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徐羅伐) 4
유리왕의 맏아느님 해명(海鳴)왕자는, 할아버님 주몽왕을 닮아서, 그 기상이며 역량이 비범한 소년이었다.
아버님이 국내(國內) 땅에 새 대궐을 짓고 이사간 뒤에도, 해명 왕자는 옛 서울 졸본에 유수하고 있었다. 합부 장군〔벼슬이 대보(大輔)였다〕이 구도(舊都)에 머물러 해명 왕자를 모시고 있었다.
할아버님이 영웅적 기상과 성품을 물려받아, 장차 훌륭한 왕업을 이룩할 이라고 모두들 기대가 큰 왕자였다.
왕자는 합부 대보를 상대로 늘 고금동서의 영웅열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물으며, 소년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왕자의 할아버님 동명성제가 부여에 한 무병 소년으로 있을 때부터 동명의 아래 들어서, 이래 고구려 창업에서 발전으로 대성(大成)의 오늘날까지, 처음은 동왕을 협좌하고 그 뒤는 유리왕을 협좌하여 오늘에 이른 합부 대보는, 인젠 벌써 육십 노인이었지만, 아직도 그 패기며 원기는 젊은이를 능가하였다. 육십 년의 인생 경험은 소년 왕자의 지식벗〔友〕노릇 하기에 맞았다.
이날도 왕자는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두 영걸이 좌어(坐御)하시던 용상에 걸터 앉아, 합부 대보를 상대로 세상 잡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해명님. 나랏님(유리왕)께오서는 근자 너무도 사냥에 짐착하시는 듯 하온데, 나랏주인 되시는 몸으로 좀 너무 사냥에 치중하시는 듯해서 이 늙은이는 근심스럽습니다."
"글쎄요, 국태민안 - 사냥 밖에는 하실 일이 없으시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부여 있삽고 낙랑 있삽고, 왜 하실 일이 없겠습니까? 하실 일, 하셔야 할 일이 많고 많습니다."
"그러기에- 부여 있고, 낙랑 있기에, 사냥이나 하고 모른 체 하셔야지 않을까요?"
만약 이것이 지모(智謀). 다 자란 어른의 말이라면, 그렇기에 남의 눈 속이기 위하여 사냥이나 해야지 않느냐는 뜻으로 들을 것이지만, 아직 열 다섯 소년이라, 합부 대보는 무에라고 응해야 할지 잠깐을 주저하였다.
"지금 서울을 새로 옮겨, 백성의 마음이 불안한 때에, 지금도 또 질산(質山)에 사냥 가셨지요. 벌써 나흘, 아직 안오시니, 이 일이 되겠어요? 이번 사냥에서 돌아오시면 이 늙은이가 한번 가서 간(諫)해 보겠읍니다."
"해보시오마는 듣지는 않으실 것이고, 내 생각으로도 지금 사냥 밖에는 하실 일 없을 것 같소이다."
임금은 닷새가 지나서야 사냥에서 돌아왔다. 합부는 행장을 차리고 졸본을 떠나서 새 서울 국내로 갔다.
임금께 뵙고 사냥이 과하다는 뜻으로 임금께 아뢰었다. 그러매 임금은
"지금 사냥 밖에야 무에 할 일이 있소?"
꼭 해명 왕자와 같은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지금 새 서울의 민심도 안돈되지 않은 이 때, 나랏님께서 만날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오시면 백성이 마음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사냥도 안하면 내 마음이 불안한 걸 또 어쩌겠소?"
"나랏님!"
선왕 주몽님은 이러하지 않았다. 오이 마리 합부 등 원로 대신이 무슨 충언을 하면 청납하거나, 설사 청납치 않을지라도 정중하게 듣기는 하였다. 그런데 유리왕의 태도는 어디인지 조롱하는 듯한 기색까지 있었다.
"이러시다가는 나라를 잃으시리다."
"대보는 말을 삼가시오. 무슨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시오?"
"나라를 위하고 나랏님을 위한 말씀이옵니다. 소신은 나랏님보다 일찍부터 고구려 세우기에 애쓴 늙은이올시다. 고구려를 사랑하는지라, 이런 말씀을 아뢰옵니다.
"고구려를 사랑하는지라 고구려에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시오?"
"상서롭지 못한 말씀이 아니옵니다."
무장의 괄괄한 성미요, 고구려 창업에 큰 기둥이로라는 자신을 갖고 있는 합부라, 함부로 말을 내던졌다.
"대보! 대보는 원로 대신이고 노인이고 하기에 덮어 두거니와, 다시는 그런 상서롭지 못할 말 하지 말우!"
"또 하리다. 그러시다가는 나라를 망치오리다!"
그러고는 당장에 합부의 대보 벼슬을 깎고 동산지기〔원(園)직(直)〕로 내리 쳤다.
합부는 졸본 옛 서울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손 잡아 기른 왕손 해명께 그 정을 하소연 하였다.
"그러기에 내 그리 말라고 미리 말하지 않습디까. 대보는 오래 아버님을 모시고도 아버님을 모르시는구료."
합부는 자기는 결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적성에서 임금께 임금의 잘못을 말한것이, 신도(臣道)에 결코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유리왕)은, 합부가 주몽왕과 협력하여 이 나라를 이룩하고 기초 튼튼히 잡은 뒤에 비로소 부여에서 건너온 이다. 합부 자기보다 고구려에 소원한 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랏일에 이처럼 성의가 없는 것인가 생각되었다. 동시에 자기가 손목 잡아 기른 왕자 온조님이 그리웠다. 그 온조님은 지금 남방에 가서 백제라는 나라를 이룩하고 임금이 되어 있다 한다. 온조님을 찾아가면 얼마나 반가와하랴. 온조님이 세우신 백제나라도 보고 싶거니와 온조님이 그리웠다. 이곳서 유리왕께 바쳐도 받아주지 않는 충성을 온조님께 바쳐서 백제라는 나라 키우는데 협좌를 할까. 아버님 되는 주몽왕을 도와서 고구려국을 건설하였으니, 이 늙은 몸의 여생을 다시 온조님께 바쳐서, 백제 키우는데 할 팔의 힘을 도울까.
늙으면 나무람이 많아진다. 합부는 유리왕이 간언(諫言)을 청납하지 않은데 큰 나무람이 가고, 그 나무람에서 온조왕이 그리워졌다.
이틀을 생각한 뒤에, 남방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자기를 몹시 위해 주던 해명 왕자를 두고 떠나기가 좀 마음 언짢았지만, 온조왕의 장성하시고 왕 노릇하시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은 해명 왕자를 떠나는 일에 넉넉히 벌충이 되었다.
합부는 자기가 떠나는 데 대하여 해명 왕자께도 아뢰지 않았다. 알리어서 붙들면 뿌리치기도 어려웠지만, 간다 못 간다는 말썽이 유리왕 귀에 들어갔다가는, 억센 유리왕은 어떤 처분을 할지, 그것도 무서웠다. 그래서, 합부는 자기가 떠난 뒤에 왕자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직의 글월을 닦아서 아랫사람에게 부탁하고, 몰래 국내 서울을 빠져서 남방으로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