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증좌참찬(贈左參贊) 김기(金璣) 신도비문(神道碑文)
우의정(右議政) 성세창(成世昌) 찬(撰)
공의 휘(諱)는 기(璣)요, 자는 기지(璣之)이며, 성은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사실 그는 신라(新羅)의 후예(後裔)인데 휘 인위(因渭)는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가 여계(麗季)에 이르렀고 휘 지윤(智允)은 충훈량절찬 화공신(忠勳亮節贊化功臣) 자헌대부참지문화부사동판도평의사사사(資憲大夫參知門下府事同判都評議使司事)가 주었으며 이분이 휘 균익(稛翊)을 낳으셨다. 균익(稛翊)은 조선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이 숭록대부(崇祿大夫) 계림군(鷄林君)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로 제숙(齊肅)이 주어졌으며, 이분 이 곧 공(公)의 고조(高祖)이시다. 제숙공이 휘 중성(仲誠)을 낳았는데 중성(仲誠)은 자헌대부가 주어졌으며 병조판서 행 통정대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하였으며 판서 휘 신민(新民)을 낳으셨다. 신민은 자헌대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역임하시고 지중추 휘 태경(泰卿)을 낳으셨다. 태경은 숭록대부가 주 어졌는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통훈대부(通訓大夫)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역임하였으며 헌능직(獻陵直) 변조(卞釣)의 딸 과 결혼하였는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휘 효문의(孝文)의 손녀로 정경부인 (貞敬夫人)이 주어졌다.
천순(天順) 갑신년(甲申年) 8월 계묘(癸卯)에 공을 낳으셨는데 공께서 태어나니 재덕(才德)이 남보다 뛰어나고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 게을리하지 않았고 경자사서(經子史書)를 모두 섭렵하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급제하지 못하더니 정덕(正德) 신미년(辛未年)에 문음(門蔭)으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보임(補任)되었다. 병자년(丙子年) 봄에는 벼슬 이 올라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배수(拜授)하였으며 이해 겨울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보임되어 나갔다. 그 뒤 여러 차례 통례원인의(通禮阮引儀)와 조지 서사지(造紙署司紙)를 역임하였다.
신사년(辛巳年) 가을에는 예안현감(禮安縣監)에 보임되어 나아갔다가 잠깐 진 안현감(鎭安縣監)으로 있었다. 가정(嘉靖) 병술년(丙戌年) 벼슬이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으로 바뀌었다. 정해년(丁亥年) 9월 초3일 질병으로 죽었는데 향년(享年)이 64세였다. 이해 12월 전라도 남원부 북면(北面) 말천리(末川里)의 원(原) 즉 부인 주씨(周氏)가 묻혀있는 지역이다. 의정부 좌참찬이 주어졌는데 지중추공 (知中樞公)의 질책(秩冊)한 것에서 볼 수 있다.
공은 진솔(眞率)하고 강직(剛直)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 안빈(安貧)하는 가운데에도 고요함을 지켜 생산하는 업(業)의 일을 하지 아니하였고 살고 있는 곳에서는 드물게 담박하여 평생 동안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다. 벼슬 에 있을 때에는 백성의 자리에 나가 추호도 범법을 하지 않았으며 세 번 현감을 하였지만 모두 실제로 은혜를 베풀었다.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겉으로 드러내지를 않았다. 귀한 권세의 문에 이르지를 못했어도 만족해 하였다. 어떤 사람처럼 만족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단지 술잔을 기울이며 스스로를 보낼 뿐이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으로 주씨(周氏)인데 본적(本籍)이 영광(靈光)이고 사헌 부감찰(司憲府監察) 명창(命昌)의 딸이다. 공(公)보다 앞에 죽었다. 2남 1녀를 낳 았다. 장남은 인손(麟孫)이라 하는데 신유년(辛酉年) 사마시(司馬試)에 들었다가 기사년(己巳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 예 (禮) 병(兵) 형(刑) 공(工)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가 되었다. 둘째 아들은 귀손(龜孫)이라 하는데 현신교위(顯信校尉)이었으나 공 의 앞에 죽었다. 딸은 선무랑(宣務郞) 양구수(梁龜壽)에게 시집갔다.
지중추는 먼저 영흥부판관(永興府判官) 심광필(沈光弼)의 딸과 혼인하여 2남 을 낳았고 후취(後娶) 돈영부첨정(敦寧府僉正) 민계증(閔季曾)의 딸인데 2남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으니 이에 귀 손의 제3자 수걸(秀傑)로 뒤를 삼았다. 교위는 양지현감(陽智縣監) 정여즙(丁汝즙)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사걸(士傑)이라 하며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가 되었다. 차남은 준걸(俊傑)이라 하는데 광주판관(光州判官)이 되었다. 3남은 수걸(秀傑)이라 하는데 와서별좌(瓦署別坐)가 되었다. 4남은 방걸(邦傑)이라 한다. 장녀는 생원(生員) 한복(韓輹)에 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유학(幼學) 이원복(李元復)에게 시집갔다. 선무랑은 1남을 낳았는데 홍제(弘濟)라 하였으며 젊어 지중추공과 함께 세상에 드러났고 신유년 (辛酉年) 같은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도 같은 벼슬에 올라 경대부(卿大夫)가 되었 다.
평생 동안 정당한 도리(道理)를 지키니 문자(文字)와 글(書)로는 어려움이 있으 며 먼저 그에 대한 덕행(德行)을 논구하였으나 문장이 졸렬(拙劣)하고 말로 가능 치 못함이라. 명(銘)하여 이르기를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한 것은 근원이 멀고 길게 흐르는 데서이라. 쌓여진 덕(德)과 베푼 경사스러움은 천리(天理)를 몹시 들어 낸 데서 이니 오히려 금보다도 더 빛나리. 신라의 임금으로부터 나와 이어서 공경(公卿)이 되었으니 실로 번창할 것이로다. 우리 공께서의 빼어난 삶은 덕의 베풂이 미치지 아니한 바가 없고 은혜로움을 삼읍(三邑)에 남겼도다. 계책을 두 어린이에게 주었으니 천장(天將)이 크게 보답하였네. 녹봉(祿奉)을 기약 없이 받 았으니 영예로움이 무덤에까지 미치네. 봉작(封爵)을 주어 소수(昭垂)라 하니 귀 신에게 갚음도 상할 것이 없도다. 사람의 이치로 가히 추론해 곧은 돌에 나는 새기 노라. 영원토록 어그러짐이 없기를.
2. 고려(高麗) 시중(侍中) 이능간(李凌幹)의 사적(事蹟)
이상길 정려각
이능간(李凌幹)은 남원 거녕현(居寧縣) 사람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총 애(寵愛)한 바 두 여인을 능간과 백문거(白文擧)에게 주었는데 오직 능간은 별실 (別室)에 두고 임금의 뜻인데도 감히 가까이하지 않았다. 또한 임금을 따라 원(元) 나라에 있을 때 반려별감(盤膂別監)으로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치부(致富)를 하였지만 능간만은 괴로움을 스스로 참고 청백(淸白)하게 살려고 노력하여 겨울날에도 찢어진 저고리에 홑 바지를 입고 지냈다. 사사로운 돈 이 한 푼도 없었지만 임금이 토번 (吐蕃)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능 간은 역졸(驛卒)에게 부탁하여 금 을 품고 몰래 들어가 임금에게 주 니 임금과 임금을 호종(扈從)하는 신하들이 이에 힘입어 궁핍하지 않았다. 임금이 훙서(薨逝)하자 재궁(梓宮)을 받들어 귀국하였는데 임금을 부르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다.
그는 애를 써가며 부지런히 일을 하여 지성으로 준비를 하니 충숙왕(忠肅王) 때 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지 직사사우상시(知密直司事右常侍)로 천거되 었다. 원(元)나라가 일찍이 고려에 성(省)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능간은 김흡(金恰) 전영보(全英甫) 등과 더불어 원제(元帝)에게 주청(奏請)하고 협의(協議)하여 마침내 잠재우니 1등 공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부모와 처자(妻子)에게도 작위(爵位)를 주고 논과 밭도 내려 주었다. 그는 뒤에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 다가 첨의참리(僉議參里)에 올랐다. 정승(政丞)에 배수되었다가 조적(曺頔)의 난 (亂) 때 충혜왕(忠惠王)을 시종(侍從)한 공으로 1등 공신에 녹훈되어 철권(鐵卷) 이 주어졌다. 얼마 안 있다가 영천부원권(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임금이 원나 라에 순종치 않았다는 트집을 잡으니 재상(宰相)과 나라 원로(元老)들이 협의하 여 임금의 죄를 사면(赦免)해 주도록 원(元)나라에 글을 보내 주청하고자 하였는 데 능간이 이르기를 ‘천자(天子)께서 우리 임금께서 무도(無道)하시다고 들은 것 같아 그것으로 죄를 지었다고 하여 만일 위로 보내는 글을 논하여 주청한다면 이는 천자의 명령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지 아니한가?’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 좌정승(左政丞)과 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가 되었다가 동 왕 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하였다가 죽었다. 벼슬이란 죽음으로 써 다스리는 일인가.
3. 현령(縣令) 임옥산(林玉山) 정려기(旌閭記)
이 사람의 휘(諱)는 옥산(玉山)이고 자(字)는 인보(仁甫)이며, 호는 국헌(菊軒) 이다. 본관은 조양(兆陽)이며, 증조(曾祖) 할(劼)은 통정대부 행예조참의(行禮曹參議)를 하였다. 조(祖) 각(恪)은 선교랑(宣敎郞) 행흥덕현감(行興德縣監)을 하 였으며, 아버지 사망(士網)은 통선랑(通善郞) 행곡성훈도(行谷城訓導)를 하였다. 어머니 고씨(高氏)는 정혜공(貞惠公) 순(淳)의 따님이시다.
대명(大明) 선종(宣宗) 7년 본조(本朝) 세조(世祖) 14년 임자(壬子)에 이곳 남 원부의 북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심(孝心)이 순수(純粹)하고 지순(至順) 하였으며 성품이 뛰어나 평생 부모님을 섬김에 그 도(道)를 극진히 하였고 정성 (定省)의 예(禮)와 유완(愉惋)의 절도(節度)와 충양(忠養)의 정성이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신미년(辛未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으며 병자 년(丙子年) 무과(武科) 제3등으로 급제하여 곧 선전관(宣傳官) 겸비변랑(兼備邊郞)이 되었다. 계미년(癸未年)에 훈련주부(訓練主簿)로 옮겼으며 효행이 임금에 게 전달되어 그 여(閭)가 정(旌)으로 나타났으며 몇 척의 돌에 새겨 세웠다. 병술 년(丙戌年)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애통하다가 몸을 해치기도 하였으며 상 제(喪制)를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라 치렀다. 친히 스스로 흙을 짊어다가 무덤을 지었고 여묘(廬墓)를 할 때에는 죽만을 먹었다.
복제(服制)의 기한(期限)을 마친 뒤에는 가묘(家廟)를 세웠다. 아버지를 섬김에 효성(孝誠)을 다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할 때에는 몸소 가지고 공양을 하였다. 하루라도 뜰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마치 삼추(三秋)와 같았으며 벼슬을 구하지도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효행을 가상(嘉狀)히 여겨 특별히 천거토록 하여 도총도사(都總都事)를 제수하였다. 그는 벼슬에 있으면서 반듯이 그의 효성을 하는 데 부지런히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귀가(歸家)하여 아버지를 봉양 코자 임금에게 진정(陳情)하니 주상(主上)께서는 그의 효행을 기쁘게 생각하고 특별히 그에게 장수현감(長水縣監)을 제수하였다. 그는 청백리(淸白吏)로서도 이 름이 드러났는데 부역(賦役)을 가볍고 얕게 하게 하여 주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 여 정치의 효과를 당시에 가장 잘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읍의 주민들이 그의 선정 (善政)을 잊지 못하여 그 액판(額板)을 걸기도 하였다.
벼슬에 6년 동안 있으면서 장수현(長水縣)과 오산(鰲山)의 40리 밖에 나가지 않았고 정성(定省)의 예를 하루도 헛되이 하지를 않았으며 한 필의 말[馬]과 한 명의 노복(奴僕)을 데리고 날이 저물면 귀가(歸家)하고 날이 새면 출근을 하였다. 혹 별이 없거나 달이 없는 밤이면 귀신(鬼神)이 불을 밝혀 길을 인도(引導)하고 폭풍(暴風)과 비(雨)나 눈이 올 때면 천지(天地)가 자연히 거치기도 하였다. 읍 (邑)의 이속(吏屬)이나 관노(官奴)들이 그가 새벽과 저녁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신해년(辛亥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거상(居喪)의 예(禮)를 옛날 어머니 때 와 같이 하였으며 복상(服喪) 기간을 마친 뒤에는 아침저녁으로 가묘(家廟)를 참 배하고 바깥출입을 할 때에는 반듯이 가묘에 고하며 부모님께서 이미 돌아가셨지 만 살아계실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벼슬에는 절대로 관심이 없었고 오산(鰲山)에 높이 누워 입신출세(立身出世)를 구하지 않은 채 삶을 마치고자 하였다. 병진년(丙辰年) 임금께서 특별히 그에게 능주현령(綾州縣令)을 제수하였는데 역 시 그는 청백리(淸白吏)로서 제일로 부르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액판을 걸 었다. 임술년(壬戌年) 조총부경력(都總府經歷)에 제수되어 자리를 옮겨야 하였 으나 사임(辭任)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 해 가을 7월 16일 임신(壬申)에 병환으로 집에서 삶을 마치니 향년 71세이었으며 다음 해 5월 초 2일 임인(壬寅)에 아산(阿山) 선영(先靈)의 앞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오호라! 그의 평생은 효성(孝誠)으로 일관하였으니 무릇 혈기(血氣)가 있다면 경앙(景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하늘도 감동하고 귀신도 도와주었다. 하늘 이 은연중에 그의 효행을 보고 복(福)을 내려줄 것이라. 그는 인륜(人倫)으로 서로 돕게하고 윤리(倫理)를 주민들에게 북돋우고 기르게 하니 지금이나 옛날을 꿰뚫 어서 앞으로 오는 세상을 밝게 하였도다. 벼슬에 있으면서 주민들의 다스림을 진 충(盡忠)과 청간(淸簡)으로 하니 여러 군(郡)의 벼슬을 역임할 수 있었다. 집 안에 세간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절개(節介)가 지나칠 정도로 확실하였지만 성 격이 원만하여 모남이 없었고 옛 사람의 풍모(風貌)가 있었다. 가산(家産)이나 일을 다스리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풍경을 걸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편안하게 지냈다. 소위 부귀(富貴)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빈천(貧賤)이 떠나지를 않았 다. 무인은 종묘 승(宗廟丞) 유익홍(柳益洪)의 따님이다.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 는데 아들은 계일(桂一), 계을(桂乙), 계상(桂祥)이고 딸은 유문손(柳文孫)과 안 기(安璣)에게 시집보냈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태어나 이 세상에 옛 도(道)를 행하여 충효(忠孝)를 이행 (移行)케 함이여. 충(忠)은 효(孝)로 말미암음이라. 그대의 덕(德)이여! 그대의 업 (業)이여! 가난함은 청렴을 가능케 하였고 나약함은 오히려 서[立]게 하였도다. 그대의 이름은 영원히 소멸(消滅)하지 않을 것이라. 돌 역시 계속 세워져 있을 것이라. 몸은 비록 죽었지만 이름은 오히려 오래도록 전할 것이다.’
4. 천장도독(天將都督)유정(劉綎)이대방진(帶方鎭)에 머무른 것에 대한 비문(碑文)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에 왜노(倭奴)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황제께서 제장(諸將)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정벌(征伐)토록 할 때 대군(大軍)이 이미 이르 러 기성(箕城)에서 시위(示威)를 하였다. 마침내 병(兵)들이 부드럽게(관대하게) 타일러 스스로 이끌고 가라 명령하니 세 읍(三都)이 차차 회복(恢復)되었다. 왜적 은 이미 가고 남은 적들이 바닷가에 유둔(留屯)하여 진심으로 복종(服從)할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간청(懇請)하거늘 이에 조정(朝廷)과 협의하여 남아있는 한 사 람을 뽑아 진(鎭)에 복종함이 가능한가 하였다.
완벽한 독부(督府) 유공(劉公)이 실(實)로 가까이 하여 보니 기여(寄與)를 할 수 있어 오랫동안 영남(嶺南)에 있으면서 왜적이 두려워하고 복종한 바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이곳에 진(鎭)을 옮기게 하고 중국 명나라 군사(軍士)로 꾸몄는데 고로(道路)를 빼앗김이 없었고 살고있는 마을을 침략하는 걱정도 없었다. 또한 유민(流民)들을 뇌휼(擂恤)하니 곧 식량(食糧)을 조절하고 전대(錢袋)의 돈을 기부하여 만 리(萬里)의 밖에서 황제(皇帝)의 성은(聖恩)을 강구(講究)하니 어진 사람의 이로움이 넓지 아니한가? 명나라 황제의 위덕(威德)이 사해(四海)에 더하니 장수(將帥)가 된 자 선전(善戰)으로써가 아니고서는 공로(功勞)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은 칼로 베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두어 흔적이 없이 크게 만든 것과 같으니 누가 얻어 그것을 형용(形容)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가 솔직하여 태수(太守)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우리들은 그것을 경 외(敬畏)함이 없어 경계(警戒)함을 잊은 채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업종(業種)에 종사하니 누가 힘을 써 참완(鑱頑)을 간청하여 일시에 하나 둘을 기록할 것인가.’ 라 하였다. 태수께서는 그 말이 가(可)하다고 하여 그 비용(費用)과 더불어 마침내 그 요점(要點)을 뽑아 문장(文章)으로 만들게 하였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 하였을 때에 황제께서 그들을 정벌하라 군대에 명령하고 참으로 우울하고 근심하 여 군대를 보내니 군사들이 이곳에 오게 되었다. 군병들은 바다 변방(邊方)으로 왜노들을 쫓아내니 역시 감히 왜노들이 거스릴 수 없었고 무력(武力)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이에 스승으로 표하라 명령하니 이곳에 머무른 용맹한 신하로 산(山)의 위엄(威嚴)이 있고 진실로 용감하고 또한 지혜(智慧)가 있으며 인자(仁慈)하였다. 이에 의해 그의 온정(溫情)이 남원에 남아있으니 내외(內外)의 사람들은 한번 보라. 살고 있는 사람은 안도(安堵)하고 흘러 다니는 사람들은 느긋하여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맡았다면 가도 이롭지 않을 것이요, 왜구(倭寇)가 간 것 이 누구의 힘이며 왜구들이 온 것은 오히려 어그러짐이라. 천자(天子)의 성은(聖恩)이 밝아 우리가 높으신 보루(堡壘)를 빌린 것이다. 공(公)께서 돌아감이 빠르 지 말고 오히려 그 은혜를 마칠 수 있기를 통정대부(通政大夫) 전묵사(前牧使) 정염(丁焰) 지음 당장(唐將) 여응종(呂應鍾)이 김복흥(金復興)에게 준 시(詩) 서 (序) 임진(壬辰) 정유(丁酉)왜란(倭亂) 때 여공(呂公)은 천장(天將)으로 우리나라 를 구(救)하고자 왔는데 그의 행차(行次)가 둔덕리(屯德里)에 이르러 김복흥(金復興)의 집에 월(侗)이 그쳐 여러 날 동안 머무르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시(詩)와 아울러 서(序)를 주었다. 그 서(序)에 이르기를 ‘사람의 태어남은 천괴(天壞 : 자연)사이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인데 자주 있게 되면 역시 의기(意氣)가 느껴 응(應)하게 되는 것이라.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는 비록 물질이나 역시 같은 류(類)의 벗인데 어찌 오직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을 의심(疑心)하겠는가? 나는 적(賊)을 쫓아내고자 왕경(王京)을 떠나 말을 달려 좋은 산(山)에 이르렀다. 대개 적막(寂寞)하고 고요(孤寥)한 광야(曠野)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절경(絶景)의 땅이다. 석양(夕陽)이 서쪽으로 지고 새들이 잠을 자기 위해 수풀 속으로 날아들고 사방(四方)을 돌아보아도 망망 (茫茫)하여 모두가 언덕과 터를 이루니 특이(特異)함이 가히 슬퍼할진저.
그러나 그때 김생(金生)이라는 사람이 있어 길게 읍(揖)을 하고 맞이하니 뜻이 매우 간절(懇切)하여 그의 이름을 물은 즉 모(某 )라 하였다. 그의 벼슬을 물은 즉 별제(別提)라 하였다. 그의 심중(心中)을 두드린 즉 정(情)은 주(周)와 같았고 생각은 공자(孔子)와 같았으며 시(詩)와 서(書)와 육예(六藝)가 있었다. 나는 이에 그와 함께 집(室)으로 나아가 함께 마시고 먹으면서 함께 붓과 벼루로 글을 지었 으며 함께 거친 무명옷을 입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평생을 사귀어 온 사람처럼 서로 돌아보고 환대(歡待)함과 같았다. 그러나 김생은 조선(朝鮮) 사람이고 나는 중원(中原)이다. 우연히 한번 만나 이로 말미암아 일을 마친 뒷면 각각 이별을 할 것인데 서로 사랑함이 깊어지게 되면 헤어짐도 빠른 것이라. 피차(彼此)가 슬 퍼 상심하여 각각 눈물을 여러 차례 흘릴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청풍(淸風)은 김생을 보내 호남(湖南)으로 돌아가게 하고 명월(明月)은 나를 한양(漢陽)으로 돌아가게 하네. 마음에 비춰지는 것은 두 곳 땅이고 몸은 각각이지만 하나의 하늘 아래에 있네. 장차 이르노니, 이 생(生)은 김생에게 물을 곳이 없구려 불의(不意) 로 흉적(凶賊)이 또 진양(晋陽)을 경계(警戒)케 하니 나는 이에 먼저 나아가 순회 (巡廻)하면서 적의 사정을 탐지하다가 남원성(南原城)의 밖 40리 거리 산림(山林) 아래에 이르러 잠깐 머물러 있었는데 대장군(大將軍)의 지휘로 처음 이 마을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에 김생의 집이었다. 이때 원수(元帥) 권상공(勸相公)이 있어 아래를 둘러보고 내가 물어 이르기를 ‘이 산 가운데에는 혹시 유생(儒生)의 집으로 한결같이 창을 밝히는 집이 있어 가히 누울 만한가?’하니 권(權)이 이르기를 ‘이 마을에는 김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옛 사람의 글을 많이 읽었다고 하니 가히 모실 만한 대인(大人)이라.’고 하였다. 이에 곧 선산(善山) 고인(故人) 김생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김이 바야흐로 산 가운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군병(軍兵)을 피하다가 내가 이른 것을 들었다고 하였는데 곧 마음에 들거늘 나는 이에 칼을 옮기게 하고 머무르고자 한 것이 그의 집이었다. 그림 같은 루(樓)와 붉은 각(閣) 이 녹음(綠陰)에 가려 비치고 여러 가지 나무들과 교송(喬松) 그리고 수많은 긴 대나무들이 진세(塵世)가 아님과 같고 별유천지(別有天地)로 그윽하고 아담한 곳 이었다. 안에는 조그만 집이 하나 있는데 김생이 항상 그 가운데에서 수도(修道) 에 침잠(沈潛)하였다. ‘화평홍의(和平弘毅)’라는 네 글자가 있는데 스스로 새긴 것으로 벽(壁)에 있었다. 때로 한 곡조(曲調) 가야금을 희롱(戱弄)하니 양양태고 (洋洋太古)요 혹은 자소(紫簫)에서 나는 청아(淸雅)한 소리가 유연(悠然)하게 단 구(丹丘)에서 들리는 봉황의 울음소리와 같더라. 이에 몸을 다스려 예(禮)를 알고 마음을 다스려 악(樂)을 알게 되니 입과 귀로만 장구(章句)를 아는 선비의 무리가 아니다. 원수 역시 그를 극구 찬양(讚揚)하였다. 그의 한 아들을 보니 역시 청년 (靑年)이자 영기(英氣)를 가까이 한 사람으로 허리에는 백도(白刀)를 차고 있었으 며 강개(糠慨)가 욕출(欲出)하여 나라를 원수로부터 회복고자 하고 더욱 즐거운 것은 김공이 잘 가르쳐 놓은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오호라! 경상도(慶尙道)에서 한번 만나기 시작하여 호남(湖南)에서 재차(再次) 만나 끝마치게 되니 역시 일찍이 인연(因緣)이 있음이로다. 이로써 저녁 경치 술 잔에 의지한 채 술에 취함을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이것으로 서(序)하노라.
시(詩)로 이르기를
경상도 산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호남의 성 밖에서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네. 바람 맑은데 퉁소를 부니 구름 대나무에 머물고 밝은 달 아래 가야금을 타니 이슬 내려 오동나무에 가득하더라 우주는 바야흐로 겨우 같은 하나의 꿈꾸고 관산(關山)은 천 겹으로 막고자 한다. 주인은 금잔 술로 슬퍼하지를 말고 이별의 뜻 난간에 의지하여 말하는 가운에 있지 않다.
慶尙山前偶邂逅 湖南城外更相逢 風淸弄管雲停竹 朗月調琴露滿桐 宇宙方裳同一夢 關山又欲隔千重 主人莫惜金盃酒 別意憑欄不語中
김복흥(金復興)도 역시 시(詩)를 주어 이르기를
호남의 산 천 리 도리어 돌아가는 길에 절의를 소중히 하고 황제의 서울로 가까이 가는 것이 아득하다. 용검(龍劍)으로 한결같이 지휘하여 맑은 바다와 태산(泰山) 이루고 표범의 비결(秘訣)로 창생(蒼生)의 구제(救濟)를 시험하였네. 약탈(掠奪)하는 왜노들 굴복(屈伏)하니 함이 없어도 스스로 승리함이라. 싸우지 않았으나 천자(天子)의 군대 위엄이 있었다. 조정의 성은(聖恩)에 감사드림이 많아 내외(內外)가 없고 우리 조선 천 년 동안 황명(皇明)에게 짐이 되었다.
湖山千里返歸程 玉節遙遙接帝京 龍釖一揮淸海岱 豹纔韜試濟蒼生 無爲自勝掠奴伏 不戰而威天子兵 多謝聖朝無內外 東韓千載荷皇明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 오랑캐들이 갑작스럽게 다다르니 상왕(上王)으로부 터 대대로 섬기는 신하(臣下 : 世臣)들은 먼저 강도(江都)로 부임(赴任)하라 교시 (敎示)하니 공(公)께서는 오래전부터 관직에 들어가 앉아있었으므로 이때는 기로 소(耆老所)에 있었는데 왕의 명령을 따라 강을 건너 부성(府城)의 10리 밖에 붙어 살다가 긴 강의 천참(天寠)이 하루아침에 함락(陷落)되었다. 공(公)은 이에 가사 (家事)를 처치(處置)하고 이르기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망했다. 의(義)로 움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드디어 공께서는 성(城) 가운데로 질주(疾走)하여 들어가 적과 싸우다가 죽었는데 다음 해 정축(丁丑) 정월(正月)이었다. 슬프다! 공(公)이 90세의 병든 몸으로 신의 몸을 맡긴 바 도 없이 오랑캐에 이르러 곧 죽었어도 아직 죽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제향(祭享)으로써 하는 것이다. 피난(避難)을 하지 않을 채 의(義)로움으로 마침 내 자신의 몸을 버림에 이르러서도 후회(後悔)하지 않으니 충(忠)이 아니고서는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당당(堂堂)한 큰 절의(節義)는 비록 일월(日月)과 더불어 다투어 빛날 것이다.
국가(國家)로부터 포전(褒典)이 있어 이미 표창(表彰)하고 그 려(閭)는 곧 태산 (台山) 옛 살던 곳에 세웠으나 역시 그것에 비교되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이두(螭頭)에 있는 송(頌)에다 사(詞)하여 이르기를
견고한 성을 잃고 지킴은 철기마의 뛰어 건넘에 있고 위태로운 외로운 성은 종묘를 어지럽게 하네. 말 한 필로 다다르기 어려우니 홀로 드러내 어찌할까. 가벼운 것에 생명을 아끼지 않으니 죽음을 두려워 않음이로다. 충효로 나라 위해 죽으니 의를 위해 삶을 버림이로다. 명성이 천 년에 남아 사람의 이름이 영구히 전하네.
金湯失守鐵騎飛渡 一髮孤城廟貌顚倒 匹馬赴難公獨何爲 鴻毛一擲視死如歸 忠孝殉國義著舍生 流芳千載不朽者名
이라 하다. 숭정(崇禎) 14년 신사(辛巳) 2월 일 세우다.
만 헌(晩 軒) 정 염(丁 焰)
나의 벗 이경인(李景引)의 거처가 산기슭에 있는데 기슭의 벼랑 끝에 나아가 당(堂)을 개척하여 평평하게 하니 가히 수천 명이 앉을 만하고 벼랑에 짙푸른 삼 림(森林)은 성글고 메마르지 아니하여 참으로 잠울(岑蔚)하였다.
띠집을 짓고 지우(止隅)라 편액(扁額)하고 심인조(沈仁祚)의 액자를 거니 진실 로 공자(公子)의 시(詩)를 설명하는 뜻을 취하고 또한 그 체단(體段)을 형상(形狀) 하니 어찌 그렇게 착제(着題)하였는가. 세상의 허파로서 자호(自號)한 사람들과 는 크게 서로 거리가 멀다. 비록 그러나 지우(止隅)란 것은 숲을 지키는 새라, 경인(景引) 자신이 거처함이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어찌 범조(凡鳥)로서 경인을 보리요, 경인이 수재(秀才)일 때부터 이미 수풀을 드나드는 날갯죽지가 있어 멀리 이를 것을 기약(期約)했는데 그 거처함이 깊은 늪지대의 학(鶴)이요, 그 나아감이 곧 조양(朝陽 : 산의 동쪽)의 봉황(鳳凰)이라. 그는 종말에 이르러 급제하더니 이 윽고 사옹원(司饔院)의 참봉(參奉)에 제수되어 잠깐 벼슬하다 물러나 마침내 노 모(老母)를 봉양하니 오조(烏鳥)의 정(情)이 그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었던가.
나이가 또한 쇠(衰)함에 마관(馬官)을 제수하여 다만 은명(恩命)만 사례하니 예찬(禮讚)의 소문이 더욱 드러나더라. 초연(超然)하여 형부(刑部)의 낭관(郎官)을 제수하였다. 혼자서 생각건대 요행만 무릅쓴다는 혐의가 있을까 하여 부득불 달려 가 사은(謝恩)하니 행장이 심히 군속(窘束)하고 천연(遷延)으로 드디어 고한(苽限)을 지나니 이것이 모두 일찍이 뜻에 기필(期必)한 것이 아니고 사세(事勢)가 자연 그러하니 이제야 비로소 지우(止隅)를 착제(着題)한 것이 하늘이 짓고 땅이 베푼 것 같아 가히 쉽지 아니함을 알겠다. 나이가 달(達)하지 못하였을 때 명예와 고뇌를 숭상하고 도로써 감춤에 이름이 실로 완전하다.
경인을 아는 사람으로 나만큼 자세한 사람이 없으니 그 평생을 살펴보건대 세상 밖을 흠모함이 없고 우(隅)에 올라 완당(完堂)을 바라보고 동남에 반환(盤桓)하니 실은 그 외가의 송만(松蛮)요 그 선자(先子)의 부탁이니 바라보고 사모함의 가깝 고 간절함이 인자(人子)의 원하고자 하는 바이다. 성산(城山)이 서남으로 에워싸 체세(體歲)가 서울의 남산과 비슷하여 유연히 바라보니 아치를 이루고 우(隅)의 곁을 두름이 모두 그 도내(度內)에 있으니 보리밭도 있고 목화밭도 있고 벼 밭도 있다. 우의 곧바로 아래는 시내의 흐름이 원원(源源)하여 활계(活溪)로써 이름 하니 삶아 먹을 만한 작은 생선 종류가 끊임없이 있다.
서식(棲息 : 생활)하는 자료를 여기에서 취하여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함에 반드시 그 성의(誠意)를 다하여 그 유무(有無)를 묻지 아니한 까닭에 용도가 항상 부족하여 공(公)과 사(私)에 취한 것이 내게 있는 것같이 하여 조금도 인색(吝嗇) 한 뜻이 없으니 생애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 더하고 덜함이 있을 수 없고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남이 자기를 의논한 것이 또한 적으니 지우(止隅)를 착제(着題)한 것에 그 끝이 중요함에 중요함을 더욱 가히 보겠다. 만약 그대로 하여금 높이 밟고 멀리 이끌렸다면 두류(頭流)로써 우(隅)를 삼아 그칠지라도 그 책제하 지 못할 사람이 또한 많으리라. 만헌노인(晩軒老人) 정군(丁君) 회(晦)가 병을 견디면서 이를 위하여 기(記)를 하노니 다행히 같은 뜻이 있는 사람들은 취하여 볼 것이다.
아계(阿溪)의 물이 운수(雲水)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숲을 뚫고 돌을 둘르고 콸 콸 울면서 흘러 골짜기 입구로 달려 내려와 연양(演瀁)과 징벽(澄碧)이 깊어 창랑 담(滄浪潭)이 되니 넓이가 두어 발이요 맑아서 침을 뱉을 수 없는지라. 시내를 따라 위아래로 경치가 뛰어난 것이 하나뿐만 아니다. 탁영당(濯纓堂) 아래와 사고 정(思古亭) 위에 제일 명구(名句)가 잡초와 쑥대에 매몰되어 초가집을 지으니 하 늘이 아끼고 귀신이 감춘 지 몇천 년이라. 내 생질(甥姪) 한 군(韓君)이 산을 살 돈 약간으로 그 값을 갚고 바꾸어 삽질하고 계단을 쌓아 그 높이를 더하고 터를 넓히어 삼면(三面)으로 담장(垣墻)을 두르고 백 척의 다락을 얽어서 이루니 높이 가 밝은 노을을 잡아당기고 그림자가 청담(淸潭)에 떨어지니 멀리멀리 쇄락(灑落)하고 경(景)과 상(象)이 삼라(森羅)하니 여기에 오른 사람은 열연(悅然)이 우 화승선(羽化升仙)의 상상이 있을 것이라.
이에 편액을 몽선루(夢仙樓)라 하니 이 어찌 천지(天地)에 부평(浮萍)이며 광음 (光陰)의 비조(飛鳥)가 아니리오. 인생이 그 얼마인고, 만 년이 잠깐이라. 진환의 낮고 좁은 것이 싫어 가벼이 날아 멀리 놀고자 하니 선계(仙界)의 일월(日月)을 꿈꾸어 더럽고 흐린 데서 벗어남을 생각하여 먼 회포를 한 누각(樓閣)에 붙이어 애오라지 부유(浮遊)하고 소요(逍遙)하여 볼까? 비록 그러나 삼십육동(三十六洞) 과 십주(十洲 : 신선이 거처하는 물가)와 삼도(三島 : 신선이 거처하는 섬)가 선경 (仙經 : 신선에 관한 책)에 실려 있어 소소(昭昭)하게 상고(詳考)해 보니 천 년이 돌아와도 한 사람도 난조(鸞鳥)의 사마(氿馬) 수레와 학(鶴)의 가마(駕馬)를 이끌 고 약수(弱水)를 날아 건너 안기생(安期生 : 신선)과 의문(義門 : 신선)으로 더불 어 자부(紫府 : 신선이 거처하는 곳)의 연하(烟霞)에 고상(翶翔)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사해(四海)의 힘을 다하고 일생의 마음을 수고로이 하여 정성스러움을 잊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그치지 아니하였으되 어린 사내아이가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동해(東海)가 망하고 무릉(茂陵)의 송백(松柏)에 찬비가 쓸쓸하였다. 그렇다면 이른바 동천(洞天)과 십주(十洲)와 삼도(三島)는 과연 어느 곳에 있으며 세상을 건너 장생(長生)한 사람은 또한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옛 사람이 시(詩)를 말하기를 ‘세속(世俗)이 어찌 거짓과 참을 알리요, 지금까지 전한 이는 무릉의 사람이라.’하고 또 이르기를 ‘아득하고 아득한 삼신산 (三神山)은 어느 곳이요, 인간의 좋은 일이 곧 선구(仙區 : 신선이 살고 있는곳)니라.’ 하니 오호라! 세상의 사람들이 일찍이 선구가 가까운 곳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먼 곳에서 구하며 쉬운 곳에 있는 데도 어려운 곳에서 구하니 비록 장풍(長風)을 옆에 끼고 한만(汗漫)에 걸터앉아 옥교(玉喬 : 신선)와 적송자(赤松子 : 신선)로 더불어 계전(桂殿)과 선궁(仙宮)에서 재미있게 놀고자 하나 어떻게 하여 얻을 것인가?
이제 나의 생질의 성품이 누각(樓閣)에서 살기를 좋아하며 기상이 청진(淸眞)하고 정신을 기르고 기(氣)를 인도(引導)하여 노씨(老氏)의 현허(玄虛)를 생각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길러 맹자(孟子)의 진실(眞實)에 통달(通達)할 것이라. 새로 승지(勝地)를 개척하여 이 선루(仙樓)를 구성하니 도화유수(桃花流水)에 지 나는 손님의 넋이 혼미하고 방초(芳草)와 청천(晴川)에 의사(意思)가 한가롭고 맑아 봉래산(峰萊山)의 저문 비 내릴 때 유하(流霞)에 빚은 술에 절반이나 취하고 금동(金洞)의 맑은 하늘에 생소(笙蕭)의 소리가 고요하고 맑게 들리네. 높은 건 (巾)을 쓰고 길게 휘파람 불어 난간(欄干)에 기대고 멀리 바라보니 땅은 멀고 하늘 은 높으며 산은 길고 물은 멀리 흐르는구나. 구름과 연기의 아침저녁에 변하는 모양이 무궁하고 담쟁이의 사이에 달과 솔바람에 경계가 청정(淸淨)하니 이른바 별유천지(別有天地)요 비인간(非人間)이란 것이 이 지경(地境)이 아니고 무엇이 리요. 바람과 햇빛이 화창하고 벽도(碧桃)가 물에 비치며 더운 열(熱)이 쇠를 녹일 듯함에 맑은 바람이 시원스럽게 불고 풍상(風霜)이 사나움에 송계(松桂)가 스산 한 모습이며 눈과 달이 빛남을 교차함이 하늘에 넓게 가득하니 사시(四時)의 물색 (物色)이 같지 아니하니 일루(一縷)의 선경(仙境)이 다함이 없네. 몸에는 학창의 (鶴 衣)를 입고 머리에는 황관(黃冠)을 쓰고 그 사이에 처해 누워 세월을 보내니 삼청(三淸)의 복지(福地)가 황홀하여 찾기 어렵다. 이 경지(境地)와 이 승경(勝景)이 완연한 신선(神仙)이라.
장교(長橋)를 지나가는 길손은 어자(漁子:漁夫)의 미진(迷津)과 비슷하고 짧은 지팡이의 고승(高僧)은 구류(九流)에 래회(來會)함과 의회(依稀)하다. 일세(一世)의 위에 당반(倘伴)하여 호산(湖山)의 승지(勝地)에 앉아 누리니 지상(地上)의 선자(仙子)가 이 몸과 이 세상이요, 호중(壺中 : 별천지)의 물색(物色)이 이 경계 가 아닌가. 우주의 사이를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옛날 현인(賢人)의 자취를 낱낱 이 세어 소선(蘇仙 : 蘇東坡)의 적벽(赤壁)에서 잠깐 놀다 가고 여자(呂子)의 악양 (岳陽)에 세 번 들어가 그치니 어찌 나의 생질과 같이 한 언덕의 승지(勝地)를 오로지 하고 백 년의 신선놀음을 다하며 화목(和睦)하고 만족(滿足)한 모양으로 하여 늙음이 장차 이르지 못함을 알 것인가.
슬프다! 여기에 앉고 여기에 누우며 여기에서 취하고 여기에서 손님과 주인이 마주하고 여기에서 노래하고 춤추어 부귀(富貴)와 공명(公明)을 서로 잃어버리는 지역에 놓아두니 이 삶의 선흥(仙興)에 만족히 하네. 또한 어찌 광한(廣寒)에서 선계(仙桂)를 꺾는 것과 궁중술(宮醞)을 가지고 행원(杏園)에서 취하여 승명(承明)의 초려(草熇)에 출입하며 자맥(紫陌)의 티끝에 분주한 사람을 부러워하겠는 가? 나도 또한 광렴(光澰)의 높은 정자(亭子)가 있어 여기서 가기가 멀지 아니하 고 연운(烟雲)과 풍월(風月)이 이 루(樓)에 내리지 아니하니 장차 종이 나귀를 타며 오리 신을 신고서 빨리 나는 듯 왕래하여 한 가지로 선경(仙境)을 구경하며 남은 삶을 마치고자 하나 알지 못하겠다. 그대의 뜻이 어떠한가. 가히 한(恨)이 되는 바는 일찍이 지세가 시냇가에 임하여 다함만 보았고 하늘이 이룸을 보지 못했구나. 깎아내린 언덕의 열림과 장인(匠人)의 손재주가 정미(精微)롭고 치 함과 동우(棟宇)의 굉장함과 화려함은 아직 놀랄 겨를이 아니요 단지 몽선(夢仙) 의 명의(名義)로써 널리 펴서 기문(記文)을 하였지만 소루(疏漏)함이 있고 상세하 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마땅히 후에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다하기를 기다리 고 다시 낱낱이 아니하노라.
참봉(參奉) 이문규(李文規)가 서(序)를 지었는데 하례(賀禮)하여 이르기를 ‘구로(九老)’라 한 것은 우리 마을 아홉 노인을 가리킨다. 구로란 사람은 누구인가. 흥덕(興德)의 세 장공(張公)으로 한 분은 78세요 두 분은 모두 72세며, 청성(靑城) 의 두 한공(韓公)으로 한 분은 77세요 또 한 분은 74세며, 76세와 68세는 진양(晋陽) 하공(河公)으로 숙질(叔姪)이 있고, 66세와 61세의 동량(㠉梁) 최공(崔公) 형 제(兄弟)인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長)은 공부(工部)의 원외랑(員外郞)이요, 가 장 적은 사람은 사헌부(司憲府)의 우집법(右執法)이니 합하여 아홉 노인이다. 모 이면 술 마시고 노는데 그날은 생신(生辰)으로써 날을 삼으니 대개 백소전(白少傳) 문로공(文潞公)의 고사(古事)를 본받은 것이다. 3월 초팔일이 곧 나이가 젊은 장공(長公)의 생신날이다. 이에 젊은 장공이 크게 연회석(宴會席)을 열었는데 전 부터 참여(參與)하는 사람 외에 다시 모든 젊은 사람들과 나이 많은 사람들을 맞 이하여 함께 거문고로써 즐기고 드디어 북과 종으로 그것을 보필(輔弼)케 한다. 각 인원이 자리를 나눌 때에는 아홉 노인들 다음으로 나이에 따라 차례를 하고 모든 젊은 사람들과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나이로 차례 하며 모든 자제(子弟)들도 나이로 차례 하니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차례가 있게 된다.
때에 날씨와 바람이 혜창(惠暢)하여 버들과 복숭아가 활짝 피고 때가 꽃다웁다. 경치는 화려하여 사죽(絲竹)의 소리가 해화(諧和)함이 밝고 맑은 데 비하여 난초 가 뜨고 계화(桂花)가 흐른다. 춤 솜씨는 해를 머물게 하고 깊이 날고 가득히 전하 며 노래를 바꾸어 춤으로 교체하여 곧 무너질 듯 너울너울 하는구나. 술은 절반을 못하였는데 문규(文規)가 잔을 씻어 술잔을 높이 들고 무릎을 끓고 여러 노인 앞 에 드리면서 칭하(稱賀)하기를 ‘하늘은 하나인데 복은 다섯 가지로 화려한 축하 (祝賀)의 으뜸은 수(壽)가 아니겠으며 사람마다 크게 하고자 하는 바와 사람마다 기필(期必)하지 못한 것 또한 수(壽)가 아닌가 한다. 어려서 요사(夭死)하기도 하 고 장년(壯年)이 되어 꺾이기도 하나 쇠(衰)함을 향하여 묻힌 사람이 어찌 한(恨) 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 제공(諸公)께서는 약년(弱年)으로부터 장년(壯年)과 쇠년(衰年)을 지나 육칠순(六七旬)을 누리니 어렵고 또한 드문 일이 아니리오. 백 사람을 헤아 려보건대 겨우 네댓 사람을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아홉 사람이나? 한 마을을 헤아려 보아도 또한 많이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한 마을에서랴. 나는 그것을 얻었 으니 시(詩)하여 이르기를 ‘오래 살기를 빌어 큰 복(福)을 크게 하리라. 감히 이것 으로써 여러 노인을 경하(慶賀) 하나이다.’ 말을 끝마치고 재배(再拜)하니 여러 노인께서 답배(答拜)하거늘 또다시 잔(盞)을 드리면서 무릎을 꿇고 축원(祝願)하 기를 우학(羽鶴)의 수(壽)를 고르게 하시고 개구(介龜)의 수를 고르게 하시고 목 춘(木春)의 수를 고르게 하시라 하오니 대개 병이(秉彛 : 윤리)의 삶이 사물에 따라 다르니라.
이제 우리 제공의 연세(年歲) 아직 높은데도 안색(顔色)을 보니 검붉은 듯하며 걸음걸이를 살피니 빠른 듯하고 잠자리가 편안하고 음식이 풍족하여 질병이 없이 건강하니 그 병이(秉彛)의 삶이란 것이 진실로 상부(象夫)와 더불어 또한 높낮이 가 있을진저. 기년(期年)으로부터 모년(髦年 : 少年)에, 모년(髦年)으로부터 질년 (耋年 : 80세)까지 하여 장차 대춘(大春 : 長壽)을 하고 영구(靈龜)를 하며 현학행 (玄鶴行)하는 것을 가히 기대할 것이라. 가히 경사스럽지 아니한가. 내가 또 시 (詩)에서 얻었으니 ‘끊지 아니하고 무너지지 아니하야 산과 같고 언덕과 같다 하니 감히 이것으로써 제공을 위하여 경축하나이다.’ 말을 끝마치고 재배를 하니 제공 들께서 답배하고 물러나 술잔을 들어 모든 자손에게 촉탁(囑託)하여 말하기를 ‘여 러 군자(君子)들은 이 춘주(春酒)를 위하여 각각 지팡이와 신발을 받들어 술동이 와 고기 접시에 모시고 이 즐거움을 누리니 여러 군자들은 효도(孝道)를 할진저. 불초(不肖)는 풍수(風樹)에 근심스러운 모양으로 아픔을 머금고 씀바귀를 먹은 뒤 간절하나이다.’ 여러 군자의 일일지락(一日之樂)을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하니 죄역(罪逆)이 어떠하며 가히 슬프고 부끄럽지 아니한가? 비록 그러나 수(壽)라는 것은 태화(太和)와 풍희(風凞)의 극치(極致)인 까닭에 상고(上古)에 세대에는 어 리석은 그 백성이 상수(上壽)하고 중고(中古)의 세대에는 침착한 그 백성이 중수 (中壽)하니 내가 금세(今世)를 관찰함에 태화 풍희의 지음이 아닌가? 내가 또 『서 전(書傳)』에서 얻으니 ‘때로 오복(五福)을 거두어 써 그 서민(庶民)에게 널리 주랴.’ 하니 감히 이것으로써 성군(聖君)을 위하여 암송(暗誦)해 본다. 이에 곧 모든 노인과 젊은이로 향궤(香几)를 베풀고 북향(北向)하여 서서 나아가 사배(四拜)하 고 물러나 사배(四拜)하노라.
내가 십수 년(十數年) 전에 일찍이 하나의 재(齋)를 다스리니 동영(棟啗)이 극히 조잡(粗雜)하고 협소(狹小)하였다. 다만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생존(生存)만을 취하고 머물러 두어 글자로 편(扁)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 실상(實狀)을 얻기가 어렵더니 우연히 도처사(陶處士:淵明)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서 용슬이안 (容膝易安)의 말을 얻으니 스스로 이르기를 오직 이것이 가히 나의 재(齋)를 기 록하는데 사치함도 검소함도 없었다. 드디어 벽에 걸고 조석(朝夕)으로 눈여겨보 았다. 동지(同志)에 한군(韓君) 여중(汝中)이란 사람이 있어 또한 정자(亭子)를 그가 거처하는 동북쪽에 세우니 나의 이안정(李安亭)과 더불어 서로 바라다봄에 겨우 십 리의 거리라. 띠풀로 이고 대나무를 걸쳤으니 화려(華麗)하지도 누추(陋醜)하지도 아니하여 오직 몸이 편안한 데 뜻이 맞는 것이 즐거웠다. 이에 얼굴(額面)에 하기를 이안정(李顔亭)이라 하니 또한 도연명(陶淵明)의 부(賦)에 이른바 면가이안(眄珂怡顔)의 뜻을 취한 것이다.
대개 거래(去來)의 한 편이 천 년 동안 사람의 입에 자자하게 회자(膾踉)하여 지금까지 그 말을 깊이 완미(玩味)하니 의연히 화평(和平)과 락이(樂易)한 기상을 접한 것 같다. 소옹(騷翁 : 詩人)과 묵객(墨客 : 畵家)의 감영(感詠)한 바와 일사 (逸士 : 處士)와 유인(幽人 : 隱人)의 흠모한 바가 일찍이 이 편에 없는 것이 아니 다. 하여금 관현(管絃)에 올라 모든 요곡(謠曲)을 전파하여 그치지 아니한 데 이르 고 간혹 그 말을 취하여 모든 당(堂)과 실(室)에 이름 한 사람이 또 있다면 그 후세 에 흠모를 취한 것이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편중(篇中)에 가히 채용할 만한데 나 아가 산암(山菴)과 초사(草舍)의 호(號)를 한 사람이 오직 나의 이안(易安) 두 글자 로 한다면 참으로 진실한 착제(着題)의 말을 할 것이다. 일찍이 자부(自負)했더니 마침 이안(怡顔)의 한 묘구(妙句)가 또한 내 벗의 깨달아 얻은 바가 되니 어찌 그 취상(趣尙)이 의논하지 않아도 오묘(奧妙)하게 부합하는가? 그 또한 기이한 일이 로다. 이 정자가 요계(蓼溪)의 가에 터를 잡았으니 언덕이 높고 들이 넓어 들어가 서 위아래를 살펴보니 모두 명사(明沙)와 백석(白石)이 울긋불긋한 듯하고 백천 (百川)의 정상에 억만 섬의 명주(明珠)가 쌓였으니 참으로 절승(絶勝)의 경관이라.
정자의 위에는 청산(靑山)이요, 그 아래에는 유수(流水)라. 창창(蒼蒼)한 것은 그 빛을 드리고 획획(㶁㶁)한 것은 그 소리를 다하며 가히 나물만 캐고 가히 고기 를 낚을 만하며 마땅히 인(仁 : 樂山)하고 마땅히 지(智 : 樂水)하니 군자의 즐거워 한 바를 믿겠다. 그 조모(朝暮)와 사계(四季)의 풍경과 연하(烟霞)와 물색(物色) 의 취향(趣向)이 족히 써 그대의 흥(興)에 이바지하고 그대의 얼굴에 흐뭇하게 한 것이 한 그루의 뜰가의 나무에 그친 것이 아니면 내 벗의 취한 바를 가히 알겠 도다.
그 이(怡)란 것은 기쁨이니 얼굴에 기쁨이 있는 것은 모름지기 마음속으로부터 발현(發顯)하여 나온 것이다. 그대의 얼굴이 기쁘면 그대의 마음이 즐거울 것이 요, 즐거움이란 기쁨으로 말미암은 뒤에 얻는 것이다. 즐거움이 아니면 족히 군자 라 말하지 못할 것이요, 바야흐로 군자(君子)가 외면(外面)만 따라 기뻐할 때만 볼 것이니 가히 믿을 것은 배꼽 속에서 자연히 안화(安和)하고 한광(閑曠)한 즐거 움이 있음이라. 그렇다면 그대의 즐거움은 한갓 밖에 있는 경물(景物)을 즐거워한 것이 아니요, 그 심지지상(心志地上)에 참다운 즐거움을 즐거워한 것이라. 만약 외물(外物)의 가히 구경한 것으로써 내 친구가 이안(怡顔)이란 뜻을 해석한다면 자못 천하고 천한 장부(丈夫)가 됨을 면하지 못하리라. 방사문(房斯文) 회경(晦卿)과 장석사(張碩士) 여휴보(汝休甫)가 본래부터 문장(文章)에 노련하다 이름 하니 두 사람이 이미 기문(記文)을 저술하여 빛을 윤택하게 하였다. 나의 황사(慌詞)와 무어(蕪語)를 돌아보건대 족히 두 현자(賢者)의 다음의 자리에도 배열(配列)하지 못할 것이나 우연히도 당호(堂號)를 취하는 뜻이 함께 고인(古人)의 일편 상(一篇上)에 뜻이 크고 활달하여 고인을 벗으로 삼는 뜻에서 나와 자연히 암합 (暗合)한 것이 존재함이 있기로 아직 그 말을 기록하여 그대의 간절함에 부응(副應)하니 거둔 바의 말이 족히 뜻에 달(達)하지 못할 뿐이다. 병신(丙申) 맹춘(孟春) 김지백(金之白)은 기(記)하노라. 방명엽(房明燁)과 장복길(張復吉)이 아울러 또한 기문(記文)을 한다.
주인(主人) 장복겸(張復謙)
객(客)이 외지(外地)로부터 와서 나의 시냇가의 집(玉鏡軒)을 지나다가 옥경(玉鏡)이라는 글자를 가리키고 헌(軒)을 이름 한 뜻을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객은 물과 달을 아는가? 물은 옥(玉)과 같이 맑고 달은 거울과 같이 밝다고 하니 그 뜻이 이와 같음이라.’ 객이 말하기를 ‘시(詩)에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그 사람이 옥(玉)과 같다 하고 선유(先儒)들이 말하되 마음(心)이 그친 물이 밝은 거울과 같다 하니 비유함을 여기에 취하여 흥(興)을 저기에 의탁함이 아닌가. 주인이 응 (應)하지 아니하고 술을 들어 객에게 권하니 그때에 섬토(蟾免)가 빛을 날리고 파려(玻瓈)가 푸른빛을 띠어 정대(亭臺)가 그림자를 거꾸로 하고 창(窓)과 벽(壁) 이 영롱(玲瓏)하여 손님과 주인이 완연히 수정궁(水晶宮)에 있음이라. 객이 술잔 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옥경으로 편액(扁額)을 건 것이 어찌 다만 물과 달만 묘사(描寫)하였을 뿐이리요, 또한 가히 담연(湛然)과 허명(虛明)의 기상을 형용은 잘하였다고 이를 것이다.’ 이에 녹수(綠水)의 곡(曲)을 명월(明月)의 장 (章)을 외우니 그 소리가 가늘게 울리어서 한 번 창(唱)하고 세 번 감탄하는 뜻이 있다. 객이 나가거늘 주인의 붓 적시어 그 말을 서(序)하게 되었노라.
숙종 30년 갑신(甲申)에 순찰사(巡察使) 민진원(閔鎭遠)의 상계(上啓)로 말미 암아 수축(修築)한 것을 주청(奏請)하여 만취정 김위(金偉)의 고손(高孫)이며 부 사(府使) 김창석(金昌錫)과 영장(營將) 박창윤(朴昌潤)이 그 일을 관장하고 또 별장(別將)과 승장(僧將)을 두어 금성(金城) 군기(軍器)의 군량미(軍糧米) 모두 를 옛날의 그대로 다시 옮겨 오도록 하였다. 그때 간사(幹事) 진홍주(陳洪疇) 및 양치인(梁致仁)과 이동식(李東植), 양달해(梁達海), 이운배(李雲培) 등 다섯 사람 은 그 일을 감독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좋은 말 한 필(匹)씩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