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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서라벌
◈ 유리(類利) - 4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이전 마한시절에는 너는 너요 나는 나로 지내 왔었는데, 백제는 그렇지 않아, 나라와 백성이 합하여 ‘우리’가 되었다.
유리(類利) 4
 
 
이전 마한시절에는 너는 너요 나는 나로 지내 왔었는데, 백제는 그렇지 않아, 나라와 백성이 합하여 ‘우리’가 되었다.
 
나라에서 군사를 뽑으면 각 곳에서 거기 응모하고, 임금(온조왕)이 백성의 농상(農桑) 상태를 시찰하고자 지방을 순찰하면 백성은 만세를 불러 임금을 환영하였다.
 
마한(왕실)으로서는 매우 쓴〔辛〕 일이었다. 자기네는 이전에, 백성의 고락(苦樂)을 알아본다든가 그런 일은 안하였지만, 가령 하였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이처럼 기쁘다고 뛰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백제의 모양은, 그 임금의 백성이요 그 백성의 임금이라는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리고 본시의 임금인 마한왕 학은, 도리어 의붓아들같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버님 고주몽왕 생존 때에, 작은아드님 온조왕께 보필자(輔弼者)로 주려고 훈련한 신하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고구려 적부터의 신하들은 이 나라의 국가 목표며 국시를 잘 이해하고 있느니만치 참으로 잘 보필하였다.
 
온조왕은 아직 열일곱 살의 소년이었지만, 숙성하고 지혜 많은 위에, 침착하여서, 나라를 능란하게 키워 나갔다.
 
북국 고구려, 아버님의 옛터를 떠나서 그 새 천리길 온 것이 내내 지나인의 영토였으며, 이곳 또한 지나인이 왕 노릇하는 땅이라, 이 우리나라에 침입된 지나인의 세력이 이렇듯 광대한데 온조왕은 새삼스러이 적개심이 더하였졌다. 이 땅 안의 백성들은 이처럼, 내 땅 다 남주고, 그 남은 구석에서나마, 기껏해야 ‘따로 나라를 하나 만들고 임금이 되어 보리라’ 이 맛 정도의 욕심밖에 못 내는데, 그런 가운데서 ‘우리 땅 우리가 찾고 지나인을 우리 땅에서 내쫓겠다’는 엉뚱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로 일생을 행동한 위대한 선각자 위대한 영웅으로서의 아버님이 무한 사모되었다.
 
아버님은 혹은 단군 왕검님이 후손이시요 해모수님의 아드님이라는 유 다른 신위(身位)에 계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셨겠지만, 역시 해모수님의 아드님인 부루왕(夫婁王 ― 동부여 임금이요 금와왕의 아버님)은 꼭 같은 신분을 가지고도 다만 동부여의 임금으로 만족하였고, 그 이상 미쳐 보지못하였는데, 오직 아버님 주몽왕이 이 목표로 먼저 한 개 나라를 이룩하고 그 나라로 큰 목표를 향하여 매진했고, 아드님들이며 원로 신하들에게도 그 목표를 이해하게 하여서, 당신 떠난 뒤에라도 그 목표의 후계자를 양성하여 둔 것이다.
 
지나인 영토(본국에게 직속된 낙랑 지방) 천여 리 길을 통과하여, 또한 지나인이 왕 노릇하고 있는 땅에 자리잡고 보니, 아버님 추모하는 정이 더 크게 솟았다.
 
이 정이 간절하여, 백제 건국 첫해에 동명제묘(東明帝廟)를 웅장하게 세우고 아버님 승하하신 날에 여기 제사하게 하고, 백제나라이 존재하는 동안은 내내 이 제사 게으르지 못하리라는 제도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이 제사날은, 시월 초사흘, 왕검님 개천(開天)한 날과 아울러 이 나라의 가장 큰 축제 일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백제나라에는 고구려 시조의 묘가 서고, 이 대묘를 본받아서, 처처에 동명묘가 섰다.
 
장차는 마한 전주를 백제의 아래 둘 것이지만, 현재 백제 왕권이 미치는 지역에는, 확호한 시정 방침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좀 상류에 속하는 계급에게는 글을 가르쳤다. 온조왕이 아버지의 나라에 있을 때, 아버지의 나라에서도 예의(銳意)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종이가 아직 발명되지 못한 시절이라, 옷감의 베며 짐승 가죽을 쓰던 고구려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일반 국민에 글을 퍼뜨렸다. 이 땅은 본시 지나인인 기씨가 임금으로 있었지만, 저는 저요 나는 나로 살았는지라, 서로 접촉이 없었으므로, 지나인의 글은 마한 궁실과 대신들의 새에만 돌았고, 민간에는 퍼지지 않았던 것을, 글은 사람의 살림살이에 없을 수 없는 것이라는 주지 아래서, 나라에 글을 퍼뜨렸다.
 
마한의 치자(治者)는 지나인 기씨(箕氏)와 그 부하지만 천여 년 간 지나 본국과 격절되어, 문화적으로는 퇴화한 대신, 마한땅 안에 생긴 ‘백제’의 문화는 쑥쑥 진보되었다. 백제의 문화는 마한과는 별개로 자라 올랐다.
 
이 나라가 말갈(靺鞨) ― 본시 맨처음은 역시 왕검님 치하에 있은 같은 종족 이었지만, 그 본거가 깊은 산간에 있는만치, 본국과의 교섭이 적고, 따라서 본국의 나날이 진보되는 문화(文化)와 격리되어, 이러한 생활을 오래 계속하는 동안에 모국(母國 ― 차차 변하여 ‘부여’라 일컫게 되었다) 보다는 문화 정도가 훨씬 뒤떨어진 종족이다. 음식 먹는데 그릇과 수저를 모르며, 짐승 가죽을 그대로 몸에 감아 옷감으로 쓰고, 겨울에는 도야지 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라 추위를 막고, 뒷간을 가운데 두고 사람은 그 주위에서 살고, 활에 아직 돌촉〔石鏃〕을 사용하는 등, 원시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으로서, 처음에는 ‘숙신(肅愼)’ 이라 불리었는데 아마 ‘숙신’은 ‘조선’ 의 와음〔訛音〕일 것이며, 뒤에 읍루(挹婁)라 하였고 지금 ‘말갈’이라 하며, 오늘날의 ‘여진(女眞)’의 조상이다)과 접경하고 있어서 말갈을 막을 준비라 하여, 병졸을 많이 모집하여 맹훈련을 하였다.
 
말갈은 전통적으로 남을 귀찮게 굴고 성가시게 구는 종족이라, 말갈에 대한 방어도 잘 해야겠거니와 그보다도 장차 낙랑에 대한 준비로 양병을 하는 것이었다.
 
건국 제사 년에 온조왕은 낙랑에 사신을 보내서, 서로 친선하기를 약속하였다.
 
제팔 년에 말갈이, 삼천 군을 이끌고 와서 침범하였다.
 
겨우 엄동은 지난 이른 봄 이월이었다. 삼천의 말갈군이 와서 서울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온조왕은 지난 옛날, 아직 고구려의 왕자이던 칠팔 세의 소년시절에 고구려병이 북옥저를 치러 갔던 그 때의 기억을 회상하여, 그때 북옥저 버금서울에서 쓴 전략을 여기 이용하고자 하였다. 소년 때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때 삼만 대군을 이끌고 간 마리 장군이 북옥저 버금서울을 포위하고 싸움을 돋구니, 북옥저 측에서 성문을 굳이 닫고, 나와서 마주 싸우지 않았다. 치중(輜重)을 넉넉히 준비해 가지고 갔으니, 군량 떨어질 근심은 없었지만 저쪽이 마주 싸워 주지 않으니, 튼튼한 성이라 성을 깨뜨릴 수도 없고 ― 얼마 포위하고 있다가 하릴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물러나는 체만 하고, 거기 속아서 옥저에서 성문을 열 적에 성내에 돌입하여 승리는 얻었지만, 성문을 굳이 닫고 있으면 포위군은 결국 물러가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옥저에서는 우리가 포위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우리가 포위 당한 편이었다.
 
이전 옥저에서는 우리는 물러가는 체만 하였지만, 말갈병은 꾀 없는 군대라, 한동안 포위했다가는 그냥 성문 열지 않으면 정말로 물러갈 것이다.
 
물러가는 것을 희망하는 바가 아니다. 그들이 물러갈 때에, 우리가 정병으로 허심퇴병하는 말갈을 뒤쫓아 엄살하면, 마음 놓고 물러가던 말갈병은 낭패하여 수습 못할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요 그때를 교묘히 이용하면, 혹은 왔던 말갈을 전멸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리라. ― 이렇듯 한번 된 경을 치러 보내서, 이 뒤 다시 우리나라를 침범할 생념도 못하게, 혼을 내어 보내리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고구려가 예전 옥저에게 쓴 바와 같이, 거짓 물러가는 것이나 아닌지(그만 꾀도 안출치 못할 말갈이지만) 이 점만을 잘 알아보아서 뜻 안한 실패는 하지 않도록,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성문을 굳이 닫아 버렸다.
 
말갈은 위례성을 포위하고, 연해 싸움을 돋구었다. 그러나, 백제는 문을 굳이 닫고 응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저쪽의 약을 올리기 위하여. 자지러지게 풍악을 울리고 연무(演舞)하는 모양을 일부러 알리도록 성대히 하였다.
 
밖에서는 포위군 말갈이 연해 살을 쏘며,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돋두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성문만 굳이 닫고, 밖의 포위며 소란도 모른다는 듯이 잔치며 놀이만 하고 있었다.
 
그러는 일방, 가장 날래고 용맹한 병졸로 조직된 한 부대는, 장차 성문이 열리는 날에, 달려나가서 퇴각하는 말갈을 충살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성 안에 식량이며 물자가 충족하여서, 몇 해를 포위 속에 있어도 근심없다는 점을 말갈에게 알리기 위하여 일부러 성 너머 던지는 쓰레기에는 아직 먹을 수 있는 음식의 폐기물을 많이 섞어서 버렸다. 말갈이 헛되이 쏜 살들을 모두 주워 묶어서, 말갈에게 보기 좋게 성 위에 높다랗게 걸었다.
 
말갈은 십여 일 간을 위례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많은 살만 헛되이 성안으로 쏘았다. 그러다가, 자기네의 군량이 모자라게 되어서, 물러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갈도 그맛 꾀는 있어서, 한꺼번에 물러가지를 않고, 그 대부대는 차례차례 은근히 물러가고, 얼른 보기에는 그냥 포위하고 있는 듯이 가식하였다.
 
말갈의 퇴각하는 모양을 엄중히 정찰하고 있는 백제로서는, 아무리 말갈이 슬몃슬몃 조금씩 물러간다 할지라도 뻔히 알고 있었다. 한 삼백 명만이 그냥 포위하고 있는 체 하고, 그 대부대는 물러갔다.
 
주력이 물러간 뒤에도, 잔존 부대는 하루를 더 있어서, 퇴각 부대(주력)가 멀리까지 가기를 기다려서야, 잔존 부대로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이 잔존 부대가 물러가기까지 백제는 그냥 대기만 하고 있었다. 젊고 용감하고 혈기방농한 임금인 온조왕은 추격할 백제군을 몸소 지휘하고자 당신이 진두에 나섰다.
 
아버님 주몽왕은 몸소 진두에 나서 보지 않았다. 장수들을 믿고 그 역량을 신용하는 지라, 싸움은 장수들에게 일임하였었다. 임금이 직접 칼을 뽑아 들고 진두에서 지휘하여 전쟁하는 것은, 고구려 이래 이번의 온조왕이 처음이었다. 장군들은 처음에는 말렸다. 그러나, 젊고 게다가 자신이 만만한 온조왕은 굳이 몸소 나가려 하였다.
 
임금이 몸소 지휘하려 하는지라, 장졸들의 의기는 더 성하였다. 말갈의 잔존 부대가 퇴각을 시작하자 뒤따르자고 들먹거렸다.
 
그러나 온조왕은 그냥 움직이지 않고, 장졸들을 붙들어 두었다.
 
말갈이 퇴각하여, 보이지 않게까지 된 뒤에, 온조왕은 비로소 성문을 열게하였다. 그리고 친솔군〔전부가 마병(馬兵)이었다〕의 선두에 나섰다.
 
"가자!"
 
임금님의 한 마디 호령에 백제의 마병들은, 말발소리 우렁차게 위례성을 떠났다.
 
삽시간에 말갈의 전군(殿軍 ― 잔존부대)에 뒤미쳤다. 그러나, 그 말갈은 버려 두고, 더 앞으로 달렸다. 하루 먼저 떠난 말갈의 주력을 목표로 뒤따르는 것이다.
 
하루 먼저 떠난 말갈의 주력은, 십여 일을 위례를 포위하고 있다가, 군량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퇴각하는 군대라, 군심이 해이되고 맥이 빠져서 ― 게다가 군량이 부족했으니 주리기도 했을 것이다 ― 기운 없이 연로(沿路)의 민가를 약탈하면서 퇴각하는 형편이었다. 그 말갈에게 대부현(大斧峴)에서 뒤미쳤다.
 
맥이 빠져서 대오(隊伍)도 정렬되지 못하고, 무규칙하게 ― 군대가 아니요 한낱 난민의 집단에게 향하여, 온조왕 친솔의 백제 정예는 돌입하였다.
 
난장판이 되었다. 말갈은 싸울 생각은 내지도 못하고, 사면으로 헤어지며 도망치기만 위주하여, 엎어지며 자빠지며 밟히며 밟으며 수라장이 된 가운데를, 백제의 마병은 종횡으로 충살하였다.
 
칼에 죽은 자보다 말발에 밟혀 죽은 자가 더 많았다. 오륙백 명을 죽이고, 그 나머지는 도망쳐 버렸다.
 
이 말갈의 주력 부대를 꺾어 버리고, 온조왕은 부하 장졸을 데리고 돌아섰다. 아까 뒤떨구고 온 말갈의 전군(殿軍)을 처리하고자.
 
말갈의 전군은 시셋장 틀린 것을 각오하였는지, 다 도망쳐 버려서, ‘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몇 명 혹은 몇 십 명씩이 숨고 피하고 도망하고 하는 것을, 차례로 혹은 죽이고 혹은 사로잡고 하여서, 결국 적지 않은 포로를 얻었다.
 
온조왕이 등극한 제삼 년(즉 백제 건국 제삼 년)에 말갈이 북경(北境)을 침노한 때도 이를 전멸하다시피 했고, 두 번째인 이번의 침노에도, 또한 이처럼 이겼다. 이리하여, 백제는 말갈에게 충분한 위엄을 보이었다.
 
임금이 몸소 출정하여 말갈을 크게 이긴 그 칠월에, 백제는 국경을 튼튼히 하고자, 낙랑과 접경한 마수(馬首)에 성을 견고하게 쌓고, 병산(甁山)에 책(柵)을 높이 세웠다.
 
이것은 낙랑에게 대한 방비며 공략의 예비며 또한 시위(示威)였다. 친선 관계를 맺은 낙랑이매, 이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친선 관계가 있는 낙랑에게의 적대 행위다.
 
"낙랑에서 시비가 없으리까?"
 
"있기를 내 바라는 바이오."
 
군신간에는 이런 말이 사괴어졌다. 투심만만한 백제요, 그 임금이 또한 소년 혈기 하늘을 찌를 듯한 온조왕이라 시비가 무섭지 않았다.
 
과연 낙랑에서 사자가 왔다. 낙랑 태수가 직접 보낸 사자였다.
 
그 낙랑 사자를 온조왕은 몸소 만났다. 오간(烏干)과 마려(馬黎)의 두 원로 신하가 배석하였다. 뒤에 한(漢)나라라는 배경을 가진 낙랑 사자는 이 소년왕을 애전에 숙보고 들었다. 이 새로 생긴 조그만 나라, 더구나 위만에게 쫓겨서 와 있는 마한에게 한구석 땅을 빌어 가지고 있는 빈약한 나라의 젖비린내 나는 소년왕이라, 자기네는 위만을 내쫓은 한(漢)이니만치 숙볼만도 하였다.
 
"마수(馬首)에 성을 쌓았다구요."
 
"그랬소."
 
"병산(甁山)에 책을 세우고."
 
"그랬소"
 
"견고하게 잘 쌓으셨던데요."
 
"더 견고하게 하고 싶었지만 날짜가 급해서 뜻대로 못 되었소."
 
"마수, 병산은, 순전히 우리 낙랑에 향한 땅인데 왜 그리하셨는지요?"
 
"남에게 향한 땅이니까 그래야지요. 내 나라에 향했으면야 성도 책도 쓸 데 없겠지만 불행히…."
 
"백제와 낙랑은 서로 좋게 지내자구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약속은 두었소."
 
표면은 온공하나 서로 할퀴는 응답이었다.
 
"좋게 지내는 새에 성책이 쓸 데 있을까요?"
 
"우리 태수께서 이런 글월을 이 사람에게 주셔서, 이 나라에 전하라십니다."
 
무슨 종이를 꺼냈다.
 
"어디"
 
온조왕은 팔을 폈다.
 
낙랑 사자는 네가 글을 알겠느냐는 의아심과 모멸심을 아우른 얼굴로 그 종이를 온조왕께 바쳤다. 그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
 
‘頃者[경자] 聘問結好[빙문결자], 意同一家[의동일가], 今逼找境[금핍아암], 造立城柵[조립성책], 或者其有蠺食之謀[가자기유잠식지모], 若下渝舊好[약하투구호], 城破柵[성파책], 則無所猜疑[즉무소기의], 苟或下然[구가불 연], 請一戰以決勝負[청일전이결승부]’
 
(일찍기, 서로 한 집안같이 좋게 지내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성책을 엄히 하여 우리 지경을 누르려는 것은 혹 잠식하려는 준비인지, 그렇지 않아 옛 의를 그냥 유지하자면, 그 성책을 없애서 공연한 의혹을 피할 것이며, 그렇지 않거든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하자)
 
온조왕은, 칵 치받치는 노염을 누르고, 원대 대신 오간을 돌아보았다. 낙랑 태수의 글을 오간에게 주면서….
 
"좌보(左輔 ― 오간의 벼슬직함), 괘씸하고 버릇없는 낙랑의 더벅머리를 어떻게 벌하잡니까?"
 
임금의 뜻을 잘 아는 오간 좌보는 임금에게 낙랑 편지를 받아 보고서 아뢰었다 ―.
 
"글쎄옵니다. 천자(天子) 같으면 마주 대해서 다투기라도 하겠읍지만, 만리 밖(萬里外) 낙랑 변지(邊地)에 밀려 와 있는 미관(微官)이 무슨 버릇을 알리까. 어른답게 버려 두시는 편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기는 그렇소. 그럼 그 버릇 모르는 더벅머리의 심부름으로 온 이 늙은이에게 법이나 알려 줍시다. 이 낙랑 늙은이, 내 말 듣소. 남의 나라와 접경한 땅은 성을 쌓고 책을 치는 건 고금의 상도요 나라 지키는 원법이어늘, 이것으로 말썽 부리는 건 당찮은 일이오. 이걸로 시비하여 싸우자면, 우리는 소국(小國)이지만, 결코 사양치 않을 테니 그리 알소."
 
그러고는 신하들을 데리고 일어나서 그 자리를 나왔다. 낙랑인은 터지려는 분통을 참는 듯, 몸만 우들우들 떨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낙랑에 도전을 하여 두었다.
 
이로부터 백제는 말갈과 낙랑이 두 적(敵)을 목표로 한 양병에 전력을 다 하였다.
 
백제를 숙보고, 백제를 위협하려 왔다가, 도리어 욕보고 돌아간 낙랑은 그래도 백제를 칠 만한 힘이 부족하였던지 아무 소리없이 있었다. 그리고 삼 년을 지나서, 말갈을 충동하여 말갈이 와서 병산책(甁山柵)을 헐고 달아났다. 백제에서는 바삐, 다시 독산과 구천(禿山, 狗川)의 두 책을 세워서, 낙랑 길을 더 튼튼히 하였다.
 
온조왕 십삼 년에 왕의 어머님 소서노 왕후가 승하하였다. 승하하기에 임하여 아드님께, 서울 터를 옮기기를 부탁하였다. 이곳은 하도 낙랑 말갈 등과 가까와서, 베개 높이할 날이 없으니, 더 남쪽으로 서울을 옮기라는 것이었다. 남쪽은 마한땅이다.
 
이것은 온조왕도 늘 마음먹고 있던 일이었다. 혹은 사냥 다닐 때 혹은 민정 순찰 다닐 때, 마땅한 서울 터를 은근히 물색하고 있었다. 지금 어머님의 말씀까지 있고 보니, 아주 결정하였다.
 
남한(南韓)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우선 위례성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남한 땅으로 옮기고, 성을 쌓고 궁궐을 짓고 하여 이도(移都)할 준비를 하면서 마한(馬韓)과도 상의할 일을 상의하였다.
 
본시 처음 마한에게 백 리 가량을 빌었던 것이다, 백성이 저절로 오고, 돌아 붙는 지역이 저절로 넓어져서, 약속했던 백 리는 훨씬 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과 상의하여, 남쪽으로는 곰내〔熊川(웅천) - 지금의 公州(공주)〕까지 서쪽은 바다까지를 백제땅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듬해에 남한으로 서울을 옮겼다.
 
백제나라는, 처음 생길 적에는 하도 작은 나라(겨우 백 리 땅이니)라, 남들이 대수롭게 여기기 않았지만, 차차 자라자, 백제 주변의 나라는 모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으로는 바다를 꼈으니 문제 없거니와 남쪽으로는 마한이요 북과 동쪽은 낙랑 말갈 등이다. 말갈나라는 썩 북쪽에 있지만, 예(濊) 며 낙랑에 말갈 종족이 많이 잡거하여 성가시게 구는 것이었다.
 
이런 형편이라, 사면에 성을 쌓고 책을 치기에 바빴다. 장차는 마한도 삼키고 낙랑도 복멸할 것이지만, 우선 그 접경한 땅의 수비는 튼튼히 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새 국경(마한과 협정한)인 곰내에 책을 튼튼히 하매 마한 왕 학(學)이 말썽을 부렸다. 곰내는 마한과 접경한 지역이었다.
 
"그대가 처음 왔을때, 몸 붙일 땅이 없다 길래, 백 리 땅을 빌려서 나라를 세우게 했고 지금껏 대접이 후했거늘 지금 곰내에 책을 높이 쳐서, 과인(寡人)의 강토를 엿보는 듯한 것은, 신세를 원수로 갚으렴인가."
 
옛날 병산 책에 대하여 낙랑에서 항의할 때는 물리쳐 버렸지만, 마한과의 새에는 아직 시비가 없었고, 백제가 무슨 일을 하건 마한은 양보만 해오던 터이라, 이 항의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미 세웠던 책을 다시 헐었다.
 
체면과 염치에 몰려서 일단 세웠던 책을 도로 헐었지만 ‘마한도 복멸 할 곳’이라는 주의에는 추호의 변동도 없었다.
 
이 임금 이십육 년, 드디어 마한도 복멸하였다. 원산(圓山) 금현(錦峴)의 두 성이 약간 반항할 뿐이요, 다른 곳은 온조왕이 사냥한다는 구실로 데리고 간 약소한 사람으로 꺾이니만치, 속살이 텡 빈 마한이었다. 군졸 단 몇 명을 데리고 사냥하는 체 어름어름하다가 들이치니, 그만 퍽석, 이백여 년 마한의 사직은 꺾어져 나갔다.
 
인제는 마한도 없어졌다. 백제의 국경은 남으로는 바다까지 뻗었다.
 
동쪽으로는 진한과 변한이며 꼬마나라가 수십 개 있지만 문제가 안 되고, 그 더 저편에 서라벌나라이 이웃의 꼬마나라들을 차례로 삼키며 자라고 있지만 백제와는 지역적(地域的)으로건 정치적으로건 아직 아무 관련이나 상종이 없고, 오직 북과 동에 낙랑(말갈을 포함한)이 정면의 적일 뿐이었다.
 
마한을 멸하고 마한 왕인(王印)을 거두어, 이로써 아버님 동명제의 사당에 아뢸 때에, 온조왕은 감개무량하였다.
 
아버님께 분부받은 큰 목적 품고, 형님인 비류와 함께 남방으로 오자, 북쪽에서 오는 소식은 아버님의 승하함을 알리었다. 그러나, 큰 희망 큰 야심을 품고 온 온조왕에게는 아버님의 승하도 그다지 슬프게 안 느껴졌다.
 
남방에 오자 또한 형님 비류왕이 승하하였다. 이도 또한 그다지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온조왕은 나라를 이룩한 처음 시기로서, 당신의 할 일이 너무도 많은지라, 사람 결련의 그런 문제는 아주 소소하게 보였다.
 
남과 북으로 지나인의 나라를 두고 그 지나인 나라를 복멸하는 것이 아버님에게 받은 책무라, 그 이래, 온조왕은 오직 그 한길로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남북에 있던 지나인 가운데, 남에 있는 자는 지금 없이 하였다. 인제는 오직 북쪽에 지나인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동안 북쪽 아버님의 나라(고구려)에서는 아버님의 승하의 뒤를 이어, 부여에서 돌아온 형님 유리가 위에 올랐다 한다. 상거가 천여 리니, 그리고 중간에는 지나인 영토 낙랑 천 리가 끼여 있으니, 소소한 소식은 이 곳까지 오지를 못하거니와 큰 소식으로, 형님의 나라에서는 그 새 선비(鮮卑 - 몽고)를 꺾어 속국(屬國)으로 하였다 한다. 선비는 서북쪽의 강한 종족으로, 모두 저퍼하고 두려워하는 족속인데 그를 꺾어 속국으로 하였다 한다.
 
또 서울을 위나암(慰那巖)으로 옮겼다 한다. 졸본 서울은 아버님이 십년간에 크고 튼튼히 되기는 되었지만, 바닥이 더 넓힐 여지가 없는 곳이라 아버님도 늘 옮길 것을 생각하시던 바이다. 위나암은 어떤지는 모르지만 졸본 서울보다는 터전이 넓을 것이다.
 
또 최근에 들린 소식으로는, 지나인이 ‘고구려(高句麗)’ 를 ‘하구려(下句麗)’라고 저희끼리 이름을 고치었다 한다. 내란(內亂)을 즐겨하고 끊임없이 국내에 내란이 있어서, 천자(天子)의 위가 늘 바뀌는 지나에서는, 한(漢) 나라도 생긴 지 이백여 년 되었으니, 또 넘어질 때가 되었다. 왕망(王弁) 이란 사람이 생겨서 한나라 사직을 넘어뜨리고 자기가 천자가 되었다.
 
왕망이 천자가 되어서는, ‘온 세상은 지나인의 것이며 지나의 천자는 인류(人類)의 으뜸 임금’이라는 지나인 공통의 사상에 지배되어, 아직껏 한(漢)이 이백 년간 내내 범접치 못한 고구려를 호령하여 보려고 지나에서 흉노(凶奴)를 치는데 고구려에서도 군사를 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변경(邊境) 지방에서 징병을 하여 전쟁에 내보내려 하였다. 거기 끌려 갔던 장정들은 모두 새(塞) 밖으로 도망해 피해서, 그 근처 일대를 어지럽게 하였다.
 
지나인 관리(官吏)인 전담(田譚)이 이를 잡으려 하니, 그들은 도리어 전담을 잡아 죽였다.
 
여기서 임시 천자 왕망은, 엄우(嚴尤)에게 이 처리를 분부하여 엄우는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속여 유인하여서 죽이고 왕망에게는 ‘고구려 후(候) 추(騶)를 죽였노라’고 그 목을 베어 보냈다. 왕망은 기뻐서 이를 천하에 크게 자랑하고, 고구려를 내리쳐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다 한다.
 
낙랑에도 그 자랑은 전해 와서, 낙랑서도 ‘우리 한나라〔왕망은 나라를 신(新) 이라 하였다〕 이 고구려 왕을 잡아 죽이고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이름 고쳤다’ 고 들썩하며 고구려 사람을 하구려 사람이라고 갑자기 수모들을 한다 한다.
 
고구려를 모국(母國)으로 여기는 온조왕으로서는, 지나인의 이 존대가 다만 우스울 따름이었다.
 
왕망에게 망하고도 여전히 대국(大國) 행세를 하려는 지나인. 장차 낙랑에서 그들을 부수고 내쫓아 주리라. 돌아가신 아버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시던 말씀 ― ‘흰 옷 입는 사람의 땅은 흰 옷 입는 사람이 차지해야 되느니라’ 시 던 그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형님의 나라 고구려와 이 나라 백제가 땅이 마주 닿아서, 고구려에서 내미는 물그릇을 백제에서 입대고 마시며 백제에서 지은 밥을 고구려에서 먹으며, 백성들 새에는, 그 뿌리가 백제 땅에 있고 가지가 고구려땅에 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백제 것이라 고구려 것이라 다툴 세상을 가까운 장래에 꼭 현출시키고야 말리라.
 
멀리 배다른 형님의 나라의 건투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온조왕은 이 백제도 어서 그만치 키우고자 당신의 이룩한 나라에 정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온조왕으로서 마음에 불만하고 불안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즉 이 당신의 나라 당신의 백성이 형님의 나라 형님의 백성처럼 웅건하지 못한 점이었다. 체격으로도 그러하였지만, 속으로가 더 그랬다.
 
형님의 나라(아버님이 세우신 나라 고구려)의 백성은 그 성품이 순후웅건한 데 이곳 백성은 나약하고 더우기 간사한 데가 있었다. 남쪽 끝으로 내려가면서 더욱 현저하였다.
 
아마 남쪽에는, 본시 왜인이 살았고, 그 잡종이 많이 생기고, 그 위에 마한 왕실의 흐리멍덩한 치하(治下)에 수백 년 살기 때문에 생긴 성질일 것이다.
 
이것이 불안하고 불만하였다. 백성이 강건해야 강건한 나라이 생길 터인데, 이 점이 불안하였다. 지금은 북쪽에서 데리고 온 신하들이 국정을 보살피거니와, 장차 이곳서 난 사람들의 세상이 될 것 같으면, 나약한 나라로 변하지 않을지, 하루이틀로 걷어치울 일이 아니고 백만 년 계속해야 할 나라 일이라, 적지 않게 불안을 느끼는 바이었다.
 
원대하게 생각하자면 그런 일까지 근심되었지만, 눈앞의 일로서는 순조롭게 왕업은 달성되어 나아갔다.
 
사면에 성과 책을 늘려서 국방은 튼튼하여 가는 일로(一路)였다. 낙랑에 예속되었던 땅도 조금씩 조금씩 온조왕의 백제에 돌아붙었다. 시시로 말갈이 귀찮게 굴지만 그 매번 큰 타격을 주어 쫓고 하였다. 흔히(넓어 가는) 새 영토를 순시하며 백성을 어루만졌다.
 
멀리 남옥저(南沃沮)에서도 백제까지 와서 투신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고구려와 지경을 맞 접한다는 대목적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 기초와 목표는 튼튼히 섰다.
 
이리하여, 예전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서 남방으로 온 온조왕은 당신 일대 새에 한 개 나라를 세우고, 마한을 복멸하고, 나라 기초를 튼튼히 하고 ― 이만한 업적을 남기고서, 즉위 사십육 년 이월에, 아드님 다루(多婁)께 위를 물려드리고 승하하였다.
 
 
다루왕이 아버님의 이룩한 나라를 맡아 가지고 백제 제이대의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이후 대대손손 주몽왕이 처음 고구려나라를 세운 그 건국 목표와 노선(路線)에 따라서 나라를 운용하고 못하는 것은 장차 문제요, 또한 사실에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이 맞닿은 관계로 국경선 분쟁에서 알력이 시작되어서, 두 나라의 국민적의 차이 때문에 그 알력은 차차 크고 격화하다가, 고구려 임금이 백제의 유시(流矢)에 맞아 승하한 사건 때문에, 두 나라는 종내 불구대천의 원수로까지 변하였지만, 건국 초에는, 백제는 고구려를 큰 나라로 여기고 엄지 나라로 여기고, 스스로 지국(支國)으로 자처하고, 고구려 시조 동명성제 고주몽을 국신(國神)으로 그 묘를 세우고 제사하고, 고구려의 국시(國是)를 백제의 국시로 삼아 나라를 운용하였다.
 
백제의 모체(母體)인 마한은 백제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마한이 백제에게 흡수되어 없어진 지 칠팔 년 뒤, 온조왕 제삼십사 년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부하 약간을 데리고 우곡(牛谷)성에서 반기(叛旗)를 들었다가 온조왕의 친정을 받아서 처자까지 전멸하고, 그 뒤 다루왕(온조왕의 아드님으로 백제 제이대의 임금) 때에, 역시 마한 옛 장수 맹소(孟召)가 그의 거성(居城)의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서라벌에 항복한 일 등, 마한 이백 년 사직의 망해 들어가는 자취를 남기면서 기준(箕準)에서 시작된 마한은 아주 사라져 버렸다. 지나인 기자에서 시작이 되어서, 단군조선의 땅에서 업을 일으켜서, 그 지역의 이름을 그냥 답습하여 기씨 조선이라 하던 나라는 차차 요지(遼池)를 거치어 압록강을 넘어 패수(浿水) 너머까지 발전하여서 이 땅 본래의 주인 단군은, 기씨의 왕성한 세력 뒤에 감추여서, 알아볼 수 없도록 모호하게 되어서, 그 땅도 기씨의 것인 듯 나라 이름 ‘조선’도 기씨의 독점으로,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도 기씨의 백성인 듯 이러한 천 년 세월을 지내다가, 역시 지나인인 위만(衛滿)에게 땅도, 나라 이름도, 주민(住民) 도, 송두리째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이 땅에 마한 왕실을 세워 가지고 또 이백여 년을 왕 노릇 하다가, 왕검님이 후손, 해모수님의 손주님인 온조왕에게 아주 망하여 백제 땅의 한 망민으로 남았다.
 
그 기씨를 조선땅에서 내쫓은 위만(衛滿)은 단 백 년도 왕 노릇(조선 왕)을 못하고, 지나 본국병에게 망하였다. 지나 정부는 조선(위씨의)을 멸하고, 그 땅에 네 고을 두었다. ― 이리하여, ‘조선’은 아주 없어졌다.
【역사소설】 서라벌
• 유리(類利) - 3
• 유리(類利) - 4
• 조선(朝鮮)
(2021.08.19. 11:00)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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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