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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서라벌
◈ 유리(類利) - 3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마한왕은, 이 망명한 진인들이 내 나라에 잡거하여, 못된 지혜 가르치고, 귀찮게 구는 것이 시끄러워서, 땅을 좀 떼어 주어서 진인은 거기 모여서 살게 하였다.
유리(類利) 3
 
 
마한왕은, 이 망명한 진인들이 내 나라에 잡거하여, 못된 지혜 가르치고, 귀찮게 구는 것이 시끄러워서, 땅을 좀 떼어 주어서 진인은 거기 모여서 살게 하였다.
 
이 떼어 준 땅(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세운 나라가 진한(辰韓)이다.
 
진한 이남의 땅〔지금의 김해(金海) 근처〕에 원주민인 왜종과 조선(단군) 족과 그 밖 잡종이 살고 있는 땅에는 변한(弁韓)이 생겼다. 이리하여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남방 지대에는 마한, 진한, 변한, 세 나라이 생겼다.
 
그 진한땅의 여섯 촌의 어른들이 어떤 날 친목으로 모여서 이야기들을 하다가, 우리도 어진 이 찾아서 임금으로 모시고, 한 개 나라를 만들자 하여, 합의되어 진한 안에서 따로이 나라를 하나 세웠다.
 
이리하여 서라벌(徐羅伐) 나라가 생겨났다.
 
임금은 박혁거세(朴赫居世)라 하였다. 불거내(弗居內)라고도 하였다.
 
혁거세나 불거내나 아울러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종족(왕검님 후예)의 ‘광명 숭배’의 전통이다.
 
임금이란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다.
 
혁거세 거서간이 서고 서라벌나라를 이룩한 것이, 한(漢)나라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사월이요 주몽왕이 고구려를 세우기 이십 년 전 이었다.
 
처음에는 다만 여섯 촌락(村落)을 모은 한 부락에 지나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 주위에서 기성 국가(旣成 國家)인 진한(辰韓)의 각 부락〔부락도 모두 칭국(稱國) 하였다〕 들이 둘러 있어서 팔다리 펼 곳조차 없는 빈약한 나라였다.
 
다만, 같은 종족이 이룩한 나라이요 그 임금이 거룩한 이라 하여, 이웃 부락이며 나라에서 은근히 존경하였다.
 
팔 년 뒤에, 왜(倭)가 침범하려 왔다가, 거룩한 임금이 위에 임하여 있다는 소문에 스스로 겁내어 물러가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서라벌’ 은 거룩한 나라이라고 근방에 알리어졌다.
 
이리하여 서라벌나라는, 남쪽 한구석에서 차차 커가며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주변(周邊)은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전(全)국에서 장정 스물 몇 사람을 추려 낼 수 없어서 전쟁을 못하였다는 꼬마나라 따위며, 왜종(倭種)의 나라며, 지나종의 나라며, 심지어 사람 잡아 먹는다는 식인(食人) 종의 나라 등 까지 ― 이런 무수한 ‘부락국가’가 서라벌 주변에 널려 있었다.
 
 
이런 수두룩한 꼬마국가 가운데, 서라벌나라이 생겨난 것이다. 여섯 촌락을 모아서 이룩한 나라이니, 서라벌나라 역시 비슷비슷한 꼬마나라였다. 뒷날 신라나라로 대성을 하였으니 말이지, 서라벌 역시 처음은 다 그렇고 그런 나라 (나라라기 보다 한 부락이었다)였었지만 훌륭한 임금과 충성된 명신들 의합한 힘으로, 나라 키우기에 공들인 덕으로써, 비슷비슷한 무리 가운데서 빼나게 자라서 종내는 대신라(大新羅) 나라를 쌓아올린 것이다.
 
백제 건국(百濟 建國) 이 서라벌나라가 생겨난 모체(母體)인 진한 ― 또 그 진한이 생겨난 모체인 마한.
 
기씨는 남방으로 쫓겨 와서도 예대로 임금 칭호는 차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데리고 온 군사력이 하도 미약하니, 게다가, 북으로는 자기네를 내쫓은 강력한 위씨 나라와 접해 있고, 그 밖에는 통 바다로 싸인 곳이라, 세력 펼 여지가 없이 그대로 현상유지만 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이라, 상대방이 가만히 굴복해 있으면 요행으로 여기고,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주장하거나 하면 얼마이고 양보하였다. 그저 이 순후한 백성의 위에서 ‘왕’이라는 존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지라 진(秦)의 망인들이 이 나라 동남쪽에 한귀퉁이 집단되어 있으매 땅을 떼어 주어 ‘진한’을 세우게 하고, 또 흰 옷 백성과 왜종과 잡종의 집단에게 ‘변한’을 이룩하게 하고, 그 나머지 땅에서나마, ‘왕’이라는 존위를 누릴 수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이런 때에, 북쪽 멀고 먼 한 끝에서 고구려 왕자 비류와 온조가, 부하 삼천을 이끌고 들어왔다.
 
민족의 조신(祖神)으로서의 북국 신왕(北國 神王)의 이름은 이 지방까지 널리 존신된다.
 
옛날, 기씨 왕의 조상이 이 땅(조선)에 오기 전부터 이 땅 본시의 주인으로서의 북왕(北王)은 이 땅 인종의 한결같이 존신하는 임금이다.
 
기씨 왕이 지금의 낙랑이며 현토 지방에서 천여 년 간 왕 노릇할 때에도, 이 곳 주민들은 여전히 북왕을 존신하였다. 기씨네가 왕 노릇 하는 그 영토안에서도 시월 초사흘 북왕 왕검님 개천(北王 開天)의 날을 절일로 여기고, 북왕이 수립한 제제(祭制)를 눌러 답습하였다.
 
기씨 왕이 위씨에게 쫓겨서 남방으로 와서 보니, 남방 토민들도 역시 그러하였다. 천 년간을 남쪽으로 분리되고, 가운데 우리(지나인) 영토로써 격리되어 살면서도 천 년 전 전통을 그냥 답습해 왔다.
 
그 북왕의 손(孫)(더구나 형제에서) 부하 삼천을 인솔하고 마한땅에 왔다는 것이다.
 
북방에서 이곳까지는, 가깝지도 않거니와 서로 맞닿은 곳도 아니요, 중간에는 한(漢)의 영토가 천여 리나 끼여 있다. 천 리의 외국 영토를 건너서, 이 곳까지 더우기 부하 삼천이나 데리고 온다는 것은 간단한 일도 아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삼천의 대부대가 천리길을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만치, 또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때 마한왕은, 기씨(箕氏)로 학왕(學王)이었다. 학왕은 이 예사롭지 못한 일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기씨가 마한에 왕 노릇 한다 해야, 무슨 행정을 하는 것도 아니요, 조세(租稅)를 받는 것도 아니요, 토민을 징병(徵兵)하거나 징용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요, 법을 펴거나 제도를 세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쫓겨 올 때 데리고 온 부하시켜 왕령(王領)이라고 땅을 잡고 거기 농사시켜서, 그 수확을 로써 왕과 부하들의 의식에 충당하고, 그러고는 ‘왕’이라는 존호를 누리고, 그것으로 만족해 하였다. 애전 종족부터 다르고 보니, 스스로 의붓아들 같아서 이 백성 부려 먹거나 무슨 일 시키거나 할 생각은 염도 내지 않고, 다만, 나는 이곳 왕이거니 하는 자긍심만으로 만족하였다. 백성과는 아주 관련이 없었다.
 
그렇더니만치 마한 임금 학은 북왕의 아들이 부하 삼천을 데리고 마한 땅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썩 하며, 인제는 쫓겨나는 것으로 알았다. 더구나, 북국 고구려는 전쟁을 즐겨하고 또 전쟁에 능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고, 전쟁의 목표가 국토로 넓히고 옛터를 회복해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은 추측이 되던 바이라, 인젠 왕 노릇 다했다 생각하였다.
 
자기네게는 전연 병력이 없다. 무기도 없다. 북국 사람이 싸움을 하자 면피 할 밖에는 없고, 그래도 그냥 굳이 하자면 도망칠 밖에는 없다. 두고 가는 것에 아까운 물건은 없지만, 이곳서 쫓겨나면 또 어디 가서 왕 노릇을 하는가. 조상 기자 적부터 천여 년 간 해오던 왕 노릇을 인젠 그만 두어야 하는가. 이것만이 아까왔다.
 
어떻게 전개되며 진전되려는가, 마음 떨려 걱정할 즈음에, 북왕의 아들에게서 학왕에게 한번 좀 만나자는 사자가 이르렀다.
 
나가라고 내쫓지나 않을까, 혹은 군사로 들이치지나 않을까, 가슴 조일 때에 회견하기를 청하는 것은 학왕에게는 도리어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만날 날짜를 정하여 사자에게 말하였다. 만날 장소는 이 대궐로 하기로 하였다.
 
 
임시로 꾸민 병장(兵仗)으로 위의를 갖추고, 학왕은 약속한 날에 북왕의 아들을 맞았다. 북왕의 작은아들 온조만이 온 것이었다. 형 비류는 진에 머물러 있었다.
 
학왕와 온조 왕자는 정중하게 마주 절하였다. 학왕은 처음, 상대자가 아직 소년(열 일곱 살이었다)인 것을 보고, 자기는 어른 행세를 하려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마주 대하니, 그 위엄에 눌려서 맞절을 한 것이었다.
 
한두 마디의 인사가 사괴어졌다. 그 뒤 온조 왕자는 눈을 구을려서 이 방을 둘러보았다.
 
"이곳 땅을 좀 줍시사고 왔읍니다."
 
집터를 달라는 것인지, 영토를 베어 달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늑탈하지 않고 달라는 것은 학왕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무엇에 쓰실 땅입니까?"
 
"우리나라에서 내 형님이 등극하셔서, 우리 아랫형제는 부접할 땅이 없게 됐길래, 아랫형제 부접할 땅을 구하고자 천리길 왔읍니다. 우리가 데리고 온 백성이 삼천 명이니까, 그만한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좀 주십시오."
 
내 땅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동쪽에, 진한에게도 몇 백리 떼어주었다. 내 땅은 사면에서 떼 달라는 땅인가고, 내심 분하기도 하고 역하기도 하였지만, 워낙 힘이 약하고, 또 남의 땅을 늑탈해 가지고 있느니만치 뻐젓하지 못한 위에, 또한 온조 왕자의 요구하는 태도가, 안 주면 빼앗기라도 할 배짱이니, 그저 무사히 ‘왕’이라는 자리만 그냥 유지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이었다. 미리 겁냈던 보다는 약소한 요구이니, 응하기로는 내심 작정하였다. 그러다, 내 것은 그렇게 사면에서 뜯어 먹는 것이냐는 분기도 있고, 첫마디에 응하기도 싫어서 한두 마디 하여 보았다 ―.
 
"당신 형님께 줍시사 하실 게지, 왜 하필 예까지 오셔서…."
 
"형님 것은 형님 드려야지요. 내 땅을 떼내면 형님 것이 작아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형님 몫 축내지 않고자 마한땅을 베어 달라는 것이다. 뻔뻔한 요구다.
 
"그럼 내 것은 내가 가져야지요."
 
"오면서 보니까, 위례(慰禮) 지방에 빈 땅이 있읍디다. 그저 거기 주저앉아서 차지해도 좋을 게지만 좌우간 그 땅 주인께 말씀이라도 드리고 차지 하고자 왔읍니다. 거기는 낙랑과 접경이라, 마한에게도 시비 많아 귀찮을 땅일 줄 생각합니다. 그런 귀찮은 땅 남에게 주면 마한서도 시원할 겝니다."
 
 
"그런 시비 많을 땅을 당신은 왜 하필 그 땅을 달라십니까?"
 
"그 땅에 접경한 낙랑은 본시 우리 조상님네 땅입니다. 위례 땅에 자리 잡고 조상님네 땅 찾을 생각입니다."
 
학왕에게는 가슴 뭉클하는 말이었다. 낙랑땅이 이 소년의 조상의 땅이라면 이 마한도 마찬가지다. 학왕은 그 문제를 피해 버렸다.
 
"드리지요. 한 백 리 드리리까?"
 
"이(里) 수를 미리 작정치 말고, 이제 가서, 내게 쓸데 있는 만치 떼어 가지리다. 나 혼자가 아니요 내 중형님도 함께 오셨으니까, 두 몫은 있어야겠소이다."
 
이리하여 마한은 이 왕자에게 몇 백 리 땅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비류와 온조, 두 고구려 왕자는, 마한의 북쪽 지방이요 낙랑과 접경한 땅을 떼어 얻어 가지고, 두 나라를 세웠다. 형 비류 왕자는 해변 미추홀(彌鄒忽) 로 내려가서 거기 나라를 이룩하고, 동생 온조 왕자는 위례(慰禮) 땅에 자리 잡았다. 위례땅은, 북으로 강을 끼고, 동으로는 큰 산으로 진(陳) 치고, 남으로는 기름진 벌을 안고, 서쪽은 바다에 임하여, 천험(天險)과 지옥(地沃)을 아울러 가진 쉽잖은 좋은 서울 터라고, 위례에 함께 있기를 주장하였지만 형 비류 왕자는 이 말을 좇지 않고 미추홀로 갔었다. 그러나 미추홀로 가서 지내 보니, 풍토가 맞지 않고 물이 짜고, 모든 점으로 아주 고약하였다.
 
거기 반(反)하여 동생 온조 왕자(인제는 왕이다)의 터 잡은 위례는, 모든 점이 국도(國都)로서 훌륭하였고 땅 기름져서, 나라로서의 행진이 제법 본격적으로 진척되고 있었다.
 
비류왕은 당신의 길이 아주 실패였음을 깨달아 알았다. 그 점에 대한 심통(心痛)도 컸고, 게다가 수토불복 등으로 성병되어, 당신 몫의 사업을 들어, 동생 온조왕께 맡기고, 온조왕의 사업이 건전히 자라고 성취되기를 심축하면서 그만 세상떠났다. 비류왕께 소속되었던 몫까지 온조왕에게 돌아왔다.
 
때는 지나의 한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삼년이요 서라벌(徐羅伐) 건국 제사십 년이요 고구려 건국 제 이십 년이었다.
 
고구려에서 데리고 온 삼천 명이 근간 되어 불어 나가고 늘어 나갔다. 나라 이름은 백제라 하였다.
 
본시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나라라 자칭하던 기씨 마한(箕氏馬韓)은 그 존재가 아주 모호하였다. 임금과 임금 직속의 몇 신하가, ‘임금’이란 칭호며 ‘대신’ 이란 칭호만을 그냥 유지하고 누렸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의 희망이라든가 야심이며 욕구며 포부며 이상(理想)이 없는 몇몇 지나인이 치자(治者)의 자리에 앉아서, 한가하고 무위한 세월을 보내며, 누구가 와서 땅을 떼 달라면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왕’ 칭호와 ‘대신’ 칭호만 그냥 붙들어 두고는 아낌없이 베어 주고, 표면은 존대하고 안으로는 소심 익익(小心翼翼) 하게 지내는 왕권이었다.
 
민족 이동(民族 移動)의 물결을 타고, 북방 대륙에서 조선반도를 거치어서 바다 건너로 이동해 가던 왜(倭)종, 또는 표류하여 반도에 들게 된 표류 왜인이 이 나라 남쪽 끝에 꽤 많이 있다. 조선 민족이 북방에서 일어서 차차 팽창 발전하여 남쪽으로 반도로 벋어 오던 부대는, 자연의 세(勢)로써 왜종을 압축하고 혹은 포섭 동화하면서 남하(南下)하고 있다가, 지나인에게 허리를 끊겼던 것이다.
 
민족(조선족) 발전의 원동(原動) 근거지에서 허리를 끊겨서, 팽창과 발전은 중단되었다.
 
고식적으로 현상유지 ― 현상은 유지 못되어도 ‘왕’호만이나마 유지 하기를 꾀하고 있는 마한 한 귀퉁이에, 고온조(근본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씨를 씨 삼았다)의 이룩한 백제나라이 생긴 것은,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남쪽 부스러기’ 스스로의 독립한 민족 운동력의 자연 소산이다.
 
마한은 왕실과 백성과의 새에는 유기(有機)적으로건 무기적으로건 아무 관련이 없고, 서로서로의 애착도 의무감도 또는 의뢰심도 없이 ― 따라서 서로 친애나 경모심도 없는 대신에 귀찮다든가 밉다는가 하는 생각도 없이, 너는 너요 나는 나로 살고 있었다. 이러한데, 북왕(北王)의 아들이 나라를 따로 하나 세웠다. 마한나라로서는 서로 원수지간인 낙랑과의 중간에 완충지대가 생겼는지라, 도리어 마음 든든하게 여겼다. 더우기 새로 되는 나라는, 우리가 땅을 빌려 주어 우리에게 신세진 나라이다.
 
"낙랑은 본시 우리 조상님네 땅이니 도로 찾겠소."
 
하던 백제 왕의 말은, 역시 그 조상네 땅에 앉아 있는 마한으로서는 가슴 뜨끔하는 말이었지만, 시재로는 무슨 말썽 부리지 않고 있으니, 무시무시한 원수의 나라 낙랑과의 새에 완충지대가 생긴 것만 마음 든든하였다.
 
백제나라이 서자, 백제나라와 지경을 접하고 있는 근처의 지방(마한의 영역)이 연해 백제에게 돌아붙는다. 국경선이 어디라고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태고 시절이라, 백제에게 준 것이 어디까지라고 금 그은 데는 없지만, 한 백 리 한(限)하고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백제에서 참견하는 지역은, 이삼백 리가 넘는다.
【역사소설】 서라벌
• 유리(類利) - 2
• 유리(類利) - 3
• 유리(類利) - 4
(2021.08.19. 11:00)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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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