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徐羅伐) 5
합부가 남방으로 떠난 뒤에, 합부의 하직 글월을 받은 해명 왕자는, 아까운 늙은이를 잃었구나 탄식하였다. 직하고 고지식하고 충성되고 용감하고 다만 너무 고지식하고 융퉁성이 없는 것이 탈이었다. 융퉁성이 없어서 아버님께 신음을 못 얻었고, 또 아버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왕자 당신이 부렸더면 서로 잘 이해하여 이런 불상사가 생지기 않을 것을.
이듬해에 왕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국내를 크게 사(赦)하였다.
그러나 아버님 유리왕은 해명 태자를 그리 사랑하지 않았다. 성품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태자는 부왕을 지극히 경모하였지만, 부왕의 따뜻한 애정은 받아보지 못하였다. 임금은 도리어 그 다음 아드님 무휼(無恤)을 끔찍이 사랑하였다. 무휼 왕자는 성품도 아버님 비슷하였거니와, 어려서부터 쉽지 않은 영웅의 기품이 보이어서, 후일 부여를 복멸하고 낙랑을 복멸하여 주몽왕 건국의 대국시(大國是)를 달성한 대영웅이었다.
해명 태자는 부왕의 귀염을 못 받느니만치 어려서부터 부왕의 슬하를 떠나 살았다. 그리고 부왕이 국내 서울로 이도한 뒤에도 눌러 옛 서울 졸본에 유수하였다.
가까이 모시던 늙은 대보 합부까지 멀리 남방으로 작별하고는 사실 쓸쓸한 옛 서울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태자가 스무 살 나는 정월도 쓸쓸하게 옛 서울에서 맞았다.
그 정월에 황룡(黃龍)국의 사신이 태자께 뵈러 왔다. 황룡국은 단군조선의 부스러진 한 조각이다.
태자가 기운이 세고, 활을 잘 쏜다는 소문을 듣고, 황룡국 임금은 태자의 기운을 시험해 보고자, 사신 시켜 강궁(强弓)을 하나 태자께 바친 것 이었다.
"미신(微臣)의 나랏님께오서 태자께 강궁(强弓)을 하나 보내옵니다."
하면서 가지고 온 활을 태자께 바쳤다.
태자는 황룡국 임금이 내 힘을 시험해 보려는 것을 알아챘다.
"응 그래? 어디 보자. 얼마나한 강궁인지…."
태자는 활을 받았다. 활의 줄을 잡아당겼다. 활은 끝이 서로 맞닿도록 굽어 들었다. 그것을 그냥 당기니까, 지끈 소리를 내며 활은 꺾어져 버렸다.
"어디 강궁이냐? 내 아이의 힘에도 부러지니."
강궁이라고 바쳤다가 태자께 맹랑히 꺾이고 황룡국의 사신은 얼굴을 붉혔다.
황룡국 사신이 돌아간 뒤에, 태자의 시신이 그 활을 집어 보았다. 집어 보고 깜짝 놀랐다. 천하무류의 강궁이었다. 황룡국 왕이 강궁이란 이름을 붙여 보냈더니만치, 짝이 없는 강궁이었다.
태자가 기운이 센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센 줄은 시신도 뜻밖이었다.
"태자님, 이것을…."
아연하였다.
"응, 강궁이더라. 황룡국에서 우리나라를 시험해 보려는 눈치이기에, 분질러 벼려서 그 뜻을 보였다."
아아, 이 태자가 장차 임금이 되시면 우리나라는 더욱더욱 훌륭해지겠구나. 시신은 경악 가운데서도 공열(恐悅)을 느꼈다.
수일 후, 황룡국에서, 이번은 아버님 되는 유리왕께 사신이 또 왔다.
태자가 하도 영웅이시라니 한번 만나 뵈오면 좋겠다는 황룡왕의 뜻이었다.
고구려의 신하는 보내면 안됩니다고 하였다. 황룡왕이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우리 태자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태자를 귀여워하지 않는지라,
"이웃 나라 임금이 태자와 상견하자는데, 안 보내면 예가 아니라."
하여 태자께 가라고 분부하였다.
이 분부가 졸본 옛 서울 태자께 전해지자 태자의 시신들은 울면서 태자를 붙들었다.
"이웃 나라 임금이 연고 없이 보자는 것은 그 뜻을 모를 일이옵니다.
아무리 나랏님의 부분이실지라도, 이 일만은 못하십니다."
그러나 태자는 가벼이 여기었다-.
"하늘이 나를 죽이시려면, 자리에 누웠을지라도 죽는 게요, 하늘이 안 죽이시려면, 활로 쏘아도 안 죽는 법이니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께 달렸으니, 하늘께 달린 일 때문에 아버님 분부를 거역해 불효가 되어 무얼 하랴."
그러고는 단신 황룡국으로 갔다.
해명 태자가 황룡국 사신의 인도로 단신 황룡국 서울에 이르러서, 성하에 까지 오매 황룡국에서는 그 나라 신하 세 명이 성문까지 맞이나왔다.
해명 태자는 그 황룡 신하가 몸에는 튼튼히 무장하였고 기색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 이 무리가 당신을 해할 임무를 띠고 나온 줄 짐작하였다.
아버님의 분부라 거역치 못하고 오기는 왔지만, 황룡국에서 당신을 해하려 해도 그냥 해를 받으라는 분부는 아버님께 받지 않았는지라, 황룡국인이 수상한 행동 시작하면, 당신은 당신대로 취할 일을 따로이 생각하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때 성 밖 쪽에서 노루가 한 마리 비틀거리며 앞에 까지 와서 쓰러진다.
보니 이마에 살이 하나 박혀 있어, 어느 사냥꾼에게 맞고 예까지 달려와서 쓰러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살 박힌 자리를 보고 태자는 흥미를 느꼈다. 우연히이면 모르지만, 일부러라 하면 천하에 쉽지 않은 명궁수의 쏜 살이었다. 살은 양미(兩眉) 의 정중(正中)에 박혀 있었다.
눈을 들어 둘러보았다. 누구가 활을 쏘았는가 하여….
그때, 그 활을 쏜 사람이 노루를 찾아서 달려왔다. 달려와서는, 노루보다도 태자를 보며, 한 무릎 끓어 절하였다-.
"아이, 태자님!"
아버님 유리왕이 사물(沙勿) 지방에서 만나서 신하로 삼은 위사물(位沙勿) 이었다.
"아, 어떻게?"
"태자님, 모시오리다. 귀국하실 때도 모시고 가오리다."
황룡 신하들은 이 뜻 안한 방해인에 혀를 채었다. 그러나 고구려인이 고구려 태자를 모시겠다는데 거절할 핑계가 없어서, 하릴없이 사물씨까지 함께 성안에 들어갔다.
사물은 태자의 곁에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큰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의 손에는 언제든 손창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놓는 일이 없었다.
사물은(뒤에 안 일이지만) 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따라온 것이었다.
내내 먼발로 태자를 지켰다. 그러다가 태자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노루를 쏘아서 태자께 접근할 기회와 핑계를 얻어 가지고, 태자 곁을 잠시 한때 떠나지 않고 태자를 지킨 것이었다.
황룡왕은 태자의 곁에 사물까지 모셨는지라, 손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내내 좋은 낯으로 환대하여 돌려보냈다.
황룡국 사건은 이렇듯 끝이 났다. 이 일로 태자의 마음은 언짢고 슬펐다.
아버님은 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안 사랑하실 뿐 아니라 미워까지 하시는가. 나는 아무리 돌아보아야 아버님께 실수한 일은 없다. 아버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예나 이제나 일반으로,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 세상의 어느 아들에 지지 않게 아버님을 경외하거늘, 아버님은 왜 나를 미워하시는가.
인품으로든 역량이로든 누구에 비길지라도 부족없는 당당한 아들이거늘 갓나서 어머님을 여의고, 오직 나를 사랑하여 줄 분은, 아버님밖에 없거늘, 이 외로운 자식에게 동정도 안 가시는가.
아버님은 동생 무휼(無恤)을 사랑하신다. 무휼은 그 사람됨이 나보다 낫〔優(우)〕 다. 아버님은 무휼 왕자로 하여금 뒤를 이어 장차 무휼로써 고구려나라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더 크고 훌륭하게 하고 싶으신 욕망 때문에, 태자되는 나보다도 나도 동생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다. 태자로서도 안다.
태자 당신보다 동생 무휼이 더 사람됨이 나음을.
그런지라, 나라를 위하여서라도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 않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분부만 하시면 깨끗이 태자 당신은 물러 앉을 용의도 있다.
태자 당신의 마음은 그렇거는 아버님께서는 그저 미워하시고, 자식에게 죽을 구덩이까지 지시하시니, 이것이 딱하고 민망하고 슬펐다.
황룡국에서 이번에 죽고 말았더면 아버님은 도리러 만족하였을는지도 모르나, 불행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 때문에, 어버님의 마음은 불만하실 것이다. 태자의 나이 갓 스물의 아직 소년이지만, 그 사람됨이 비범하여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이 태자가 등극하는 날은 부조(父祖)께 지지 않는 휼륭한 임금이 될 것이라고 기대가 컸지만, 태자의 아우님 무휼왕자는 태자보다도 월등하게 훌륭하였다. 아버님 유리왕은, 하늘이 고구려를 크게 만드시고자 이런 위대한 왕자를 주셨거늘 왕자의 위에 태자가 있어서, 무휼 왕자가 임금 될 앞길을 막고 있다 하여, 태자를 미워하고 대승적 입장에서 태자가 없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다. 해명(解明)이 태자로 있는 것은 국가 발전에 지장이 된다 보아 태자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태자의 마음으로는 아버님이 ‘너 죽거라’하시면 죽기도 그다지 싫지 않은 바이나, 아버님으로서는 또한 아드님께 죽으라는 분부는 힘들 것이다. 그 아드님이 특별히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어버이의 마음이 왜 밉기야 하랴) 아랫아드님이 더 귀엽고, 겸해서 국가적 안목으로 작은 아드님 등극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태자의 존재가 싫었던 것이다.
‘무휼아."
"네?"
"장차 네가 임금이 되면 참 좋겠구먼. 네가 고구려의 임금이 되면…."
"저는 작은 아들이 아니오니까? 형님 계신데 제가 어떻게 임금이 됩니까?"
"내가 없으면 말이다. 내가 없으면 좋겠지?"
"무슨 말씀을…."
그 태자 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