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언(前言)
우리의 사는 이 거룩한 땅은, 아득한 반만년 전의 옛날 우리의 성조(聖朝) 단군(檀君)께서 세우신 나라이다.
단군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금에서 거꾸로 거슬러 우리의 법통(法統)을 찾자면 이씨(李氏)의 이룩한 대한(大韓)과 및 대한의 전신인 이씨조선(李氏朝鮮) 의 오백여 년, 그 전에는 왕씨(王氏)의 고려(高麗)가 또한 오 백년, 왕씨 고려의 전에는 약 이백 년간 법통이 모호히 되었다가 그 전에는 고씨(高氏)의 고구려(高句麗) 팔백 년― 그 전에는 아득한 고대(古代)라 기록이 상세하지 못하나, 고구려는 부여(扶餘)를 잇〔繼(계)〕고 부여는 단군(檀君)에서 ― 이렇듯 우리의 반만년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
단군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로― 우리 민족의 기록술이 아직 발달 되지 못하였던 시절이라 단군시대에 몇 임금이 위(位)를 계승〔‘단군’은 한 분이 아니라 제일대는 ‘단군 왕검(王儉)’이시오, 마지막대는 ‘단군 해모수(解慕漱)’ 시요, 중간 몇 대인지는 알 수 없다〕하였는지는 알아볼 바이 없으나 성조 단군이 지금의 만주땅 아사달(阿斯達)에 처음 나라를 세우실 그때는 여러 종류의 민족이 지금의 만주며 조선반도 이곳저곳에 무수 한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통일된 한 종족으로 나라를 이룩 한 단군조선 민족은 다른 민족들을 혹은 동화(同化)하며 혹은 구사(驅使) 하며 혹은 격멸하며, 서(西)로는 요(遼)지방으로, 남(南)으로는 반도(半島) 로, 차차 팽창하였다. 만주평원에 점재(点在)해 있던 말갈(靺鞨) 그 밖 여러가지 종족이며, 반도에 점재해 있던 왜종(倭種) 그 밖 여러가지 종족들은 이리하여 단군조선의 품안에 포옹되거나 혹은 멀리 쫓겨가거나 했다.
이 단군조선〔환(桓)국 혹은 진(辰)국이라 일컫는다〕의 서쪽에는 지나 족(支那族)이라는 종족이 있어서, 침략기술에 능하여, 그들의 침략 기술은 단군조선의 보고(寶庫)요 옥토(沃土)인 지금의 중부 조선 지방을 점령 하고 그 곳에 낙랑(樂浪) 등 그들의 식민지를 두어서, 조선의 지역은 허리를 끊기어 두 조각이 나게 되었다.
두 토막 난 그 남부(南部)는 환웅(桓雄)을 전설적으로 숭배하는 종족이라, 차차 와전(訛傳)되어 한(韓)으로, 다시 삼한으로― 이리하여 마한 진한 변한(馬, 辰, 弁韓)의 삼한이 되었다.
북방에 남은 단군족속― 단군의 직계 후손인 종족은, 역사상 부여족(扶餘族) 이라 일컫는다. 부여가 단군의 법통 후계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부여〔부여라는 말은 나라의 이름도 되고 종족의 이름도 되고 지역(地域)의 이름도 된다. 여기는 부여 지역을 말한다〕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 이 생겨났는데, 옛 전설로 보자면 동명(고주몽)의 아버지가 ‘천제(天帝) 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였고, 또한 동부여의 임금이 ‘천제 해모수’ 의 아들 해부루(解夫婁)라 하였으니, 동명과 해부루는 결코 남이아니요 동명이 부여 지방에 고구려나라를 세운 것은 또한 떳떳한 일로서 고구려나라는 단군의 법통 후계국인 것은 뉘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동명이 북쪽에 고구려나라를 이룩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세째 아들 고온조(高溫祚)를 멀리 남으로― 한(漢)족의 식민지인 낙랑 지역을 넘어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한(韓)족〔단군 후예〕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 이었다.
그 뒤로는 허리를 끊긴 중부 반도 지방에서, 한족〔漢族一韓(한족일한)과 漢(한)이 섞갈리기 쉽겠으므로 이하는 ‘漢(한)’은 ‘지나(支那)’ 족이라 일컫는다〕을 도로 제 땅 지나로 내쫓는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아버지 동명 고주몽이 이룩한 고구려와 남쪽에서는 아들 고온 조가 이룩한 백제― 이 두 단군 후예의 나라는 남북으로 협격하여, 고구려 세째 임금인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에는 이 반도 안에서 지나종족을 완전히 물리쳤다.
북부 대륙에는 고구려, 반도의 서남쪽에는 백제, 반도의 동남쪽에는 또한 단군 후예로서 서라벌〔뒤에 계림으로 또 다시 신라로 이름을 고쳤다〕이, 원주민(原住民) 인 왜종(倭種)이며 그 밖 잡종들을 소탕하며 나라를 이룩 하여, 단군 후예는 완전히 동방의 전역(全域)을 차지하였다.
지나며 일본의 옛 기록에도 ‘백제다사(百濟多詐)’라, 혹은 ‘백제 반복 무쌍’ 이라 하여 백제국의 무신함을 통매하였거니와, 단군의 손이 아직 남쪽까지 및기 전부터 그 땅에 살던 여러 가지의 원주민을 합친 오 합지 중으로 성립 된 백제국이라, 자연 그 국민성이 불건전하게 된 것이다. 뒷날, 단군 후예의 통솔자요 보호자요 겸해 지도자인 고구려가 수(隋)나라며 당(唐) 나라와 사투(死鬪)를 할 때 백제는 도로혀 몰래 사신을 수나라며 당나라에 보내서,
"상국이 포학한 고구려를 치시는 이 때, 신국(臣國)이 향도자가 되어 길을 인도하겠읍니다."
고 하여 되려 수며 당에게 꾸중을 들은 만치 반복무쌍한 백제―.
또는 내 나라이 하도 미약하기 때문에 왜(倭)에게까지 굴복하여 지내는 신라, ―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에 호태왕은 그때 왜에게 침략받은 신라를 구해 주기 위해서, ‘오만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이천여 리의 먼 길을 지금의 김해(金海) 땅까지 달려가서, 거기 있는 왜군을 잔멸시킨 일이 있다〕 ― 그 신라는 나중에 도로혀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당나라와 힘을 아울려, 동방 수호의 대국 고구려를 꺼꾸러뜨린 것이다.
이러한― 반역적 색채를 다분히 띤 두 나라를 남쪽에 두고, 단군 후예의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자 건투하는 고구려. 당년의 천하는 과연 단군 후예와 지나 종족의 두 큰 덩어리로 나누이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딴에는 자기네가 인류의 꼭두머리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지나 종족에게는, 고구려라는 나라이 단 하나의 가시〔荆(형)〕였다. 고구려만 없어지면 천하에는 지나(支那)만이 남는다.
그러나 지나는 스스로 끼리끼리의 다툼을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外敵) 고구려를 곁눈질할 여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수(隋)나라 때에 비로소 지나 사백 주를 통일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한 덩어리가 되면서는 그 합친 힘을 즉시로, 개벽 이래의 가시〔荆(형)〕 인 고구려에게로 향하였다.
작게는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크게 부딪치기를 네 번― 고구려 부서져라 하고 온 힘 다하여 부딪치기 네 번, 고구려는 끄떡도 안하고 도로혀 부딪친 수(隋) 나라가 부서져 나갔다.
수나라이 부서져 나가고, 대신 생긴 당(唐)나라 역시 지나족의 나라다. 단군 후예를 없애려는 전통적 사상 위에, 수나라 원수를 갚겠다는 사상까지 겸친 나라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이끈 대군은 연하여 몇 번을 와서 또 부딪쳤다.
그러나 도로혀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장수 양만춘의 쏜 살에 눈깔 하나를 잃고, 참패 참패만 거듭하다가, 당태종은 종내 분통이 터지어서 죽으며, 그 임종의 유언으로써까지, 고구려를 꼭 멸하기를 부탁하였다.
뼈에 사무치게 부탁받은 고구려 복멸― 그러나 당나라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고구려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당나라에서는 연구한 결과, 단군 후예의 겨레의 델리케이트한 형세를 알아내었다.
당나라에서는 우선 단군 후예 중의 한 나라인 백제를 없이했다. 길을 닦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번은 신라에 공작하였다. 단군에서 벌써 삼천여 년, 단군 후손의 긍지라는 관념은 신라인의 머리에는 이젠 거진 없어진 때라, 신라를 동방의 맹주로 삼아 준다는 달큼한 발림으로 신라를 달래어서 당나라 손아귀에 넣었다.
이리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한 군대는 남쪽에서, 당나라 홀로의 군대는 북쪽에서, 남북에서 고구려를 들이쳤다.
고구려는 나라를 수호하던 큰 기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가고 그 뒤를 이었던 연개소문(淵蓋蘇文) 또한 가고, 좋은 승계자 아직 생기지 않은 위에, 겸해 그 새 수나라의 공격, 당태종의 공격에 끄떡도 않기는 하였지만, 그때 커다란 트집은 벌써 갔었다.
그 상처가 아직 낫기 전에, 또한 안으로 국내의 반역과 신라의 반역에, 당나라의 결사적 공격까지 겸쳐서, 동명성제 고주몽이 단군의 뒤를 계승 하여 이룩 했던 고구려는 이에 꺾어졌다.
이 「동방삼국지」는 고구려 팔백 년간의 건투사(健鬪史)와 그 시대에 서남과 동남에서 한 구실을 맡아 한 백제 칠백 년, 신라 일천 년의 외사(外史) 를 체계 있게, 흥미있게, 각 시대의 영웅과 열사를 붙들어서 그들의 활약에서 움직이는 동방 삼국의 동태를 소설화해 보려는 것이다.
연(延)시대 삼천 년에 가깝고, 등장하는 인물이 주요한 자도 수백 명이 될것이요, 관련되는 국가가 〔주인공 격인 동방 삼국 밖에〕 지나에도 기복(起伏)된 자 백여 국의, 그것도 역사가 아니요 소설화된 이야기니, 합계 몇 권이 될지 작자로도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쓰는데 몇 해 걸릴지도 미리 짐작 할 수 없다. 그저 부지런히 써 나갈 뿐이다.
그동안 건강이 지속되기만 충심으로 바랄 뿐이다.
단군의 법통 후계자가 없어졌으면, 그래도 단군 후손인 백성들을 현재 품에 품은 신라가 이 빛나는 전통을 계승해야겠거늘, 신라는 자신이 고구려를 멸한 책임자이니만치, 신라는 단군과는 관계 없는 듯이 뚝 떼어 버리고, 단군 법통은 고구려 복멸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진 듯하였다.
고구려의 한 지족(支族)인 여진족이 모국(母國) 고구려 복멸을 아껴서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터에 ‘발해(渤海)’국을 이룩하고 자기는 고구려의 뒤라 하며,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을 불러 품었지만, 그 임금 대조영(大祚榮) 이 단군 후예가 아니니, 고구려의 계승자라 할 수 없다.
몸을 의탁할 나라를 잃은 고구려 유민들은 그래도 하릴없이 발해국에 투신하고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터는 쑥밭이 되어 버려서, 이러한 참담한 세월을 겪기 이백 년, 고구려 옛터의 끝 송도(松都)에 고구려의 유민 왕건(王建) 이 일어서서 왕씨고려(王氏高麗)를 세우매, 몸둘 곳 없어서 방황하던 고구려의 유민은 죄 왕씨고려로 몰려들었다. 압록강 이남, 평양 이북, 그 새 이백 년간 쑥밭으로 묵던 빈터는 삽시간에 고구려 유민으로 가득 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고려로 다시 단군 법통을 이었다.
왕씨고려에서 다시 이씨조선으로,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잠시 한때씩 그 법통이 끊겨 본 일은 있지만 사천삼백 년 전에 우리의 성조 단군이 세우신 위대하신 기업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신라의 후인인 고려 사가(高麗史家) 김부식(金富軾)이 의식적으로 단군을 역사상에서 말살하려 한 것은, 신라를 고구려보다 추켜세우려는 좁은 야심에서 생겨난 일이요, 일본인이 단군을 말살하려 한 것은 우리나라의 건국 이 일본의 건국보다 뒤졌다고 억설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여독은 가장 악질로 아직 남아서, 우리나라 사람은 대개 고구려는 모르는 웃지 못할 희극의 현재 상태다.
끝끝내 일본(왜)을 누르고 멸시하고 천시한 팔백년 고구려는 일본인에게는 뼈에 사무치도록 분하고 미울 것이다. 일본보다 훨씬 문화가 앞섰던 고구려는 일본에게는 절통하게 샘날 것이다.
이 고구려가 오늘날의 조선민족의 법통의 조상이라기는 일본인의 입장으로는 과연 싫을 것이다. 그래서 꾸며 대어 말하기를, ‘고구려는 만주(滿洲)라 조선과는 관계 없다’…고.
고구려 전성시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로 널리 벋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서울이 압록강 연변이요, 건국 얼마 뒤에는 평양으로 이도(移都) 를 하여서 평양서 종신까지 한 고구려며, 단군 이래로 전통적으로 남하 책(南下策)을 쓴 고구려가 아니뇨. 일본인이 빚어 놓은 ‘만주국’도 염치에 자기네가 고구려의 후라는 말은 감히 못하였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움에 그 국호(國號)만 계승한 것이 아니고, 민족을 계승하고 전통을 계승하고 민습(民習)을 계승하고, 건국초부터 마지막 우(禑)왕에 이르기까지 요동(遼東- 옛 고구려 영토)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거늘, 고구려의 볍통은 신라에게 완전히 망했다, 고구려는 만주라는 소리가 어디서 감히 나오랴.
고려 왕씨를 계승한 조선 이씨도 단군 이래의 전통인 피의 가르침으로, 북쪽 땅을 찾으려는 운동은 늘 계속되었고, 북쪽 땅에의 애착은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다 그 까닭이다.
우리의 역사가 이러하거늘 야스꺼운 사가(史家) 김부식(金富軾)과 일본인의 악독한 정책 때문에, 고구려는 어느 남의 나라의 이야기인 듯이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은 유감된 일이다.
지나의 역사가 진수(陳壽)는 삼국지를 찬술함에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촉한(蜀漢)과 오(吳)를 윤(閏)으로 잡았다. 이것은 옳은 필법으로 한실(漢室) 의 뒤를 곧 물려받은 ‘위’가 떳떳한 정통일 것이다. 한낱 시정의 신 장수로 표랑하던 유현덕(劉賢德)은 다만 그 성씨가 황실과 같다는 근거뿐으로 자기가 정통이로라고 주장하였거늘, 주자(朱子) 일파에서는 도로혀 촉 한 의주장을 옳다 보고 위씨의 나라를 부(副)로 꼽았다.
당시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주자 일파의 대의 명분 론(大義名分論)을 줏대로 ‘삼국지 연의’를 저술하여, 이로써 진수의 의견을 깨뜨렸다.
이 덕으로 멀리 조선의 시골 노파까지라도 조조의 이름을 알고 제갈량의 이름을 알게 된 형편이다. 그와는 사정이 달라서, 마땅히 정통으로 잡아 야할 고구려가 어떤 몇 개인의 농락으로 아래 깔린 것은, 그 후손된 우리로서 마땅히 시정해야 할 일이다.
지나의 삼국지가 약 사십 년간의 역사를 이야기로 기록한 것이 그런 방대한 책이 되었으나, 고구려 팔백 년은 그 이십 배라 같은 비례로 이십 배의 지면(紙面) 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재간은 우리의 형편으로도 절대로 못할 노릇이요, 작자의 정력과 건강상으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깎고 다듬고 갈아서 그 요지만을 적어야 할 터이니, 이로써 작자의 하고 싶던 의견이 넉넉히 발표될 것인지, 따라서 독자가 충분히 이해 할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인지, 스스로 위태롭다.
그러나 이 저술은 작자가 오래 전부터 벼르던 일이요, 또한 단군 후예의 겨레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저작물이며, 겸해서 둘러보아야 현재는 내가 가장 적임자라는 생각 아래서 대담스러이 이 붓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얼마나한 기럭지로 끝날지, 다만 성심 다하여 이길고긴 이야기를 써 내려갈 뿐이다.
범례(凡例)
거금 이천 년 전 단군(檀君) 후예(後裔)의 민족으로써 이룩하여졌던 세 나라 ―고구려 백제 및 신라― 의 정립(鼎立) 일천 년간의 기 복사(起伏史) 를매 나라를 단위로, 그 시대를 움직인 제왕(帝王)이며 영웅들을 등장인물로 온 동방(東方)과 거기 연접한 지나(支那) 지대를 무대로 체계있게 엮어 내려 보려는 것이 이 ‘이야기’다.
잃어버린 역사 기록, 잊어버린 풍습 제도, 찾아 낼 수 없는 강역 경계(疆域境界), 알아볼 바이 없는 혈족 계통, ―아주 박약하고 모호한 사료(史料) 를 근거 삼아 한 개 이야기를 꾸미자니 말하자면 적지 않게 무리한 일이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손대기가 스스로 겁나고 주저되고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만치 누구든 아직 손대 보지 못했고 손대 볼 생각도 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일찌기 남이 손댈 생각도 내 보지 못했던 일을 대담스러이도 착수 한다는 것은, 무슨 남보다 낫〔優(우)〕다는 자신이든가 자부가 있어서 하는 노릇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는 꼭 있어야 할 ― 없으면 안 될 우리의 경과기(經過記) 며, 이런 종류의 ‘경과기’는 사(史)학적 기록보다도 ‘소설 체재’ 의 기록이 더 효과적(效果的)이라는 의미 아래서 이 나라의 국민 된 책무와 이 나라의 소설가 된 책무로써 손을 대게 된 것이다. ‘역사소설’이 아니고 ‘소설 역사’ 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원이 서력(西曆) 기원보다 뒤지기 겨우 수십 년의, 진실로 태고적의 일이요 그 시절의 땅〔地域(지역)〕이 지금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물〔江(강)〕이 어느 물에 해당하는지, 따라서 어느 방향(동∙ 서∙ 남∙ 북)에 해당하는지, 몇 리 길 혹은 며칠 길이 되는지 전혀 상고할 바이 없고, 「여지승람」의 판단도 신빙키 힘든 곳이 많고, 이즈음의 학자들의 판정도 독단이 많아 그대로 좇을 수 없어서, 소설체재로 꾸미기는 기초부터 거진 무리한 일이다.
게다가, 풍습 제도 관급(官給) 등에 관해서도 기록이 전혀 없고,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포인트가 몇 개 있다 할지라도, 나라 수효로(가락까지) 네 나라에 나라마다 각기 다른 연세월(延歲月) 삼천여 년 간 끊임없이 변동 된 풍습, 제도라, 소설 기교상 처리하기 지난한 일이다.
또한 언어(言語) 문제로 볼지라도 처음은 성조 단군이 업을 일으키신 그때의 것이 온 민족의 표준어였을 것이나, 단군 때에서 흐르기 이천 수백 년, 퍼져 나가기를 수천 리, 삼국 건국 당년에는 자연의 세로서 고구려의 말〔語(어)〕에는 지나 계통의 말이, 또는 백제 신라 등에는 원주민(原住民) 등등의 말이 적지 않게 포섭, 동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법(語法)이며 특별한 민간 귀중어만이 원형(原型)을 계승하고 형용사 부사 감탄사 등은 삼국 정립 당년에는 세 나라이 서로 통하기도 힘들 만치 달라졌을는지도 알 수 없다. 무론 오늘날 우리가 쓰는 우리말과는 어법(語法)만이 같을 뿐이요 다른 점으로는 비슷도 안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꾸미는데 이런 문제들은 모두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무론 지금에 앉아 이천 년 전 옛 말투를 찾아 낼 수도 도저히 없거니와, 찾아 내어 소설상의 회화(會話) 등에 고어(古語)를 그대로 쓴다 할 지라도 독자들이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요, 일일이 주(註)를 달아서 편익을 돕는다 할지라도, 그런 불편하고 쑥스러운 일은 다시 없을 것이며, 대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에서는 지문(地文)과 대화(對話)를 아울러 현대어로 하기로 하였다. 다만 좀 심한 현대어, 예컨대, 인텔리 청년들만이 사용하는 새 형(型)의 용어는 피하고, 사오십 내지 오륙십 세 가량의 사람이 사용하는 국어로 기준하였다.
작자는 일찌기 적지 않은 사담(史譚)을 썼는데, 그 경험으로 미루어, 가장 무난 하다고 인정되는 한어(韓語)를 여기도 쓰기로 한다. 현대인이 옥편을 뒤적이지 않고는 알아보지 못할 옛말은 피하고, 오륙십 세 이상의 노인이 알아보지 못할 새 말도 아울러 피하고, 이즈음 사극(史劇)계에서 사용하는 야릇한 용어〔文語體(문어체)를 會話體(회화체)에 誤用(오용)하는〕도 피하고, 가장 무난한 중간어를 취하였다.
민족 계통으로 따지는 데는 진(秦)이건, 한(漢)이건, 당(唐)이건 몰아 ‘지나(支那)’라 하였다.
좌우간 작자부터가 그 풍습이며 제도 회화체 등을 전연 모르는 이천 년 전의 옛 이야기를 쓰자니 막대한 부자연미와 어색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목표한 바가, 옛날의 제도나 풍습을 알리고자 하는 바도 아니요, 또는 소설상 ‘리얼’의 형태를 알리고자 하는 바도 아니요, 그 새 이천 년간을 그릇된 관념 때문에 잘못 전해진, 또는 최근 몇 십 년간 악의로 개조된 우리의 선인의 걸어온 자취를 시정하여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 그 목적한 바에 추호만치라도 도움이 된다면 작자로서는 만족한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