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좋은 꿈을 꾸고 난 후 벽옥 연적을 드리며 이시백이 과거를 보아서 장원급제하다.
박씨가 여쭙기를,
“남편의 허물을 드러내어 집안 사람들이 다 불효하다고 낙인을 찍으면 이것은 모두 저의 허물이 될 것입니다. 제가 나쁜 사람으로 여겨질까 염려스럽습니다.”
공이 듣고 감탄하여 그의 도량과 충성스럽고 후덕함을 칭찬하였다.
한편, 박씨가 망아지를 기른 지 삼 년만에 훌륭한 말이 되어 걸음이 호랑이와 같이 날래므로 박씨가 시아버지께 아뢰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명나라 왕의 명을 받은 사신이 나올 것이니 그 말을 가져다가 그 사신이 오는 길에 매어 두면 사신이 보고 사려고 할 것이니 값을 삼만 냥 딱 잘라서 팔아 오라고 시키십시오.”
공이 듣고 며느리의 말대로 노복을 불러 분부한 후 사신이 오기를 기다리니, 과연 그날 사신이 온다고 하므로 노복들이 말을 끌고 나가 오는 길에 매어 두었더니 사신이 보고 말을 파는가 물어 오므로 노복이 대답하기를,
“팔 말입니다.”
사신이 또 묻기를,
“값은 얼마나 받으려고 하느냐?”
“값은 삼만 냥입니다.”
그 사신이 매우 기뻐하며 삼만 냥을 아끼지 않고 사 가므로, 노복들이 받아 가지고 돌아와 상공께 말을 판 사연을 낱낱이 여쭈었다. 공이 삼만 냥을 얻게 되었으므로 집안의 재산이 풍부해져 박씨에게 묻기를,
“삼만 냥이나 되는 많은 값을 받았으니, 잘 모르겠구나, 어찌된 연고이냐?”
박씨가 여쭙기를,
“그 말은 천리를 달리는 훌륭한 말이나, 조선은 작은 나라라 알아볼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지역이 성기고 어설프게 생겨서 쓸 곳이 없습니다. 오랑캐 나라는 지역이 넓고 머지않아 쓸 곳이 있는데, 그 사신이 훌륭한 말을 알아보고 삼만 냥을 아끼지 않고 사 간 것이고, 조선이야 어떻게 준마를 알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그 사신에게 팔았습니다.”
공이 듣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너는 여자지만 만 리를 맑게 보는 눈이 있으니 정말로 아깝구나. 만일 남자가 되었다면 나라를 구하는 충신이 되었을 것을 여자가 된 것이 한스럽구나.”
하며 탄식을 하였다.
한편,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곡식이 잘되므로 나라에서 인재를 선발하려고 하여 과거를 보게 하는데, 시백이 과거를 편다는 말을 듣고 과거장에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날 밤 박씨가 한 꿈을 꾸었는데, 뒤뜰 연못 가운데 화초가 활짝 피어 있는데 벌나비가 날아드는 속에서 벽옥 연적이 변하여 푸른 용이 되어 푸른 바다에서 놀고 다니다가 여의주를 얻어 물고 빛깔 고운 구름을 타고 하늘의 서울인 백옥경(白玉京)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이므로, 박씨가 꿈을 깨어서 생각하니 한바탕의 꿈이라. 잠을 이루지 못하여 여러가지 일을 생각하다가 동쪽 하늘이 밝아 오기에 급히 나와보니 과연 벽옥 연적이 놓여 있는데, 자세히 보니 꿈에서 보던 연적이 분명하였다. 반갑게 여겨 갖다 놓고 계화를 시켜서 이시백에게,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 다녀 가십시오.”
하였는데 시백이 듣고 얼굴빛을 엄하게 하고 말하기를,
“왜 요망한 박씨가 감히 나를 부르느냐?”
하며 꾸짖으므로 계화가 무안한 기분으로 들어와 부인께 사연을 아뢰었는데, 박씨가 다시 계화를 시켜서 말을 전하기를,
“잠깐만 들어오시면 드릴 것이 있으니 한 번 수고를 아끼지 마시옵소서.”
하였는데 시백이 몹시 화를 내며 말하기를,
“요망한 계화를 다스려 그 요망함을 억제하도록 할 것이다.”
하고 잡아내어 크게 꾸짖고 매 삼십 대로 엄하게 다스려 돌려보내니, 계화가 맞고 울며 들어오니 박씨가 깜짝 놀라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슬프다. 나의 죄 때문에 죄 없는 네가 무거운 벌을 받았으니 이렇게 분한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고 슬프게 탄식하고 계화를 불러 연적을 주며 말하기를,
“이 연적의 물로 먹을 갈아 글을 지어 바치면 장원급제할 것이니, 입신양명하거든 부모님 앞에서 영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가문을 빛낸 후에 저처럼 운명이 기구한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이름 난 가문의 아름다운 숙녀를 아내로 맞아 태평스럽게 일생을 함께 늙도록 하십시오 하여라.”
계화가 명을 받들고 가서 앞 뒤 사연을 여쭈니 시백이 듣기를 다한 다음 연적을 받아 보니 천하에 없는 보배였다. 오히려 슬프게 여겨 지난 일을 돌아보며 스스로 책망하여 대답을 전하라고 이르기를,
“나의 어리석고 못남을 부인의 너그러움으로 풀어 버리시고 마음을 놓으십시오. 태평스럽게 즐거움을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또 계화를 불러서 너무 지나치게 벌을 내린 것을 개탄해 마지않으며 좋은 말로 달래어 주었다.
이튿날, 과거장으로 들어가 글의 제목이 발표되기를 기다려 시험지를 펼치고 그 연적의 물로 먹을 갈아 단숨에 힘차게 글을 써 내려가서 모든 사람들에 앞서 글을 바치니 글이 매우 잘 되어 고칠 데가 없었다. 시백이 글을 바치고 방문이 나붙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후에 방을 내거는데, 장원에 이시백이었다.
높은 과거장에서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온 서울 바닥에 쩌렁쩌렁 울리는데, 시백이 공손히 몸을 구부리고 대궐 앞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으니, 임금께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시고 시백을 가까이 와서 서라고 하시어 자세히 보시다가 칭찬해 마지않으시며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거듭 당부하시었다. 시백이 절하여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임금께서 내리신 어사화(御史花)를 머리에 꽂고 몸에 금과 옥으로 된 띠를 두르고 말 위에 뚜렷이 앉았으니, 바람이 가볍게 나부끼는 듯한 풍채도 좋을 뿐만 아니라 갖춘 기구도 찬란했다. 청색과 홍색이 어우러진 깃발을 앞세우고 사방을 에워싼 악대들은 앞 뒤 좌우에서 풍악 소리 장안에 진동하며 한 사람의 소년이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물밀 듯 나오니, 모습이 정말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이구나, 구경하는 사람이 누가 칭찬하지 않겠는가? 집에 돌아와 풍악을 갖추고 큰 잔치를 베풀어 며칠을 즐기는데, 이처럼 좋은 일에 박씨는 참여하지 못하고 홀로 적막한 초당에 앉아 있으니 어떻게 슬프지 않겠는가.
계화는 박씨가 빈방에서 홀로 적막하게 지내는 고초를 불쌍하게 여겨 박씨에게 아뢰기를,
“요사이 경사로 며칠씩 베풀어진 잔치에 일가친척이 아래 윗사람 없이 즐기고 있는데 홀로 부인은 참여하지 못하고 적막한 초당에서 근심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시니, 제가 뵙기에 기분이 우울하고 답답하여 매우 딱하게 여겨집니다.”
박씨가 태연하게 말하기를,
“사람의 화목하고 복록 있음과 길하고 흉한 것은 하늘에 있으니 무슨 슬픔이 있겠느냐?”
계화는 이 말을 듣고 부인의 너그러움과 어진 마음을 못내 감탄하였다.
세월이 물과 같이 흘러 이미 삼 년을 시집에서 괴롭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지내었으니, 박씨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상공께 아뢰기를,
“제가 시집을 온 지 사 년인데 친정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으니, 잠깐 다녀올까 합니다.”
하므로 공이 듣고 대답하기를,
“이곳에서 길이 수백 리 험한 길에 남자도 드나들기 어려운데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오가려고 하느냐?”
박씨가 다시 아뢰기를,
“험한 길에 드나들기가 어려운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염려 마시고 가게 해 주십시오.”
공이 말하기를,
“네가 부득이 간다 하니 말리지는 못하겠으나, 내일 장비를 갖추고 노복들을 딸려 보내주겠으니 다녀오너라.”
박씨가 또 말하기를,
“장비와 노복들은 놓아 두십시오. 저 혼자 말을 타고 가서 며칠 안으로 다녀오겠습니다. 번거로이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공이 며느리의 재주를 아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마음속으로 염려되어 잠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한시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박씨가 초당으로 돌아와 계화를 불러 말하기를,
“내 잠깐 친정에 다녀올 것이니 너만 알고 번거롭게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아라.”
하고는 그날 밤에 혼자 떠나가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니 박씨가 과연 돌아와 공에게 사흘 동안의 문안을 하므로, 공이 보고 깜짝 놀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며느리의 신기한 술법은 귀신도 짐작하지 못하겠구나.”
하며 친정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니 박씨가 대답하기를,
“아직은 건강도 여전하신데, 아무 달 아무 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공이 하루하루 처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누구라서 박씨가 축지법을 쓰는 줄 알 것인가.
하루는 공이 처사 온다는 날이 되어 혼자 바깥채에 앉아 있는데 박 처사가 들어오니, 공이 옷과 갓을 똑바로 차려입고 마당에 나와 맞아들여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잡아 앉은 다음, 그 사이에 서로 만나 보지 못했던 아쉬운 마음을 서로 이야기하며 술과 음식을 내어 대접하는데, 술이 반쯤 줄어들자 이공이 처사에게 말하기를,
“높으신 손님을 뵈오니 반가운 마음은 비길 데 없으나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처사가 대답하기를,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싶습니다.”
공이 대답하기를,
“내 자식이 못나고 변변치 못해서 귀한 따님을 박대하여 부부간에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지 못하므로 늘 깨우쳐서 삼가게 하였으나, 끝내 아비의 명을 거역하니 어떻게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처사가 대답하기를,
“공의 넓으신 덕으로 나의 보잘것없고 추한 자식을 더럽다고 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술하에 두시니 감사한 마음이 끝이 없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미안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팔자의 길하고 흉함과 괴롭고 즐거움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니, 왜 지나치게 근심하겠습니까?”
공이 듣고 더욱 미안하게 여겼다. 공이 처사와 함께 날마다 바둑과 음률로 시간을 보내더니 하루는 처사가 들어가 딸을 보고 조용히 이르기를,
“너의 액운이 다 끝났으니 누추한 겉껍질을 벗어라.”
하고 껍질을 벗고 모양을 변화하는 술법을 가르치고 말하기를,
“네가 껍질을 벗고 모양을 바꾸어 누추한 허물을 벗거든, 그 허물을 버리지 말고, 시아버님께 여쭈어 옥으로 만든 상자를 만들어 달라고 하여 그 속에 넣어 두어라.”
하고 나와 즉시 작별하는데, 아버지와 딸이 헤어지는 애달픈 정리는 비할 데가 없었다. 처사가 바깥채로 나와 공과 작별하는데 이공이 며칠을 더 묵고 갈 것을 청했으나 듣지 않고 가려고 하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한잔 술로 작별하고 문 밖에 나아가 여비를 챙겨 주며 전송하는데, 처사가 이공에게 말하기를,
“지금 작별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 내내 별탈 없이 지내시고 복록을 누리십시오.”
공이 다 듣고 나서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처사가 대답하기를,
“서로간에 떠나고 다시 만나는 것을 약속할 수 없는 심정이야 한 입으로 다 말하기 어려우나, 이번에 헤어져 산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다시 속세에 나오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공이 어쩔 수 없이 아쉽고 슬프게 여기며 작별하였다.
다음 회를 기대하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