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類利) - 2
나라를 맡은 유리 신왕은 능란하게 모든 정무를 치렀다. 뒷대궐에서 고요히 이를 관찰하고 있는 주몽왕은 이만했으면 마음 놓인다고 안심하였다.
그 여름,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는, 어머님 소서노 왕후를 모시고, 직속된 십여 신하와 삼천 병졸을 인솔하고 남방으로 향하여 졸본 서울을 떠났다.
두 왕자가 아버님과 형님께 하직할 때에, 아버님 주몽왕은,
"크게 되거라. 못해도 이 아비만은 하게 되거라. 이것만을 아비는 진심으로 바란다."
고 축복하였다.
백성들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 떠나는 까닭을 발표하지 않았는지라, 공론이 구구하였다. 부여에서 맏왕자가 오매 곧 그를 태자로 봉하고, 뒤 이어 주몽왕이 물러앉고, 태자가 위에 오르고, 또 뒤이어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는 이 나라를 떠나서, 중간의 낙랑(지나인 식민지)도 지나서 남방으로 간다 하므로, 거기는 무슨 가정적의 중대한 알력이라도 생긴가 하여 수근거리고, 이 떠나는 왕자들을 동정하고 사모하여, 적지않은 백성이 그 뒤를 따라, 본국을 떠나 남방으로 향하였다.
아드님(두 왕자)을 떠나보내자니 섭섭하기는 하였다. 더구나 이것이 영 이별이요, 다시는 볼 기회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그 섭섭한 정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왕자네들을 위함이요 또한 겸해 큰 이상을 위해 떠나는 이별이라 하니, 모든 것이 단념되었다. 더우기, 주몽왕 당신이 이십 년 전, 어머님 유화부인의 앞을 떠날 때 적(敵) 가운데 남는 유화부인은 얼마나 마음 섭섭하고 불안하였으랴.
그때에 희망에 불붙는 열혈의 청년이던 주몽왕 당신은, 어머님 슬하 떠나는 것도 그다지 서분하게 안 여기었지만, 어머님으로는 얼마나 섭섭하였으랴.
지금, 두 왕자도 오직 희망에 불타는 열정으로 아버님 슬하와 고국을 떠나는 것도 아무 섭섭함도 안 느낄 것이다. 그들의 장래와 그들이 하려는 일 의장래에, 하늘의 도우심과 복이 많이많이 내립소서 ― 두 왕자를 떠나 보내며 주몽왕은 속으로 한없이 한없이 축수하였다.
그 구월에, 주몽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니고 왔던 위대한 사명을 순순히 다 치러 놓고, 그가 이룩한 고구려나라의 서울, 그가 세운 대궐 안에서, 이 나라 신왕과 사랑하는 부인 예씨와 원로 대신들의 간호 아래, 사십 년의 짧으나 또한 위대한 일생을 마치었다.
앓지도 않고 그저 고요히, "내 할 일은 다 했다." 의 한 마디를 남기고, 고요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 참 양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이 만치, 그는 마음 온화하게 승하한 것이다.
그를 숭앙하는 마음으로 그를 동명성제(東明聖帝)라 불러 모시고, 용산(龍山) 의 길한 땅에 그의 거룩한 주검을 묻었다.
아드님 유리왕 ― 아버님 생전에 손목 잡혀 지도받았고, 아버님 생전에, 훈련 받은 신하와 백성의 위에 올라앉았고, 또한 국시와 정치 운용 방침이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는 국가라, 아주 용이하게 다스릴 수가 있었다.
새 임금 유리왕, 동부여에서 금와왕 때에 탄생하였다.
동부여 태자 대소(帶素)가 그때 이름없는 소년이던 주몽왕의 너무도 걸출임을 저퍼하여, 박해를 가하려는 눈치가 보이므로 동부여를 탈출하여 피할 때에, 유리왕은 그때 어머님 예씨의 뱃속에 있었다.
동부여를 탈출함에 임하여 주몽은 안해 예씨에게 작별하며,
"나는 남방으로 가서 뜻대로 되면 그곳의 임금이 될 터인데, 그대가 낳는 애가 만약 사내애거든, 잘 길러서 이 뒤에 내가 임금 되어 있는 곳으로 보내라. 그 애가 나를 찾아올 때에 내 자식이라는 증거물로써 내게 자기 신분을 증명할 무슨 물건을 이곳에 감추고 가노니, 그 물건을 찾아 내어 가지고 내게로 오게 하라. 그 물건을 가지고 오는 아이면 나는 내 아들로 인정을 하겠다."
무슨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감추어 둔 곳은,
"일곱 모 난 바위 위에, 소나무 아래."
라 하였다.
그 뒤 예씨는 옥 같은 사내애를 낳아 가지고,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귀히 길렀다. 소년은 예씨의 아버지인 외조부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랐다.
아버지가 무엇인지, 할아버지가 무엇인지, 구별할 줄 모르는 소년(유리라 이름지었다)은, 어머님 슬하에서 ― 좀 뒤에는 할머님 유화부인까지 합한 어른들의 귀염을 오로지하고 고이고이 자랐다.
예씨는 얼마 뒤, 지아버님 주몽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이룩하고 그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성공하셨구나. 이곳에 아무 것도 모르고 자라는 아들 유리는 그럼 고구려라는 나라의 태자요 장차 고구려 임금이 될 귀한 아이로구나.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어머님이랑 그 밖 사정에 얽매여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아버님이 떠날 때 부탁도 있었고 시어머님 유화부인의 지휘도 있어서, 그 소년을 장차 임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한 교양을 베풀면서 장래의 기회를 기다리며 마음만 죄이고 있었다.
유리 소년은 조금 자라서는 내가 지금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는, 실상은 어머님의 아버지요,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은 알았다. 그러나, 할머님과 어머님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는 유리 소년으로서는, 아버지 없는 불만은 느껴보지 않고 자랐다.
유화부인은 간간 며느리 예씨에게, 이 애를 아버님께 보내야겠구나 하고 걱정도 하였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유화부인은 이곳을 못 떠날 줄 아는 예씨 로서는, 시어머님 버려 두고, 나만 내 자식 데리고 떠날 수도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와 전후하여 부여 임금 금와왕도 승하하였다.
태자 대소가 등극하면서는, 금와왕이 유화부인이며 예씨에게 하던 후한 대접은 없어지고, 그 대접이 아주 고약하게 되었다.
시어머님 유화부인은, 금와왕의 후한 대접을 뿌리치지 못해서 그냥 동 부여에 머물러, 아드님이 남방에 임금이 되었는데도 그리로 가지도 못하고 의리를 지켜 왔었다. 지금 유화부인도 없고 금와왕도 없는 이 동부여는, 예씨 모자의 그냥 있어야 할 아무 의무며 의리가 없었다. 더우기 신왕 대소가 그 대접까지 고약하게 하니, 있기 어렵기도 하였다.
지아버님의 나라 고구려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못가게 붙들어 두고, 감시까지 엄중하였다. 열댓 살의 소년 유리는 할머니와 어머니 두 과부의 아래서 길러나느니만치, 비록 왕자(王者) 교육은 받고 있다 하나, 밸 세고, 떼 세고, 고집 세고 ― 소위 과부의 자식 태는 자연히 가져졌다. 혼자 있을 때거나, 사내 어른을 대할 때는, 제법 어른 같고 왕자 같은 위엄성까지 있었지만 여느때는 어리광까지 부리기 일쑤였다.
그 유리 소년이 어떤 날 길에 나가서 놀다가 앞의 소나무에 참새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참새를 잡으려 돌멩이 몇 개를 주워 가지고, 참새를 겨냥하여 돌을 던졌다.
그 돌은 참새는 못 맞히고, 불행히 물 길어 가지고 길 가는 여인의 물동이에가 서 맞았다.
동이가 깨지면서, 물은 동이 이고 가던 여인에게로 쏟아졌다.
동이를 깨뜨리고 물벼락을 맞은 여인은 돌아보아서, 그 악희(惡戱)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유리 소년은 남의 동이를 깨뜨리고 남을 물벼락을 주고도 미안하다든가 잘못했다 든가 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참새 못 맞힌 것이 아까와서, 다시 돌을 던지려고 또 겨냥을 하는 중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교육이 그러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간에, 옳고 좋고 잘한 일이라는 신념을 갖도록 어려서부터 가르쳤다. 그런지라, 유리 소년에게 있어서는 내가 돌을 던지려는 방향으로 지나가는 것은 그 사람의 실수지, 내게 관계없고, 여인이 동이를 깨뜨린 것은, 여인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내 아랑곳할 것이 아니요, 나는 다시 참새 잡을 돌이나 던진다는 것이 배짱이었다.
동이를 깨뜨리고 물벼락을 맞은 여인은 돌아보아서, 그것이 못된 장난 심하기로 소문난 유리 소년인 것을 알아보고, 더우기 유리 소년이 미안하다는 얼굴도 안하고 또 다른 돌을 던지려는 모양을 보고, 노염이 난 모양이었다.
"야. 장난좀 작작해라. 남의 동이 깨뜨리고도 그냥 장난이야?"
소년은 대척하지 않았다.
"누가 동일 깨뜨려요? 돌멩이에 맞아서 깨졌지…."
"아비 없이 길러나면 저 꼴인가. 참 딱한지고."
소년을 상대하여 싸울 수도 없고 여인은 하릴없이 혀를 차며 가버렸다.
그러나 여인의 이 말은 소년의 가슴을 찔렀다. 아버지 없는 줄은 잘 알지만, 아버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욕먹기는 처음이었다.
이 욕을 먹고 보니, 아버지 없는 것이 분하였다. 사람이 생김에, 아비 없이는 못 생기는 것이니, 내게도 아버지가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세상 떠났는지, 혹은 어디 멀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어디 있어서 나로 하여금 오늘 아비 없는 아이라는 욕을 먹게 하는가.
불쾌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참새 잡으려던 돌을 그냥 던지고 집으로 달려들어왔다. 어머니는 알 것이다. 어머니에게 따져 볼 심산이었다.
"어머니!"
달려들어와서 어머니를 찾는 유리 소년의 목소리는 다분의 도전(挑戰) 하는 색채가 있었다.
"왜?"
"아버지 내놔요. 우리 아버지 어디 있어요?"
"얘두…. 갑자기 아버진."
"남은 다 어버지 있는데 나는 왜 없어요? 아버지 내놔요!"
"오오. 네가 누구한테 아버지 없다고 흉을 뵌 모양이구나."
"아버지 어서 내놔요."
"야, 유리야. 거기 앉아라."
"어서요."
"거기 앉아서 어머니 말을 듣거라. 넨들 왜 아버지가 없겠느냐."
"그럼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고요히 눈을 아들에게 구을렸다. 책망하는 눈자위를….
"어디 있어요가 뭐냐. 어디 계셔요 할게지. 내나 할머님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디서 그런 무지한 말을 배웠느냐. 그런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다. 처음이니 이번은 용서하지만 다시 그런 무식한 말을 썼다가는 널 보지 않겠다."
말은 고요하지만 추상 같았다. 소년은 어리광 삼아 떼쓰다가 이 어머니의 꾸중에 그만 예봉을 꺾이었다.
"버릇 고칠테냐, 어쩔테냐. 네 대답 듣고야 아버님을 아르켜 주리라."
소년은 머리를 숙였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죄하고, 고치기를 부끄러이 여기지 말라는 부여 정신의 교육을 받은 소년은 어머님의 앞에 꿇었다.
"어머님. 다신 안 그러겠어요. 우리 아버진 어디 계셔요?"
아들이 솔직하게 사죄하는데 어머니는 도로혀 미안한 모양으로, 다정한 소리로 말하였다 ―.
"유리야. 네게 알으키려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이다. 왜, 저 고구려라는 나라이 있는 걸 아느냐?"
"네. 강하고 훌륭한 나라라고,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너희 아버님은 그 고구려의 임금님이시다. 너는 고구려의 태자로다. 장차는 너는 고구려의 임금님이 될 사람이다."
"어머님. 그게 ―."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흥분과 희열에, 목소리까지 떨면서 소년은 어머님을 우러러 보았다.
어머님은 소년에게 자초지종을 다 들려주었다.
"일곱 모 난?"
"일곱 모난 바위 위, 소나무 아래."
"감추신 물건이 무엡니까?"
"그건 모른다."
"감추신 곳은 어딥니까?"
"그것도 모른다. 좌우간, 이 집안 어디니라."
당년의 주몽왕의 처가댁이요 예씨의 친정이던 집이었다.
"이 집에 어디 소나무가 있읍니까. 전에 ― 그때는 혹 있었읍니까?"
"전에도 소나무는 없었는데."
"혹은 이 집이 아니고, 다른 집이나 아닐까요?"
"분명 이 집이니라."
"없는 소나무에, ‘소나무 아래 감추’단, 어떤 일일까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말할 뿐이로다. 소나무는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
그러나 이 어머님의 말에 유리 소년은 무슨 암시를 얻고,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어머님과의 이야기를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나갔던 유리는 조금 뒤에야 돌아왔다. 손에 들고 온 물건(자루 부러진 칼이었다)을 어머님 앞에 내놓았다.
"어머님. 이게 뭐입니까?"
이 부러진 칼을 보는 순간, 어머님의 얼굴은 홍조가 띠었다가 다시 창백하게 되었다.
"이게 ― 어디서 났느냐."
"저 뒤 정자(亭子)아래서 얻어 냈읍니다. 이게 뭐입니까?"
"이게로구나. 아버님이 감추신 물건이…. 이게, 아버님 여기서 떠나시는 날까지 몸에 지니고 계시던 칼이로다. 이걸 꺾어서 증표로 두고 가셨구나.
어떻게 얻어 냈느냐?"
아버님이 두고 가신 물건이라는 어머님의 증명을 들으며, 유리는 흥분을 못 참겠는 듯, 숨소리도 가빠졌다.
"저 뒤 정자가 있지 않습니까. 정자의 굵은 기둥이 있지요. 이 집에 예전부터 없는 소나무 아래 감추셨다기에 열곱 모 난 바위를 생각해 보았지요.
이 집에 일곱 모 난 바위란 ― 저 정자의 주춧돌이 일곱 모이어서, 별 다른 주춧돌이라 늘 치념(置念)해 두었었는데 일곱 모 난 바위라기에 한(韓) 단군 왕검이 동방 민족을 합쳐서 조선나라를 이룩하신 뒤에 그 종족은 언어와 풍습을 지닌 채, 차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팽창하고 발전하는 종족은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서쪽으로는 지나 접경까지, 북쪽으로는 사철 얼음 지고 눈 쌓여 있는 한 끝(지금의 시베리아)까지, 그리고, 남쪽은 왜(倭)까지….
이 반도의 맨 남단(지금의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는 선 주민(先住民)으로, ‘왜’ 가 살고 있었다. ‘왜’의 몸뚱이는 벌써 바다 건너로 이동했고, 그 꼬리의 약간이 아직 ‘한’ 땅에 남아 있는 그것이다.
팽창하고 발전하는 조선 민족의 ‘남하(南下)하는 가지’는 남하하다가 거기서 선주민 왜와 마주쳤다.
이 왜를 혹은 압축하여(바다 건너로) 쫓으며, 혹은 동화 포섭하며, 자연법칙에 의지한 민족 이동 운동이 바야흐로 활발하게 진행되려는 무렵에, 뜻안한 지나인의 침략을 받아서 허리가 끊겼다.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그 주체는 북쪽에 있다. 남쪽에 떨어진 ‘한’ 은 가지다. 중간엔 지나인….
남쪽에 떨어진 ‘가지’는 언어와 흰 옷 전통과 광명 숭배의 신앙을 지니고, 처음은 진(辰)이라 하다가 뒤에는 한(韓)이라 하며 남방으로서의 독립한 생활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한(韓) 땅에, 기씨 조선의 임금인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서 달려왔다.
기씨가 남방으로 쫓겨와 보니, 이 남방은 한(韓) 땅으로서 그 주민(住民)은 기씨 네가 잘 아는 바, 지금껏 자기네가 북방에서 손아래 넣고 다스리던 그 겨레인 순후무비한 조선족이었다.
새삼스레 야심이 다시 생겼다.
할 수 없이 위씨에게 쫓겨 오기는 하였지만, ‘왕위’는 그냥 연연(戀戀) 하였다.
이 ‘조선족’이라는 인종은 기씨네가 이미 그 새 천 년간을 북방에서 백성으로 부려 먹던 인종이라, 그 성품을 잘 안다. 순후하고 겸손하고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고 착하다. 그 성격을 잘 아는 기씨는, 이 순후하고 착한 백성을 속이고 위협하여 스스로 이곳 임금이 되었다. 이곳에 본시 있던 토민인 임금은, 겸손히 기씨에게 나라를 사양하였다.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 이라 하였다. ‘진(秦)’나라 망하고,‘한(漢)’나라이 지나의 주인이 된 시절이었다.
지나는 흔히 국가적 또는 민족적 대변혁이 생기며,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많은 백성(지나인)은 그 소란 난리를 피하여 딴 나라로 피난을 한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겨우 두 대 누리고는, 유방의 이룩한 한(漢)나라에게 망하고 예에 따라서 많은 진인(秦人)은 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마한 땅으로도 적지 않은 무리가 밀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