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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만덕 눈만 뜨면 암기하며 금강산 구경...천하에 괴이하고 경치가 빼어난 명산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
만덕은 금강산으로 가면서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을 달달 외었다. 금강산을 안내하는 글의 내용이 아주 쉽고 외우기 좋아 모두 외워 중얼거렸다. “천하에 유명한 산 서른여섯 중에 셋은 조선에 있는데 영주, 방장, 봉래산이다. 영주는 한라산(漢拏山), 방장은 지리산(智異山), 봉래는 금강산(金剛山)이다.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
 
만덕은 금강산으로 가면서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을 달달 외었다. 금강산을 안내하는 글의 내용이 아주 쉽고 외우기 좋아 모두 외워 중얼거렸다. “천하에 유명한 산 서른여섯 중에 셋은 조선에 있는데 영주, 방장, 봉래산이다. 영주는 한라산(漢拏山), 방장은 지리산(智異山), 봉래는 금강산(金剛山)이다.
 
병자 춘삼월 이십사일에 서너 명이 금강산을 찾아 떠났다. 철원과 김화(金化)를 지나 관동에서 제일 높은 고개(嶺)인 단발령에 이르니 금강산이 구름같이 벌여 있다. 산의 입구에 있는 큰 절인 장안사(長安寺)에 들러서 푸른 산색(山色)과 절을 구경하고,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 백화암을 살펴본 뒤, 길을 떠났다.
 
표훈사를 거쳐 정양사에 이르니 층층이 쌓인 바위와 절벽, 깊은 골짜기와 수많은 산봉우리에 녹음이 우거져 있다. 홀성루에 올라서 보니 일만 이천 봉이 창을 세운 듯 옥을 깎은 듯 벌여 있다. 금강문을 지나 만폭동을 향하니 반석 위에 글이 있는데, ‘봉래풍악이요 원하동천’이라고 쓰여 있다.
 
금강산이 사시(四時)로 변하여, 봄에는 봉래, 여름에는 금강, 가을에는 풍악, 겨울에는 개골산이니, 사계절 중에 봄과 가을의 경치가 가장 좋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 전후좌우에 폭포 소리가 요란하여, 귀가 먹먹하고 눈이 현란한데 이것이 팔담(八潭)이다.
 
 
▲ 금강산 팔담(八潭)
 
 
팔담은 흑룡담, 비파담, 벽파담 등 모두 이름이 있고, 이 물이 흘러서 만폭동(萬瀑洞)이 되었다. 위에는 보덕암이 공중에 달린 듯 높이 있다. 마하연을 찾아가니 층층이 쌓여 있는 바위는 천년을 누리는 돌부처요, 불조(佛祖)는 속세에서 온 사람을 조롱하니, 극락세계 아니면 신성스러운 산이다.
 
동구에 이르니 정쇄암 암자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고, 세상 티끌이 전혀 없으니 금강산 복판이다. 세조(世祖)가 머리를 깎은 후 이 절로 공부하러 올 때 세조는 속세의 임금이니 이곳에 올 수 없다고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는 곳으로, 성인(聖人)만이 살 수 있을 곳 같다. 절에서 낙파라는 노승(老僧)을 만났다.
 
 
▲ 금강산 한하계, 1919년 촬영(사진:국립중앙박물관)
 
 
그는 원래 동래 사람이며 금강산에 와서 중이 된 뒤 사십 년간 동구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팔십구 세에도 근력이 정정하다. 백운대로 향하니 모든 산은 다 아래로 보이고, 하늘이 머리 위에 멀지 않은 듯하다. 상쾌한 마음이 학을 타고 백운(白雲) 간에서 왕래하는 듯하다.
 
금강수라는 물은 마시면 마음이 깨끗하고, 정신이 상쾌하고 깨끗하여 오랫동안 마시면 환골찰태(換骨奪胎)한다고 한다. 묘길상을 찾아가니 십여 길 절벽에 석가여래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영원동으로 가는 길에 황천강이 있다.
 
또 그 위에 연경대가 있고, 아래에는 흙사굴과 금사굴이 있는데, 음침하다. 한 욕심 많은 부자가 갇혀 있다고 전해온다. 영원암에 이르니 안산 시왕봉이 붓을 꽂은 듯하고, 봉봉이 이름이 있으며 가지런하고 단엄하여 지부 십대왕이 벌려 선 임금의 행렬 같다. 금강산에서 가장 깊은 태을암(太乙庵)을 들른 뒤에 유점사로 향하다가 만경동에 다다르니 층층 암벽이 다 폭포수다.
 
유점사에 이르니 금강 내외 산 중에 제일 명승이고, 번화한 큰 사찰이다. 능인보전(能仁寶殿)을 바라보니 전각도 번화하고 기구도 찬란하다. 채색한 나뭇등걸 가지마다 오십삼불(五十三佛)을 차례로 앉혔으니, 오십삼불은 본래 서녘 월시국 부처가 그 나라 임금과 금강산 구경을 왔던 공덕으로 월시왕 사당을 짓고, 화상을 두어 지금껏 기리는 것이다.
 
 
▲ 유점사 능인보전(사진:조선고적도보)
 
 
법화당 흥성암을 본 뒤 다시 능인보전에 와서 인목왕후 친필과 오색주렴(五色珠簾)을 보고 신계사로 향하였다. 신계사에서 만세루에 올라보고, 다시 산천의 경치를 구경한 뒤에 이튿날 구룡연을 찾았다.
 
연주폭포는 경치가 비할 데 없이 빼어나고 은하수가 드리운 듯하며 무지개가 백 리 길에 비끼는 듯하다. 비룡폭포, 무봉폭포는 기운이 금강산에 자욱하고 위에는 팔담이 있어 물이 흘러 구룡연이 되었다. 신령한 기운이 가득한 보광암에 들르고 마타암을 지나 신계사로 돌아왔다.
 
 
▲ 외금강 신계사 대웅전(사진:조선고적도보, 유리원판)
 
 
이튿날 만물초(萬物草)에 도착하니 층층한 돌, 솟아난 바위가 세상 만물의 모양이다. 금강문을 지나니 천지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신선이 거처하는 곳 같다. 일만 기둥이 하늘을 받들고, 일천 암석이 공중을 괴어, 선관(仙官)이 학을 타고 옥경(玉京) 주에서 조회하는 모양이다.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니, 선계(仙界)를 하직하고 다시 인간 속세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아무리 거짓을 잘하는 자라도 많고 많은 경치를 모두 말하기 어려우니, 과연 천하의 괴이하고 경치가 빼어난 명산이다.
 
사월 십육일 집으로 돌아와 그리운 집안 식구를 만나, 극락세계가 멀리 구할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이라 하니, 모두 옳다 하고 웃지 않는 이가 없다.” 만덕은 눈만 뜨면 천자문(千字文)을 외우듯이 《금강산유상록》을 소리 내어 읽었다.
 
불교 경전에는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해중금강산(海中金剛山)을 열거하고, 거기에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2,000여 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지금도 설법한다고 하였다.
 
 
【출전】 다르마가타(Dharmodgata)
 
신화엄경 권45 금강산에 사는 보살로 법희보살, 법기보살, 보기보살, 법상보살, 법용보살, 담무갈(曇無竭) 보살로 불린다.
 
「據新華嚴經卷四十五諸菩薩住處品載,此尊為住於金剛山之菩薩。又作法喜菩薩、法基菩薩、寶基菩薩、法尚菩薩、法勇菩薩。亦即舊華嚴經與道行般若經所說之曇無竭菩薩。」
 
 
법기보살 설법의 내용은 주로 반야에 관한 설법으로 8세기 전반에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 등에 의해서 신앙으로 정립되었다. 표훈은 법기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법기봉(法起峰)을 뒤로하고 표훈사(表訓寺)를 중창했다.
 
법당 반야보전에 법기보살의 장육상(丈六像)을 주존불(主尊佛)로 안치하였다. 불상은 동쪽 법기봉을 향해 안치시켰는데, 이는 법기보살이 향하는 위치를 화엄경에 준해 배치한 것이다. 또, 법당의 이름을 반야보전이라 한 것은 법기보살이 항상 반야의 법문을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능파루도 팔작지붕 누각 건물로 18세기 말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 준다.
 
 
▲ 최북 표훈사(表訓寺)
 
 
표훈사는 신라 진평왕 20년(598)에 관륵(觀勒)이 융운(隆運)과 함께 창건하였으며, 문무왕 15년(675)에 표훈, 능인, 신림 등이 중창하였다. 고려왕조에서는 원나라 영종과 태후가 시주하여 중창하고, 은문동로(銀文銅爐)와 향합(香盒)을 절에 시주하였다.
 
절에서는 각종 법회가 열리고 자주 반승(飯僧) 등을 베풀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서 명나라 사신 창성(昌盛) 백언(伯彦)이 태종 8년(1408), 세종 9년(1427)과 1432년에 표훈사에 들려 반승회(飯僧會: 승려를 공경하고 받들어 모신다는 뜻에서 재식(齋食)을 베푸는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전통은 현재 사찰에서 대중공양(大衆供養), 공양청(供養請) 등의 표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세종 때 예조에서 조사해 보니 절에 150명의 승려가 거주하여 나라에서 밭 90결을 더 내려주어 모두 300결의 밭을 가졌다.
 
 
▲ 표훈사(表訓寺) 능파루와 청학봉
 
 
표훈사의 당우로 반야보전, 영산전, 어실각, 신신각, 능파루(凌波樓), 판도방이 있다. 절 안의 수충영각(酬忠影閣)은 서산, 사명, 지공, 나옹대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표훈사에는 문화재가 많고, 원나라 임제종 고승인 몽산화상(蒙山和尙, 1231~ 1308)의 가사와 나옹화상의 사리, 야보전 앞에 철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강탈당했다. 부속 암자로는 경순왕 비(妃)가 창건했다는 전설을 가진 돈도암(頓道庵)과 신라시대 탑이 있는 신림암(神琳庵), 서산대사가 창건한 백화암지(白華庵址)가 있다.
 
법기보살에 대한 신앙은 표훈사 뒤쪽 5리쯤에 있는 정양사(正陽寺)에서도 찾을 수 있다. 표훈사는 676년에 처음 세울 때는 신림사로 불렀다. 1777년 대폭우로 사찰 전체가 유실되어 1778년 크게 보수했다고 《유점사본말사지》 에 기록되었다.
 
 
▲ 장전항(사진:朝鮮金剛山大觀. 1914년 촬영)
 
 
1699년(숙종 25)의 호구조사에서 조선왕조의 인구는 577만 2천300명으로 6년 전과 비교하여 141만 6천274명이나 줄어들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번창하고 문화가 꽃 피던 때는 영조와 정조 시기였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날씨가 안 좋고, 전염병이 자주 발생해 민중의 삶은 나날이 고통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조 19년(1743)에 인구 6만 명이 죽고, 영조 26년(1750년)에 9월에만 6만 7천890명이 사망했다. 정조 23년(1799)에 12만 8천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계속 이어집니다)
 
 
【출전】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1월 13일
 
전염병이 유행하자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구활토록 하다.
 
이 해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경외(京外)의 사망자가 모두 12만 8천여 인이었다. 전교하기를, “성 안팎의 가난하고 잔약한 백성으로서 자력으로 병을 치료하기 어려운 자나 죽어서 장사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각부(各部)에 엄히 신칙(申飭)하여 진휼청에 뽑아 보고해서 연교(筵敎)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라. 三南 및 제도(諸道)에 대해서도, 또한 엄히 신칙하여 막(幕)을 짓고 굶주림을 구하는 일과 기타 돌보아주는 일들을 일체 경청(京廳)의 예(例)에 의거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또 고을 소재지와 거리가 조금 멀어서 미쳐 두루 살필 수 없는 곳에 대해서는 해당 동리(洞里)에서 힘을 모아 서로 돕도록 하라. 그리고 몇 사람을 구하고 몇 사람을 거두어 장사 지냈는지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 壬申/是歲, 有輪行之疾, 京外死亡, 凡十二萬八千餘人。 敎曰: "城內外貧殘病難療治者, 死無以營葬之類, 嚴飭各部, 抄報賑廳, 依筵敎擧行。 三南及諸道, 亦爲嚴飭造幕, 救飢與顧助, 一依京廳例擧行。 邑治稍遠, 未及遍察處, 令洞里, 出力相助。 活得幾口, 收葬幾口, 令道臣狀聞。"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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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09:55)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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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