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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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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중에서 뽑아 적었으며, 그 밖에는 모두 유사(有司)가 수집한 단자(單子)에 따랐다. / 1) 충절편(忠節篇) * / 박순달(朴順達) /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군자감(軍資監) 참봉벼슬을 지냈는데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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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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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4) 선행편(善行篇) / 이 선행편은 삼강록(三綱錄)과 그 밖의 충(忠)・효(孝)・학행(學行)을 겸비한 사람 들을 모두 유사(有司) 이정의(李廷儀)가 작성한 단자(單子)에 따라 기록해 넣었다. / 조 평(趙 平)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충의(忠義)와 효행(孝行)으 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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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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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1) 운수관(雲水館) / 봉황산 아래에 서북쪽을 뒤로하고 동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산을 등지고 시냇물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융경(隆慶) 3년(己巳:1569) 현감 성인(成訒) 때에 불타서 만력(萬曆) 37년(己酉:1609)에 현감 김두남(金斗南)이 중창(重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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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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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박명생(朴命生) 벼슬이 배장(陪將)에 이르렀다. / 오 성(吳 誠) 해남현감 변하(變夏)의 현손이고 정로장군(征虜將軍) 세원(世元)의 아들이다. (절의(節義)편을 보라.) / 곽흥무(郭興懋) 만력(萬曆) 계사년(159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절의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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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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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석불(石佛) / 현(縣)의 치소(治所) 동편 6리쯤에 석불을 세워 그 앞에 둘러 있게 하고, 또 연못을 파서 고달산(高達山)을 압도(壓倒)하게 하였다. 지금은 그 터가 모두 논밭이 되어있고 다만 석불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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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박 평(朴 枰) /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경태(景泰) 신미년(1451)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관직(官職)은 6품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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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이사겸(李思謙) 을축년(연산군11, 1505) 2월 도임(到任) / 이극문(李克文) 경오년(중종 5, 1510) 10월 도임 / 권 보(權 輔) 임신년(중종 7, 1512) 3월 도임 / 정세광(丁世光) 임신년(중종 7, 1512) 6월 도임 / 조방보(趙邦輔) 병자년(중종 11, 1516) 3월 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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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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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사직단(社稷壇) : 봉황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 위에 현의 치소(治所)에서 1리 쯤 되는 곳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치소는 서쪽 2리에 있다고 하였 는데, 언제 이곳으로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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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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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임실 향교 대성전 / 현의 치소(縣治)의 북쪽 1리 지점에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치(縣治)의 서쪽 1리에 있다고 하였다. / ∙ 교궁성현열위(校宮聖賢列位) /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연국복성공안자휘회(兗國復聖公顔子諱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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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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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사직단(社稷壇) : 봉황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 위에 현의 치소(治所)에서 1리 쯤 되는 곳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치소는 서쪽 2리에 있다고 하였 는데, 언제 이곳으로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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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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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1) 운수관(雲水館) / 봉황산 아래에 서북쪽을 뒤로하고 동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산을 등지고 시냇물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융경(隆慶) 3년(己巳:1569) 현감 성인(成訒) 때에 불타서 만력(萬曆) 37년(己酉:1609)에 현감 김두남(金斗南)이 중창(重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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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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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서울은 임실군에서 북쪽으로 거리가 582리요, 감영(監營)은 북쪽으로 70리 거리 이며, 병영(兵營)은 남쪽으로 강진(康津)에 있다. 좌수영(左水營)은 남쪽으로 순 천(順天)에 있고, 우수영(右水營)은 서쪽으로 해남(海南)에 있으며, 총영(總營)은 동쪽으로 영남의 고성(固城)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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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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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수암당(守巖堂) / 신안면(新安面) 연화리(蓮花里)에 있으며, 선비 오정엽(吳廷曄)의 누정(樓亭)이다.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渤)의 기문(記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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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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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ㄱ) 가정재(可貞齋) 331 / 가지사(伽智寺) 334 / 갈담원(葛潭院) 337 / 갈홍사(葛洪寺) 336 / 강 정(江 亭) 327 / 객사(客舍) 34, 37, 45, 329, 338 / 견잠암석교(見岑巖石橋)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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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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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운수지(雲水誌)발문(跋文) / 지리(地理)에 관한 기록(誌)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니 멀리는 하(夏)나라 때의 우공(禹貢)1)과 주(周)나라 때의 직방(職方)이 그것이며, 가까이는 명(明)나라의 일통지(一統志)와 우리 조선왕조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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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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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갈담원(葛潭院) / 현의 치소(治所) 서쪽 40리 지점인 강진(江津)에 있었으며, 이규보(李奎報:1186~1241)・김극기(金克己)의 시가(詩歌) 현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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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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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상이암(上耳菴) / 현(縣)의 치소(治所)로부터 동으로 50 리 거리인 성수산(聖壽山) 가운데 옛날 부터 사찰이 있었는데 여신(餘神)스님이 창건하였다. 현감 조성희(趙性憙)와 참 찬 윤태일(尹泰一)이 중수(重修)한 기문(記文) 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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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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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석불(石佛) / 현(縣)의 치소(治所) 동편 6리쯤에 석불을 세워 그 앞에 둘러 있게 하고, 또 연못을 파서 고달산(高達山)을 압도(壓倒)하게 하였다. 지금은 그 터가 모두 논밭이 되어있고 다만 석불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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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박명생(朴命生) 벼슬이 배장(陪將)에 이르렀다. / 오 성(吳 誠) 해남현감 변하(變夏)의 현손이고 정로장군(征虜將軍) 세원(世元)의 아들이다. (절의(節義)편을 보라.) / 곽흥무(郭興懋) 만력(萬曆) 계사년(159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절의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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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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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송경원(宋慶元)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호(號)는 둔학(遯壑)이다. 의금부도사로서 임실에 와서 우거(寓居)하였다. / 정세겸(鄭世謙)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도사(都事) 신분으로 와서 우거하였다. / 박 정(朴 楨)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벼슬은 고창(高敞)현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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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박 평(朴 枰) /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경태(景泰) 신미년(1451)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관직(官職)은 6품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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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4) 선행편(善行篇) / 이 선행편은 삼강록(三綱錄)과 그 밖의 충(忠)・효(孝)・학행(學行)을 겸비한 사람 들을 모두 유사(有司) 이정의(李廷儀)가 작성한 단자(單子)에 따라 기록해 넣었다. / 조 평(趙 平)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충의(忠義)와 효행(孝行)으 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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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중에서 뽑아 적었으며, 그 밖에는 모두 유사(有司)가 수집한 단자(單子)에 따랐다. / 1) 충절편(忠節篇) * / 박순달(朴順達) /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군자감(軍資監) 참봉벼슬을 지냈는데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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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1) 임관(任官)19)의 거사비 / 김천일(金千鎰) 유희진(柳希津) 원 탁(元 鐸) 이여벽(李如璧) 허 박(許 博) 윤복원(尹復元) 조진석(趙晉錫) 민 윤(閔 昀) 권 억(權 億) 최천서(崔天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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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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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이사겸(李思謙) 을축년(연산군11, 1505) 2월 도임(到任) / 이극문(李克文) 경오년(중종 5, 1510) 10월 도임 / 권 보(權 輔) 임신년(중종 7, 1512) 3월 도임 / 정세광(丁世光) 임신년(중종 7, 1512) 6월 도임 / 조방보(趙邦輔) 병자년(중종 11, 1516) 3월 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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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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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1) 학정서원(鶴亭書院) / 구고면(九臯面) 원동(院洞)에 있었는데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철거되었다. / 배향(配享) 인물은 아래와 같다. / ∙ 극념당(克念堂) 김천일(金千鎰) 선생 / ∙ 인덕정(仁德亭) 박번(朴蕃)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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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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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우리 고장 임실은 완산(完山)과 남원(南原) 사이에 끼어 있어서, 산천의 뛰어난 경치와 좋은 풍토(風土)가 낸 훌륭한 인물들이 아주 많았는데, 쉽게 없어지고 전하 여지지 않으니 어찌 그것이 우리들 후생(後生)들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현감(縣監) 신계징(申啓澄)이 처음으로 훼손되어 완전하지 못한 운수지(雲水誌) 에 발문(跋文)을 쓰고 기록하여 이것 만으로도 족히 전체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나 또한 개연(慨然)히 여기에 뜻을 둔 지 이미 여러 해인데, 대감(大監) 윤태일(尹泰一)은 본래 문장에 능하고, 재주와 학문을 간직하여 옛날과 오늘의 것을 널리 배우고 익히었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선(善)한 행실들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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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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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박수림(朴秀林) 구고면(九臯面) 평지리(平地里) 사람이다. / 박현동(朴玄童) 평(枰)의 아들로서 벼슬이 5품에 이르렀다. / 박맹호(朴孟豪)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기림(起林)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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