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리로 임명(신래 新來)되면 신참례, 허참례, 그리고 면신례의 과정을 거친다. 옛 그림인 선전관 계회도(宣傳官契會圖)를 찾아 알아본다. 실제 신참례 행위를 사실대로 그리지 못한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은 그림을 소장하므로 후손들에게 선조의 못된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화로 남기때문이었다.
▣ 선전관 계회도(宣傳官契會圖)
① 1787년(정조 11) 9월 2일에 열린 선전관청 모임 기록화로 관료들의 특별한 만남이 있을 때 그리며, 특히 기강과 결속이 강한 몇몇 관청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② 선전관은 신예 무신(武臣)들 중에서 발탁하는 요직으로, 주로 왕을 측근에서 호위하며 왕명이나 기밀용 비표를 전달하는 일 등이 주된 임무였다.
③ 계회도는 모임 기록화를 말하는데 이그림은 모임 날 오전 창덕궁의 춘당대에서 정조 임금이 초계문신(抄啓文臣)들과 활쏘기를 했으며, 이를 마친 뒤 선전관들이 자리를 옮겨 새로 임명된 선전관 당상관 김익빈(金益彬,1763년 출생)과 양협(梁埉)의 면신례(免新禮) 모임을 가진 것이라고 선전관청 일기에 적혀있다. 따라서 정조도 새로 임명된 당상관 2명의 면신례를 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다고 생각한다.
④ 가을색이 완연한 산수를 배경으로 성대한 연회가 열리고 있다. 호젓한 한강변 한 쪽에 천막을 설치했고 관복 차림의 관료들이 자리해있다. 시중을 드는 기녀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관원들도 보인다. 왼쪽 하단에 리離(☲) 괘가 표시된 포 과녁이 그려져 있고 그림 아래쪽에는 참석자 23인의 신분과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
⑤ 관직에 첫발을 딛는 신임 관원은 배속 받은 관청에 나아간 뒤 한 달 안에 일종의 신고식인 신참례를 마쳐야 했다. 이 절차는 관청 내 관원들 간에 행해진 비공식적인 통과의례로 허참례와 면신례로 나뉜다. 허참례는 비로소 업무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며, 면신례는 신참을 면하게 해준다는 절차였다.
⑥ 선전관청 일기에 따르면 신참례는 백면허참(白面許參)이라 하여 신입 관원은 얼굴에 분칠을 하고 참석해야 하며, 귀복추화(鬼服醜靴)라 하여 해진 옷과 갓, 신발 등을 신은 남루한 복장을 해야 했다. 또한 신참례에서 신임 관원은 선배가 시키는 벌칙을 따라 하며 힘든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그것을 벌례(罰禮)라 했다, 예컨대 춤을 추게 하거나 흙탕물에 빠뜨리는 등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 등이 강요되었다. 그런데 이 계회도에는 이런 신참례의 핵심 장면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마치 기념 촬영하듯이 대열을 맞추어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계회도는 관직에 몸담은 개인의 관력을 말해주는 것이고 후손들에게 선조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이므로 가장 품위 있는 모습으로 그리려 했을 것이다. 신참례를 하면서도 차마 그런 장면을 그릴 수 없었던 이유이다.
⑦ 이날 신참례를 치를 사람이 새로 부임한 2명의 당상관인데 그림에서 가운데 앉은 흰색 관복을 입은 사람 4명인데 이 가운데 2명이다. 당상관이면 정 3품으로 무관직 중에서도 고급장교에 해당하는데 당상관이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신고식을 치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입관원이 아닌 새로 부임한 당상관까지 신고식을 해야했다.
⑧ 면신례를 행하는 날에는 성대한 주연과 함께 참석자의 수만큼 계회도를 제작하여 선배 관원들에게 한 점씩 나누어 주고 자신도 1 점을 기념으로 보관하였다.
▼ 선전관청의 위세를 보여주는 자료
· 창덕궁의 선전관청은 인정전의 동쪽 승정원 바로 북쪽에 위치
· 선전관청은 1882년(고종 19) 폐지했고, 선전관패(宣傳官牌) 앞·뒷면으로 상아로 만들었고 뒷면 수결(사인)은 고종 임금의 것으로 보인다.
· 선전관청의 신고식
· 아래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선전관청 사진이며 뒤의 건물은 조선총독부 부속건물이다.
출처 : 한국학 중앙 연구원, 국가유산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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