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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서라벌
◈ 서라벌(徐羅伐) - 2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고구려 둘째 임금(주몽왕의 아드님)인 유리왕은 첫 번 맞았던 왕후를 잃고 계후(繼后)로서, 치히(雉姬)와 화희(禾姬)의 두 사람을 맞았다.
서라벌(徐羅伐) - 2
 
 
翩翩黄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擉[염아지착]
誰其與歸[수기여귀]
 
이것이 이 겨레의 글자,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족의 최초의 노래다.
 
 
고구려 둘째 임금(주몽왕의 아드님)인 유리왕은 첫 번 맞았던 왕후를 잃고 계후(繼后)로서, 치히(雉姬)와 화희(禾姬)의 두 사람을 맞았다. 화희는 이 졸본 서울 근방인 골령(鶻嶺) 기슭 냉곡(冷谷)에 경치 좋은 곳에 터 잡아 이 궁(離宮)을 짓고, 두 계후를 그곳에 두었다.
 
두 계후는 서로 임금의 총애를 많이 사고자 경쟁하였다. 시기질투는 죽음으로 벌하는 제도화 풍습과 전통 아래서 길러난 화희는, 오직 임금의 총애를 더 많이 살 수단으로서 재간 다하여 임금께 고이 보이려 하였다.
 
치희는 화희에게 대한 질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임금께 고이 보이려는 수단을 쓰기보다 임금께 화희를 깎기에 주력하였다.
 
임금은 당신께 고이 보이려고 온갖 수단 다 쓰는 화희도 사랑하였다. 동시에 치희의 강짜하는 꼴도 이쁘게- 더욱이 이국(異國) 여인이라는 점에 대한 호기심도 겸하여 치희도 화희에게 못하지는 않게 사랑하였다.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 나가서 이렛동안을 거기 묵었었다. 그동안에 두 계비의 새에는 큰 충돌이 생겼다.
 
고구려 아낙이라는 종족적 자랑을 가지고 있고, 한(漢)을 적시하고 얕보고 수모하는 화희는 종내 민족적으로서의 욕을 하였다-.
 
"너는 한(漢)나라 계집이(한나라를 수모하여 하는 말이다) 고구려 물을 마시는 것만도 광영이거늘 어디다 감히 내게 맞서는냐. 그런 버르쟁이는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지만 고구려에서는 못하느니라. 오랑캐 계집같으니!"
 
근본까지 들추어 욕하였다. 고구려 있어서는, 한인(漢人)이라 하면 포로거나 또는 제 나라를 망명하여 고구려에 투신한 사람들이라, ‘종(奴)’이라는 욕이나 일반이었다. 치희는 분하고 부끄러워서 숨이 딱딱 막혔다. 같은 지아버님을 섬기는지라, 자기거나 화희거나 일반으로 지아버님께는 다만 안해이요 여인이다. 그렇거늘 자기는 ‘한인’인 탓으로 이 수모를 받는가.
 
받지 않을 수 없는가.
 
시기 강짜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쯤으로 알고 있는, 지나인인 치희는, 그 억울하고 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여인의 강짜를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 도덕 표준이라, 이 분한 심정을 하소연할 곳도 없고, 자기가 한인인 이상은 언제까지나 면치 못할 수모라, 치희는 흥분과 분기를 참을 수 없어서, 이 임금의 아래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의 안해라는 지위가 아무리 영화스럽다 할지라도, 한인인 수모는 그냥 부어져서, 자기에게 시종드는 시녀(고구려 계통의)들까지도 ‘임금의 안해’ 이니 시종드는 것이지, 한인이라는 모멸심은 가지고 시종든다.
 
사냥에서 돌아온 임금은, 치희가 나갔다는 말을 듣고, 치희에게 대한 애정은 그냥 갖고 있는 터이라, 치희가 그리워서 말을 달려서 치희를 쫓아갔다.
 
치희를 만나서 같이 다시 돌아가기를 청했지만, 치희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아무리 ‘임금의 안해’라는 지위가 영화스러울지라도, 시녀들에게까지 수모를 받으면서 살아 가야 하니, 도리어 민간에 나가서 한 백성으로 지내자면 그런 수모는 받지 않을 것이라, 수모가 역하여서 다시 ‘임금의 안해’ 노릇을 안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치희를 달래다 못해서, 성공을 못한 왕은 하릴없이 치희를 단념키로 하였다.
 
단념키로 마음 먹었지만 연련한 정애는 삭일 수 없어서,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감회를 글로써 나타내는 것이 여상의 노래다.
 
-유리왕 즉위 삼년 때의 일이다.
 
이러한 가정적의 비극은 겪으면서도 ‘아버님에게서 물려받은 왕업은 순조로이 진척되어 나아갔다.
 
 
제십일 년, 선비(鮮卑)에게 대한 철퇴를 내렸다. 선비는 나라이 험한데있고, 유목(遊牧) 민족이라 백성이 모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지나나라도 이를 큰 국우(國憂)로 여기느니만치 두통거리의 나라다. 그 나라이 험한데는 자리잡고 백성이 모두 무(武)에 능하기 때문에, 좀체 치기 힘들었다.
 
다른 나라이 능히 치러 올 생각도 못 내는지라, 선비는 안전한 살림을 하면서 자기네들의 넘치는 힘을 가지고, 연해 남의 나라를 침노한다. 말을 달려서 와서 침노하다가 불리하게 되면 말타고 도망하여, 제 나라 안전한데 들어가 버리고 만다.
 
고구려가 서쪽으로 벋어 선비와 지경을 접하게 되면서는 늘 그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고구려 역시 팽창한 힘, 주먹 처치할 곳이 없는 형편이었지만, 선비는 전광 석화적으로 와서 건드리고는 곧 다시 도망쳐 제 나라 깊은 데 들어가 숨어 버리는지라 성가시고 귀찮았다.
 
십일년, 유일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이 걱정을 하였다.
 
 
장군 부분노(扶芬奴)가 임금의 걱정에 대하여 한 무릎 나앉으며 아뢰었다.
 
부분노는 아버님 주몽왕 때부터의 명장으로 주몽왕의 아래서 행인(荇人)국을 복멸할 것을 첫 공로로 하여, 고구려 발전의 무수한 싸움에 일찌기 실패해 본 일이 없는, 지혜와 힘이 아우른 국보적 명장이었다. 오십이 넘은- 초로(初老)에 든 나이였지만, 그 기개는 하늘을 삼킬 듯 왕성하고 젊은이를 넉넉히 능가하였다.
 
"나랏님, 선비 따위를 무얼 근심하십니까. 생식(生食)하는 오랑캐를."
 
"지금 우리나라에 선비 밖에야 근심될 만한 나라가 어디 있소?"
 
"하기는, 나라이 험하고 놈들이 싸움 잘하니 귀찮기는 합지만, 용(勇)은 있어도 지(智)는 없는 놈들이 아닙니까. 힘으로 싸우자면 좀 귀찮지만, 방략으로 싸우면 보잘것 없을 줄 아옵니다."
 
"어떤 방략을?"
 
"신 생각해 본 일이 있읍니다. 이렇게 했으면 될 줄 아옵니다."
 
부분노의 아뢴 꾀는 이러하였다.
 
미리 사람을 놓아 선비에 들어가게 하여, 이런 공설을 퍼뜨린다. 즉 고구려는 싸움에 뒷심이 없는 나라로서, 처음 손 붙이기는 용감하고 활발하나, 그 첫 손만 꺾어 놓으면 뒤는 아주 보잘 것 없다. 지금껏 고구려가 상대 한나라는 고구려의 첫 손질에 부러졌지 때문에 고구려가 강한 듯이 이름났지만, 선비 같은 강한 나라이 고구려의 첫 손질을 딱 막아 놓으면 뒤는 아주 맹랑한 나라다. 이런 소문을 선비에 퍼뜨린다.
 
그런 뒤에 부분노 자기는 일지병을 이끌고 선비나라를 건드린다. 건드려서 한참 싸운다. 그러다가는 패하는 체 도망친다. 그렇게 되면 선비는 지금껏 싸우느라고 동원했던 정예를 이끌고 부분노를 따라올 것이다. 그 따라오는 선비를 유인해 서쪽으로 끌고 가고.
 
다른 장수(합부 장군이든 누구든)를 시켜서, 또 선비를 건드리어 한참 싸우다가 도망쳐서 선비의 또 한 개의 정예 부대를 동쪽으로 유인해 가고.
 
북쪽도 그렇게 하고.
 
그 유인해가는 도달처에는 큰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유인해 온 선비를 지나 보낸 뒤에 배후에서 돌격해서, 유인하던(도망하던) 군사까지 돌아서서, 선비를 가운데 넣고 앞뒤에서 협격해서, 그물 속의 고기인 선비를 잔멸하고.
 
임금은 고구려의 정예를 친솔하고,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선비가 동쪽과 서쪽과 북쪽으로 유출된 빈 성(설사 비지까지는 않았을지라도, 크게 약화(弱化)된) 안에 돌입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성을 빼앗을 것이다.
 
유출하고 도망하고 복병하기 위해서는, 선비의 근방 지리를 잘 알아야 할것이다. 선비에게 ‘고구려가 뒷심이 없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기간을 이용하여 선비의 동서남북의 지리를 잘 연구해야 할 것이다.
 
― 부분노 장군의 이 방략은 채용되었다. 선비에 소문 퍼뜨릴 부대, 지리 연구할 부대는 왕명을 받아 고구려를 떠나서 선비에 잠입하였다.
 
산간 지대의 나라인 선비에서 싸울 만한 병졸(고구려 자체가 산간에 있느니만치, 고구려병은 모두 산악전에 능하였다)을 다시 맹훈련을 거듭하였다.
 
준비와 예비가 다 끝나고 날짜를 미리 잘 짜 가지고, 선비 공략의 막은 드디어 열리었다. 지나인도 감히 건드리기를 꺼리는 선비에게 대하여 신흥 고구려는 손을 붙이었다.
 
부분노 장군의 작전 병략은 용히 들어맞아서, 부분노 장군 인솔의 유출대가 거짓 도망칠 적에 선비는 국력의 거진 전부를 들어 부분노 부대를 추격하였다. 그래서 합부 장군의 제이대가 공격하다가 거짓 패주할 때는, 벌써 선비는 아주 미약한 군졸로 추격하였고, 고구려 제삼대가 가서 건들릴 때는, 이를 맞아 싸울 군사도 없는 듯 늙은이며 여인들까지 모두 창과 칼과 내지 막대까지 가기조 나와 싸웠다.
 
이런 형편이니 유출하려야 유출할 군대가 없었다. 그냥 성내로 돌입을 하자니 이 돌입의 영예는 임금께 돌리어야 될 것이라, 제삼대가 유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임금 친솔 부대에 그 뜻으로 알리어서, 유리왕은 선비의 추장(酋長)과 몇몇 막료와 늙은이 여인들만이 남아 있는 선비성에 입성하여 이를 점령하고 그 추장을 사로 잡았다.
 
고구려군에게 유출당한 선비병은, 도달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군에게 포위 당하여,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사로 잡혀서 잔멸하였다.
 
고구려를 두고두고 귀찮게 굴던 선비 부락은 이리하여 복멸되고 선비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나라의 큰 암종을 제거하여 속국으로 삼고 개선하여서, 임금은 이 공로를 크다 보아서 공로자 부분노 장군에게, 상으로 식읍으로 선비를 하사하려 하였다.
 
여기 대하여 부분노 장군은 굳이 사양하였다.
 
"소신, 선대왕 주몽님께 발탁을 받자와 오늘날이 소신의 부귀는 모두 나랏님 덕분이로소이다. 오늘날 선비를 이긴 것도 무비 나라의 덕이옵지, 소신이야 저 한 병졸이나 일반으로, 나랏님 아래서 일할 뿐이옵지, 소신의 공이 무엇이 있사오니까. 소신께 무슨 상을 주시오면 저 병졸도 공이 소신만 못 하지 않사오니, 소신께 주시고 병졸에게는 없사오면 공평을 잃는 것이 옵니다. 모두가 나라의 덕이옵고 나랏님의 덕이오니, 소신께는 아예 특별한 상이 없으시기를 바라옵니다."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공을 크다 보아서, 공에 대한 상이 없을 수 없어서, 유리왕은 다른 원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황금 삼십 근과 좋은 말 열 마리를 상으로 하사하였다.
 
이렇듯 선비까지 꺾어서, 고구려의 이름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역사소설】 서라벌
• 서라벌(徐羅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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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11:00)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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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