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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20m 절벽에 구리 기둥으로 받쳐 절 지어...국보 유적 98호 지정
신비로운 사찰 금강산 보덕암
만덕 일행을 안내하는 승려는 “날씨가 좋을 때 가까운 곳에 있는 보덕암을 가야 한다" 라고 하며 거친 산길을 안내했다. 만폭동 2km 계곡에 보덕암을 가려면 계곡의 푸른 못을 보고 지나가는데 금강산에서 가장 멋지고 제일 신비로운 곳이다. 만폭동 골짜기의 너비는 약 50~70m로 이곳은 가마를 탈 수 없어 선비들도 동물처럼 네발로 빡빡 기어갔다.
신비로운 사찰 금강산 보덕암
 
 
만덕 일행을 안내하는 승려는 “날씨가 좋을 때 가까운 곳에 있는 보덕암을 가야 한다" 라고 하며 거친 산길을 안내했다. 만폭동 2km 계곡에 보덕암을 가려면 계곡의 푸른 못을 보고 지나가는데 금강산에서 가장 멋지고 제일 신비로운 곳이다. 만폭동 골짜기의 너비는 약 50~70m로 이곳은 가마를 탈 수 없어 선비들도 동물처럼 네발로 빡빡 기어갔다.
 
 
▲ 보덕암(사진: 현대아산)
 
 
금강산 내금강면 법기봉(法起峰) 만폭동에 있는 보덕암은 고구려 고승 보덕이 수도하기 위해 5.3m의 자연 동굴을 활용하여 영류왕 10년(627)에 보덕굴을 창건했다. 고려의 회정 선사가 1115년에 중창하고, 1675년에 조선 왕실에서 암자를 복원하였다.
 
보덕암은 1808년에 중수하여 북한 국보 유적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암자 규모는 7.3m의 구리 기둥과 석주(石柱)로 마루 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익공 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그 위로 기둥과 보를 짜서 높인 집이다. 법기봉은 서북쪽의 향로봉과 서로 마주 보고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만덕은 산봉우리를 부처님으로 여기고 절을 했다.
 
 
▲ 황해도 장수산 현암(사진; 나무위키)
 
 
보덕암과 비슷한 암자는 황해도 금강산인 재령군 장수산 현암(懸庵)에 있다. 장수산 절벽 위에 매달린 절은 신라 제54대 왕 경명왕 7년(923)에 이엄(利嚴, 870~936) 선사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엄은 12세에 가야산 갑사에서 출가하고 교학을 공부하다가 진성여왕 10년(896)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석두희천(石頭 希遷) 계열의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다. 이엄은 당나라 각지 사찰을 순례하고 효공왕 15년(911)에 신라에 돌아왔다.
 
이엄은 후삼국의 쟁패가 격화되면서 김해 지역을 떠나 상주, 영동의 사찰에 머물다가 고려 태조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에 올라왔다. 왕의 후원으로 해주에 광조사(廣照寺)를 창건하고 932년에 이엄 선사는 수미산문(須彌山門)을 열었다.
 
이엄이 수행했던 절은 절벽에 달아맸다 하여 달암절이라고 불렀다. 현암은 패엽사의 말사로 북한 국보 유적 제81호로 지정되었다.
 
금강산은 고려왕조 때에 왕실과 출입을 허가받은 이들만 제한적으로 방문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는 사대부와 고급 관리가 금강산을 방문했다. 고려왕조 태조 왕건과 조선왕조 세조의 금강산 행차가 가장 화려했고 많은 전설과 신화를 탄생시켰다.
 
 
▲ 금강산 보덕암 펜화(사진:김영택)
 
 
김영택(1945~2021) 화가는 보덕암을 그리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의자에서 펜을 들고 천천히 그려나갔다. 화가가 정성을 다해 그린 펜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보덕암은 20m가 넘는 절벽에 널쪽을 걸치고, 이 널쪽이 떨어지지 않게 밑에서 구리 기둥으로 받친 다음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단순하게 구리 기둥만으로는 암자가 지탱되지 않아 암자 위쪽 암석에 구멍을 파고 쇠말뚝을 박아 쇠사슬로 암자와 연결을 시켰다. 이 암자는 한 명이 참선하기에 딱 맞는 1평이 채 못 되는 전실이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구리로 감싼 기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예전에는 굵은 나무 기둥으로 밑을 받친 것으로 추정한다.
 
보덕암 관음전에 모셔진 불상의 영험은 멀리 중국까지 전해져 명나라 사신 정동(鄭同)은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보덕굴을 보고 “참 불계(佛界)가 바로 여기다. 죽어 다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길이 이 불계에서 살고 싶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정동은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10월 명나라 환관으로 선발되어 베이징으로 보내졌다. 명나라는 전 왕조와 다르게 환관을 10만 명씩 두었다. 환관은 세금을 걷고 황제의 심부름을 많이 하였다.
 
명나라는 지방에서 현명한 인재가 부족해지자 조선 세종 때 환관을 요청했다. 조선에서는 12세~18세 사이의 남자아이를 선발하여 명나라에 환관으로 보냈다. 정동은 단종 때부터 여러 차례 조선을 다녀갔다.
 
정동은 1483년(성종 14) 10월에 사행(使行)을 왔다가 병이 나서 조선에서 명의를 다 동원했지만, 나이가 70세가 넘어 소생이 어려웠다. 그래서 조정은 요동 의관 왕근(王謹)을 초빙했지만, 정동은 황주(黃州) 생양관(生陽館)에서 병으로 죽었다.
 
중국 사신 정동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통(鄭通)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정동은 비록 환관이었지만 명나라 헌종(憲宗)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리며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현안을 잘 조율하고 해결했다. 정동이 죽은 후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 어렸을 일이 발생할 때마다 환관 정동을 그리워했다.
 
 
▲ 금강산 진주담(사진:현대아산)
 
 
보덕암은 표훈사에서 남쪽 1km 지점의 두물머리인 금강대를 지나서 만폭동 팔담(八潭)의 하나인 분설담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법기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금강산 내담(內潭) 팔담은 검은 용같이 생긴 흑룡담, 비파 선율을 타는 듯한 비파담, 물안개가 푸른 파도 같은 벽파담, 하얀 눈을 뿜어내는 분설담, 보석같이 아름다운 진주담, 거북바위가 머리를 들고 있는 구담(龜潭), 구담에서 위로 50m 위에 못의 모양이 배와 같이 생긴 선담(船潭, 배담), 뿜어내는 물줄기가 용의 입에서 불을 토하는 모습과 비슷해 화룡담(火龍潭)이 되었다.
 
 
▲ 금강산 상팔담 빙하 마찰 흔적(사진:전원석 외 2020《지질유산》)
 
 
북한 지질학자들은 금강산을 유네스코에 올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북한 지질학자들은 1990년대에 금강산 빙하를 처음 발견했다. 금강산의 화강암은 중생대 백악기 때 당 속의 마그마가 관입해 형성되었고, 식는 과정에서 수직과 수평으로 쪼개지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신생대 들어 동쪽에 동해가 형성되고, 태백산맥이 치솟는 지각 변동 과정에서 화강암에 균열이 생겨났다. 2만 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금강산 암반은 빙하에 쉽게 침식되어 상팔담은 암석이 섞인 빙하가 암반을 깎아내 줄무늬가 생겨나고, 100m 암반 구간에 8개의 호수가 줄지어 형성되었다.
 
 
▲ 몽골 에즈 하이르항 산(2,275m) 구담(九潭)(사진:신익재)
 
 
필자는 2022년 6월 몽골 고비사막을 10여 일간 탐방하고 알타이산맥에 속해 있는 만년설이 있는 몽골 최고봉인 수타이산(4,090m)과 에즈 하이르항(Eej khairhan mountain, 2275m) 어머니 산에서 금강산 화강암 팔담(八潭)의 모습과 똑같은 지형을 보았다.
 
몽골 어머니 산의 아홉 개의 담을 찾아서 올라가는 길은 정말 곡예를 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아찔했다. 에즈 하이르항 산(2,275m) 구담(九潭) 산길은 너무 험해 일행 중 7명만 구담을 보았고, 필자를 포함하여 10명은 길을 잘못 들어 구담 보는 것을 중간에 포기했다.
 
 
▲ 몽골 에즈 하이르항 산(2,275m)
 
 
몽골어로 ‘에즈’는 어머니이고 ‘하이르 항’은 위대한 산, 성산(聖山)을 뜻한다. 어머니 산 사방에는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화강암 산이 우뚝 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이 산은 멀리서 사진을 찍으면 어머니가 누워서 쉬는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 몽골 에즈 하이르항 산(2,275m)(사진:Gamgorig Khuyag)
 
 
춘원 이광수는 1921년 4월에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해 5월에 결혼하고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다음 해 1922년 여름에 문인들과 금강산을 방문하고 돌아와 잡지 신생활(新生活)에 발표하고 1923년 시문사(時文社)에서 단행본 여행기 《금강산유기》를 간행하였다.
 
당시 춘원은 지식인의 고뇌를 안고 살았는데, 금강산을 바라보고 영혼을 정화했다. 춘원은 남대문 역에서 원산행 열차를 타고 가면서 아주 유려한 문체로 금강산 가는 길을 그려냈다.
 
금강산을 돌아보다 마침내 보덕암에 이르러 춘원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저런 곳에 암자를 짓고 수도를 했는가 싶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을 쉬는데 입 밖에 시가 벌써 나와버렸다. 춘원은 자연의 숭고함과 경이로움에 그만 몸 둘 바를 몰랐다. 춘원은 이내 혼란한 마음을 수습하고 금강산의 절경과 신비를 고유의 섬세한 필치로 적어나갔다.
 
 
춘원 이광수(李光秀, 1892~1950)(사진:태학사)
 
어떤 일 좋아하는 이가
이런 데다 집을 지었나!
백운은 마당에 뜨고
산풍은 방고래로 드네
조그만 관음보살도 벽에 붙어 떨더라
서천(西天) 서역국 설산 밑 항하(恒河)가에
관음보살이 암자를 지었더니
보살이 잠든 틈에 광풍으로 날리어
동으로 동으로 오다가 법기봉에 걸리니라.
 
 
춘원 이광수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우리 중에는 우리의 천부(天賦)의 보물이 소개되지 못하였나이다. 4~50년을 두고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나로서는 이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금강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었을진대 우리의 제매(弟妹)와 자녀들이 보통학교를 마치기 전에 벌써 금강산의 위치, 명소의 배치와 명칭, 사진과 화첩, 그 시와 노래를 보고 외웠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이에 나는 이 부족하나마 내 손으로 우리 금강산을 우리 조선 사람 중에 소개해 보자는 야심을 발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매들에게 금강산이 어떻게 아름다운 맛을 알리고 아울러 금강산 구경 노차(路次)나 알려주어 나와 같은 설움을 당하지 말자 하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이 말한 것보다는 더욱 중요한 동기라 할 만한 것은 위대 장엄한 자연 속에서 내 영혼의 세례를 받자, 지리멸렬한 내 인격의 통일을 얻어 보자, 직접으로 천공(天公, 하늘)의 계시를 들어 나의 일생의 진로를 정하자 함이외다.”라고 고백했다.
 
 
▲ 《사찰문화해설가이드》 이지범 著(사진:도서출판 中道)
 
 
금강산을 자주 방문했던 강계(江界) 이지범 선생이 새롭게 《사찰문화해설가이드》 책을 2024년 6월에 발간했는데, 책 표지를 보니 금강산 보덕암 사진이 있어 더 반가웠다. 이지범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15대손으로 2011년 고려 초조대장경 천년의 해 기념행사를 총괄하고, 고려대장경 연구에 매진했다. 현재 수원의 경기문화유산교실 교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 금강산 비로봉(사진:일본 JS투어)
 
 
필자는 만덕 할머니가 제주도에서 올라와 금강산 보덕암에서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위해 기도(祈禱)한 것같이 우리도 금강산 보덕암에 올라 염불 기도하고 향로봉(1,293m)과 비로봉(1,638m)을 바라볼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소원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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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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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