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충렬부인이 지혜로 기홍대를 놀라게 하고 임경업에게 이 사유를 기별하여 알리다
한편, 그 여자가 독한 술을 배불리 먹고 어떻게 견디겠는가? 술이 몹시 취하여 말하기를,
“소녀가 먼길을 오느라 힘들고 피곤하던 차에 주시는 술을 많이 먹고 몹시 취하였으니, 베개를 잠깐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어찌 내 집에 온 손님을 공경하지 않겠는가?”
하며 베개를 내어 주었는데, 그 여자가 더욱 황공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기홍대가 베개 위에 누워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귀비께 하직할 때에 말씀하시기를 우의정 집을 먼저 가 찾으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에 아까 이 승상의 얼굴을 보니 단지 어질 뿐이고 다른 재주는 별로 없어 보이니 별다른 염려가 없었는데, 부인의 거동과 풍기는 기운을 보니 비록 여자이나 미간에 천지조화가 은은히 감추어져 있고 마음속에 만고의 흥망을 품고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신인이로다. 만일 이 사람을 살려둔다면 우리 임금님께서 어떻게 조선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조화술과 절묘한 계교를 내어 이 사람을 죽여서 임금님의 급한 근심을 덜어 드리고, 나의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겨 전해지도록 하리라.’
생각하고 마음속을 매우 기뻐하고 있었는데, 술이 취하므로 부인에게 또 요청하여 말하기를,
“황송하오나 자고 싶습니다.”
부인이 허락하므로 기홍대가 침상에 눕더니 잠이 들었는데, 부인이 그 여자의 잠이 든 모습을 보니 한 눈을 떴기에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윽고 또 한 눈마저 뜨니 두 눈에서 불덩이가 내달아 방안에 돌며 그 숨결에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여서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니, 비록 여자이지만 천하의 명장이라,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인이 또한 자는 체하다가 가만히 일어나 그 여자의 짐 꾸러미를 열어 보니, 다른 물건들은 없으나 자그마한 칼 하나가 있는데 이상하게 생겼으므로 자세히 보니 주홍색으로 비연도라 새겨져 있었다. 부인이 그 칼을 다시 만지려 하자 그 칼이 나는 제비로 변하여 천장으로 솟구치며 부인을 헤치려고 자꾸만 달려드는데, 부인이 급히 주문을 외우니 그 칼이 변화를 못하고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부인이 그제야 칼을 집어들고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니, 기홍대가 잠을 깊이 들었다가 뇌성 같은 소리에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잠을 깨어 일어나 앉으니, 부인이 비연도를 들고 음성을 높여 꾸짖어 말하기를,
“무지하고 간특한 계집은 오랑캐 나라의 기홍대가 아니냐?”
하는 소리가 웅장하여 종과 북이 울리는 듯하였다. 기홍대가 그 소리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부인이 칼을 들고 앉아 소리를 지르는 위엄이,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팔 년 동안에 걸쳐 패권을 다투던 때 유방과 항우가 홍문연에서 만나 잔치하는 자리에서 번쾌가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눈초리를 찢어지도록 크게 뜨면서 노려보던 위엄과 같아서 감히 말을 못하고 앉았다가, 정신을 가다듬어 아뢰기를,
“부인께옵서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소녀는 과연 호국의 기홍대입니다. 이렇게 엄숙하게 물으시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화난 목소리로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한갓 자객으로 개 같은 오랑캐 황제를 도와 그 말을 듣고 당당한 오륜의 예의를 지키는 나라를 헤치려고 하고, 너 따위 계집의 몸으로 간사한 계교를 부려 예의를 밝히려 하는 사람을 헤치려 하니 어떻게 살기를 바라겠느냐. 내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너같이 요사한 것의 간계에는 속지 않을 것이다.”
하며 성난 기운이 가득 찬 얼굴로 바로 비연도를 들고 기홍대를 향하여 겨누며 큰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개 같은 기홍대야, 내 말을 들어라. 너의 개 같은 임금이 조선을 엿보려고 하나 아직 운수가 멀었는데, 너 같은 요물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탐지하고자 하니 멀리 내 집에 와 당돌하게 나를 헤치려고 재주를 부리려 하니,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너의 귀비의 간계로다. 내 너를 먼저 죽여 분한 마음을 만 분의 일이나마 풀어야겠다.”
하고 비연도를 들고 달려드니, 기홍대가 겁나고 두려운 가운데에도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런 영웅을 만났으니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죄 값으로 화를 받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구나.’
다시 애처롭게 사정하여 빌기를,
“황송하오나 부인 앞에서 한 말씀을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소녀가 어지간히 잡스러운 술법을 배운 탓으로 시키는 것을 거역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죄를 지었사오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한 것이오나, 하늘이 밝으시고 신령님들이 도우시어 임금의 명령이 계시어 나왔다가 부인 같으신 영웅을 만났사오니, 소녀의 실낱같은 생명이 부인의 칼끝에 달렸사오니 부인의 하늘같은 마음으로 큰 은혜를 베푸시어 소녀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하며 빌기를 마지아니하는데, 부인이 매우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의 임금은 실로 짐승 같도다. 우리 나라를 이렇게 멸시하여 우리 나라의 인재를 헤치려고 하며 재주를 비웃으니, 이는 가히 한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너 같은 요물의 목숨을 상대할 마음이 아니나, 어떻게 살기를 바라겠느냐.”
기홍대가 무수히 애걸하여 말하기를,
“부인의 말씀을 들으니 더욱 후회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고 사죄하기를 마지아니하니, 박씨부인이 칼을 잠깐 멈추고 분함을 잠깐 진정하여 말하기를,
“나의 원통하고 분한 마음과 너의 왕비가 한 짓을 생각하니 너를 먼저 죽여 분한 마음을 다소나마 풀 것이지만, 내 사람의 목숨을 살해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고, 또한 너의 임금이 도리에 어긋나 분수에 넘치는 뜻을 고치지 아니하기에 너를 아직은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는 것이니, 돌아가 너희 임금에게 내 말을 자세히 전하여라, 조선이 비록 소국이나 인재를 헤아리면 영웅호걸과 천하의 명장이 다 무리들 가운데 있고, 나 같은 사람은 수레에 싣고 말로 될 정도라 그 수효를 알지 못하니라. 너의 왕비의 말을 듣고 너를 인재로 골라 뽑아서 보냈으니 조선에 나와 영웅호걸을 만나기 전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났기에 살아 돌아가는 것이니, 돌아가 왕에게 자세히 말하여 차후에는 분수에 지나친 뜻을 내지 말고 하늘의 뜻에 순순히 따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영웅과 명장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너의 나라를 치면 무죄한 군사와 불쌍한 백성이 씨도 없어질 것이니, 부디 하늘의 뜻을 어기지 말고 순종하라.”
하고 스스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의 운수가 불행한 탓이로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는데, 기홍대가 그 거동을 보고 일어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말하기를,
“신령 같으신 덕의 도움을 입어 죽을 목숨을 보전하오니,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을 머금고 하직을 하고 나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큰일을 이루어 보려고 만 리를 지척인 양 왔다가 성공하기는커녕 본색이 탄로나서 하마터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구나. 돌아가는 길에 임경업을 보아 시험하고 싶으나 성공하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하고 본국으로 바로 돌아갔다.
이때 이 승상과 노복들이 이 거동을 보고 크게 두렵고 미안하게 여겨 부인의 신령스러움에 감탄하였다.
이튿날 승상이 대궐 안에 들어가 그 연고를 낱낱이 아뢰어 올렸는데, 임금과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임금이 즉시 임경업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내리시기를,
“오랑캐 나라에서 기홍대라는 계집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이렇게저렇게 한 일이 있었으니, 그런 계집이 혹 가서 달래거나 유인하려는 일이 있으면 각별히 조심하고 잘 방비하라.”
하시고 박씨의 헤아릴 수 없는 기략과 매우 교묘한 지혜를 탄복하며 크게 칭찬해 마지않으시고 박씨에게 충렬부인 직첩(職牒)을 내리시고 일품 녹봉을 내려 주시었다.
임금이 다시 우의정 이시백에게 하교하시어 말하기를,
“만일 경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근심을 면치 못하였을 뻔하였도다.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도적이 우리 나라를 엿보고자 하여 이런 일을 한 것이니 어찌 절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차후로도 적의 괴변을 알아서 낱낱이 아뢰도록 하라.”
하시고 비단을 내려 주시었다.
뒷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들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