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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5세 세종 앞에서 시 지어 신동, 세조 왕위찬탈하자 생육신으로 은둔..영롱한 사리 출현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상)
만덕은 보덕암을 다녀와 표훈사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 예불을 마친 후 만덕은 주지 방에서 큰 스님이 들려주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강산 여행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상)
 
 
만덕은 보덕암을 다녀와 표훈사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 예불을 마친 후 만덕은 주지 방에서 큰 스님이 들려주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강산 여행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만덕은 산봉우리 위에 나타난 둥근달을 보며 숙소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졌다. 금강산의 유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오고, 세조 6년(1460) 매월당 김시습이 금강산을 직접 순례하고 쓴 《탕유동관록후지(宕遊東關綠後志)》에도 자세히 나온다. 김시습은 여덟 번이나 금강산을 방문하여 금강산에는 김시습의 이야기가 아주 풍부하다.
 
 
▲ 청간 김시습(장소: 기림사)
 
 
김시습 가문은 강릉의 명문 집안으로 7대조 김칠초(金七貂)부터는 무반직을 주로 맡아왔다. 할아버지 김원간(金元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냈고,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사(蔭仕)로 관리가 되어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은 선사장씨(仙槎張氏)에게 장가들어 1435년 한양 성균관 북쪽 번궁리 외가에서 시습을 낳았다. 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에 글 뜻을 알았고, 3세에 외조부에게 정식으로 글을 배웠다.
 
하루는 유모가 맷돌을 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한시를 지어 동네에 소문이 크게 났다. 5세 때 《중용》, 《대학》에 통달하여 신동(神童)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 1390~1440)이 하루는 어린아이의 놀라운 글솜씨를 보고 감탄하여 이름을 《논어》 〈학이편〉 제1장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더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는 구절에서 두 자를 따와 시습(時習)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최치운은 강릉 오죽헌을 건축한 사람으로 사위가 신명화(申命和, 1476~1522)이다. 신명화는 딸만 다섯을 낳았는데 둘째 딸이 여류화가로 유명한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자식을 7명이나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성리학자 율곡으로, 신명화는 율곡에게는 외조부가 되는 분이다.
 
신동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은 어린아이 시습(時習)의 재능을 직접 보고 싶어 승정원에 불러 승지 박이창(朴以昌, ?~1451)을 시켜 한시를 짓게 하였다. 그런데 시습은 천진난만하게 떨지 않고 박이창이 병풍에 그려진 강변에 접한 정자와 배를 가리키며 한시를 지어보라 하였다.
 
시습은 〈小亭舟宅何人在〉라고 한시를 지었다. 작은 정자, 배가 매인 집에는 누가 사는가? 호가 小亭舟인 박이창은 이에 놀라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동자의 학문이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다)라고 시를 지어 어린 시습에게 대구를 지어보라 하였다. 시습은 망설임이 하나도 없이 成王之德 黃龍飜碧海之中(어진 임금님의 덕이 황룡이 푸른 바다를 뒤엎는 듯하다)라고 시를 지었다.
 
5세 아이가 신통하게도 시를 척척 짓는 모습을 바라보던 세종은 너무나 기특하여 아이에게 비단 50필을 상으로 선물하며 혼자 가져가 보라고 하였다. 비단 50필은 500가 되는 긴 천으로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일상 표현이다.
 
어린아이는 비단 선물을 받고는 한참 생각하다가 비단 천을 풀어 이어서 비단을 작은 어깨에 걸치고 허리에 묶어 궁궐을 천천히 나섰다. 이에 감탄한 사람들은 시습을 더 귀하고 여겼다. 세종은 어린 시습에게 훗날 잘 성장하여 학문을 이루라고 격려했다. 이때 생긴 별명이 바로 유명한 오세(五歲)이다.
 
조선왕조 최초의 5세 신동 김시습은 이웃에 사는 이계전(李季甸, 1404~1459)에게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 13세에 대사성 김반(金泮)에게 《論語》, 《孟子》, 《詩經》, 《書經》, 《春秋》을 배웠다.
 
당시 명나라에 서장관을 다녀오고 성균관에서 세손(端宗)에게 강의한 윤상(尹祥, 1373~1455)에게 《禮書》, 《周易》, 《史記》를 배웠다. 시습은 집에 돌아와 혼자서 많은 역사책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학습했다.
 
김시습은 사춘기가 시작될 15살에 어머니가 돌아가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재혼하여 시습은 외가로 들어갔고 시습을 잘 돌봐주던 외숙모도 죽고, 아버지도 중병이 걸리는 등 고난이 이어졌다.
 
이때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17살에 결혼했으나 가난으로 혼인은 얼마 안 가 파탄이 나버렸다. 김시습은 19살에 과거에 응했으나 낙방해 산으로 들어갔다.
 
김시습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책을 읽다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讓位)한 소식을 전해 듣고는 3일간 통곡하고는 보던 책을 모두 모아 불사르고 나이 21세(1455)에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승려가 되었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 법호(法號)는 설잠(雪岑),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 동봉(東峰), 췌세옹(贅世翁)으로 전국을 유랑하고 많은 시를 지었다. 청한자(淸寒子)는 도교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는 서슬이 퍼런 세조가 두려워 사람들이 겁을 먹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였다. 설잠은 밤에 몰래 찢어진 성삼문의 시신을 하나하나 모아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아차고개(노량진)에 몰래 안장하고 작은 돌로 묘표로 대신했다.
 
숙종 때에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이곳에 묘가 조성되었다.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가다 보면 왼쪽 언덕에 사육신 묘가 있다. 성상문은 사형터 새남터로 가기 전에 수형시(受刑詩)를 읊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 (회두일욕사)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북소리가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 들어 뒤돌아보니 해가 서산을 넘네.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터인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쉬어 갈거나!
 
 
▲ 세종시 금남(錦南) 문절사(文節祠: 성상문 사당)(글씨: 박정희 대통령)
 
 
불사이군(不事二君) 원칙을 굳게 지킨 생육신은 김시습과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1392~1480), 조려(趙旅, 1420~1489),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여섯 사람이다.
 
사육신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이들 생육신은 살아 있으면서 마치 귀가 먼 것같이 보이고, 눈이 먼 소경으로 행세하며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김시습은 승려가 된 후 9년간 금강산, 오대산, 남해, 경주, 설악산 오세암 등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였다. 1458년에 《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綠後志)》, 1460년에 《탕유동관록후지(宕遊東關綠後志)》, 1463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綠後志)》를 저술했다.
 
설잠은 1463년에 한양에 왔다가 세조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을 만나 권유를 받아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하는 내불당(內佛堂)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했다.
 
 
▲ 효령대군 영정(사진:경기문화재단)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동생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이 되자 더욱 불교에 심취하여 《법화경》 《금강경》을 언해하고, 왕실 족보 관리, 종묘 제향을 주관하는 종헌관(終獻官)을 지냈다.
 
그는 관악사,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고 원각사 조성도감 도제조로 불사를 주관했다. 1458년 회암사 동서불전(東西佛殿) 56칸을 보수하여 효령대군의 원당으로 삼았다.
 
효령대군은 세종 때부터 성종 때에 이르기까지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91세로 세상을 등졌다. 양주 회암사지 발굴조사는 1997년에 시작되어 10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중에 효령대군을 보여주는 특별한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 회암사 수막새-효령대군(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설잠은 민중과 어울리고 불교를 널리 포교한 원효(元曉)를 사모해 세조 10년(1465, 31살)에 경주 금오산(南山) 용장사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여 소설집 《금오신화》 5편을 짓고 많은 저작물을 후세에 남겼다.
 
현재 유금오록(遊金鰲錄)에는 시 155수가 남아 있다. 설잠은 1468년에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지었다. 현재 용장사지 절터에는 높이 4.42m의 석탑(보물 제186호)과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 경주시 용장사곡 삼층석탑(사진:경주시청)
 
 
학자들은 김시습의 소설은 명나라 구우(瞿佑, 1347~1433)가 홍무연간(洪武年間) 1378년경에 쓴 소설집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전등신화는 “등불의 심지를 잘라서 불을 밝혀가며 읽는 재미나고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명나라 소설이 조선에 전래가 된 시기는 1421년에서 1443년 사이로 보이며 특히 연산군이 전등신화를 즐겨서 보았다.
 
김시습은 《금오신화》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인간을 압박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대항하였다. 구우는 자서에서 《전등신화(剪燈新話)》 창작의 목적은 “권선징악을 교훈으로 삼고, 원통하고 곤궁한 사람을 연민하고 동정함을 들어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등신화》는 본래 40권이 있었으나, 현재 4권 21편만 남아 있다.
 
《금오신화》 원본은 현재 전해오지 않지만, 일본에서 1884년에 제작된 ‘금오신화’ 목판본이 발견되어 최남선은 1927년 잡지 〈개명〉 19호에 5편을 소개했다.
 
서울대 국문과 정병욱 교수는 1952년에 필사본을 발견했다. 1999년 9월 21일 고려대 최용철 교수는 중국도서관에서 ‘금오신화’ 목판본을 발견했는데 “이 목판본의 활자는 세종 때의 갑인자와 똑같고 16세기 문신인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이 편찬한 것으로 미루어 16세기 조선에서 간행한 판본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김시습은 속세(俗世)를 벗어나 정말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그는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미련 없이 덧없는 세상을 벗어나 경치 좋은 명산대천을 유람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설잠은 자연의 법문을 듣기 위해 오랜 세월 전국을 돌아다녔다. 조선 9대 왕인 성종이 1469년 즉위하고 나서 잠시 속세로 돌아왔다. 아는 이가 벼슬을 권유하였지만,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다시 세상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였다.
 
그때의 자화상이 남아 있는데, 기록된 인물평 찬(讚)을 보면, “네 모습 볼품이 없고, 네 마음도 너무 미련하다. 마땅히 너를 구렁텅이 안에 가두련다”라고 하였다.
 
설잠은 《금오신화》 집필을 끝낸 후 성종 2년(1471)에 경주를 떠나 10년간 수락산(638m)에서 살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는 1476년에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지었고, 47세 되던 해 1481년에 환속하여 안 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에 살면서 1485년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그러다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이 술렁거리자 다시 방랑길을 떠나 강원도로 향했다. 그는 젊은 선비를 모아 가르치고, 시를 많이 남겼다. 김시습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모셨다.
 
김시습은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방을 얻어 독서에 전념했다. 성종 24년(1493)에 그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발문을 쓰고 향년 5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에 옆에 사람들에게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은 고인의 유언대로 임시로 가매장했다.
 
3년 후 장사를 지내려고 유해를 꺼냈는데 놀랍게도 얼굴이 마치 생전처럼 살아 있는 것같이 온화하고 시신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다. 만수산 무량사 승려들은 3년 전에 죽은 김시습을 부처님처럼 여겨 화장하기로 하였다. 화장을 마친 후에 사리를 수습하니 영롱한 사리가 출현해 무량사에 부도를 세웠다.
 
 
▲ 만수산 무량사 부도군
 
 
김시습은 죽은 뒤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문집을 만들었다. 김시습은 유학자와 승려, 도교의 도인의 삶을 넘나든 것처럼 폭넓고 자유분방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후세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선조는 이율곡에게 김시습전(金時習傳)을 만들라고 하여 율곡 선생은 1582년에 책을 만들었다. 이 책에 오세(五歲) 신동 이야기가 나온다. 정조 6년에 조정에서는 절개를 지키면서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김시습을 1782년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사육신과 절개를 지킨 충신들을 사액한 창절서원(彰節書院) 육신사(六臣祠)에 제향(祭享)했다. 시호가 청간(淸簡)이다.
 
【출전】 정조실록 13권, 정조6년(1782) 4월 19일 을유 3번 재 기사
 
김시습·남효온 등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다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에게 이조 판서를 특별히 추증(追贈)하였다.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김시습, 남효온, 성담수 이 세 사람은 이미 자손이 없으니 그들의 문집(文集)에 기재된 내용에 의거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나누어 찬술하게 함으로써 풍성을 세우고 습속을 면려하게 하라.”하였다.
 
 
▲ 경주 기림사 원경
 
 
필자는 금강산을 8번이나 방문했던 김시습의 자취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가보고 싶어 경주 남산도 여러 번 다녀왔다. 경주 지역에서는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현종 11년(1670) 경주 부사 민주면이 용장경내에 오산사(鰲山祠)를 지어 추모했으나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경주 유림이 경주 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고종 15년(1878)에 경주 함월산 기림사에 사당을 지었으나 퇴락하였다. 1998년 경주시에서 기림사에 부탁하여 김시습 영당을 짓고 매년 음력 2월 제사를 모시고 있어 가보고 싶었다.
 
김시습 영당은 강릉 청간사, 부여 무량사, 수락산, 영월 등 여러 곳에 있다. 기림사의 제사는 불교와 유교식 제사를 함께 지낸다. 기림사 종무소에 전화를 걸어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게속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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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8. 12:16)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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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