자가 ‘昌’자로 바로잡았다. 164) ‘平’자를 역자가 ‘坪’으로 바로잡았다. 165) ‘唐’자를 역자가 ‘塘’으로 바로잡았다. 166) ‘平’자를 역자가 ‘坪’으로 바로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