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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2】권율, 노비 출신 병사에게 무술 가르치고 정찰 및 서신 전달 임무 맡겨...이항복, 면천해줘 이괄의 난 진압 공로 청나라 팔기제를 조선 국왕에게 알린 정충신
《열하일기》 답사 대원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관광버스에 오르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중국 자료집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정 문명의 보고서〉를 꺼내 일정과 방문지를 확인하고 자료집의 글을 한 사람씩 읽는다. 버스 중간 줄에 앉은 김완숙 대원 차례가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여름 철새 꾀꼬리처럼 너무나 아름다워 달리는 차에서 듣기에 좋았다. 낭랑한 목소리에 반응이 좋아 매일 여정 문명의 보고서를 혼자 낭독했다.
▲ 김완숙 대원(사진:궁인창)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해 임진왜란(壬辰倭亂, 朝日戰爭)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은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자 이항복의 장인인 권율을 광주 목사로 발령 냈다. 이름도 없는 17세의 노비가 징병 모집을 보고 응모하였다. 권율은 징병에 참여한 병사들을 검열하다 예의가 바르고 판단이 빠른 소년병을 찾아내 개인 노복(奴僕)으로 삼아 허드렛일을 시켰다. 맡은 일을 척척 해내는 것을 본 목사는 소년에게 무술을 하나씩 가르쳤다. 그리고 민첩하게 적지 정찰을 하고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소년 병사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권율 장군은 소년병을 멀리 평안도 의주에 있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에게 장계를 전하는 임무를 주었다. 소년병은 성실하게 이동하여 이항복을 찾아 장군의 서신을 전달했다. 소년의 영리함을 본 이항복은 소년을 데리고 있으며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해 전쟁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음력 4월 28일에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일본군을 맞이했다. 이 전투에서 신립 장군과 부원수 김여물이 이끄는 조선군 토벌대는 왜군의 조총으로 인해 16,000명이 몰살당했다. 왜군은 신속하게 경기도까지 침공했다. 조정에서는 연일 파천을 의논하다 한양 도성 가까이 적군이 다가오자, 선조는 파천을 결정하고 4월 30일 궁궐을 떠났다. 개성에 도착한 선조는 5월 1일에 둘째 아들인 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6월 1일에는 왕세자에게 분조를 이끌라고 명령을 내렸다. 18세의 왕세자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였다.
정충신은 고려의 명장이며 우리나라 최초 수군 제독인 정지 장군의 8대손으로 1576년 아전 정윤(鄭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나주 출신 영천 이씨로 노비 신분 천출(賤出)이라 소년은 어릴 때 글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조선왕조는 부모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는 무조건 노비로 일천즉천(一賤則賤)은 신분 상승이 절대 어려웠다. 이항복은 어린 소년병에게 이름을 충신(忠信)으로 지어주고, 선조에게 건의하여 신분을 면천(免賤) 해 주었다. 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가다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 정충신(鄭忠信)(사진;서산시)
임진왜란은 1599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어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났다. 조선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몰두했다. 조선은 1608년 선조가 붕어하여 왕세자 이혼(李琿)이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 제15대 국왕(李琿, 광해군, 1575~1641)이 되었다. 국왕은 민심 수습과 전쟁의 뒷정리를 하면서 대동법을 경기도 일원에서 시행하였다, 선왕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유배를 떠났던 허준(1539~1615)을 방면하고 동의보감을 짓도록 하였다. 국왕은 분조를 이끈 경험이 있어 주변 국가의 정세를 잘 살피며 중립외교를 펼쳤다. 특히 무신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시켜 청나라 팔기군의 동태와 인원 구성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받았다.
정충신은 1602년 명나라를 다녀오며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했다. 1618년에는 조산보 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이대장군에 오른 후 조선에 강화 교섭 요청을 했다. 조선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보냈는데, 정사 오윤겸(吳允謙)이 428명의 사절단을 이끌었고 정충신은 부사의 수행 무관을 하였다.
▲ 백사 이항복 초상화(사진:국립중앙박물관)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던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중풍에 걸린 스승을 동행해 간병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1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 1621년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를 정비하였고,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다.
정충신이 안주 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을 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때 정충신은 멀리 국경에 있어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고 도성을 점령해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신하고 정충신은 전부대장으로 나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공로를 인정받아 금남군에 봉해지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 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 갔지만, 이괄의 난으로, 태안으로 옮겨지고 난이 수습된 후 강화도로 돌아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후금에 밝은 정충신을 다시 부원수로 임명해 수습에 나섰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는 정책에 논의가 있었다. 정충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과 화의를 주장했으나 주전파에 밀려 당진에 유배 갔다 장연에 옮겨지고 풀려났다가 이듬해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3월 조선 정부는 국제 정세 판단 잘못으로 대청(大淸)과 단교를 선언한다. 대청국(大淸國)은 ‘용감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의 만주어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을 한자를 빌려와 표기한 것으로 만주어와 한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실수를 하게 된다. 1636년 5월 정충신의 병세가 깊어져 국왕이 약을 보냈으나 세상을 등졌다. 훗날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진충사(振忠祠)에 모셔졌다. 시호는 충무(忠武), 봉호는 금남(錦南)이다.
광주의 ‘유네스코 민주 인권로’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를 따서 지은 도로명이다.
▲ 민주 인권로 금남로(사진:정태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636년 12월 8일 청나라 마부대가 기마병 3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쳐들어와 병자호란이 벌어졌다. 인조는 13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근왕병을 부르며 장기간 항전을 준비하였으나 물과 식량부족으로 인하여 두 달 만에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혀 절했다.
당시 삼전도는 잠실도 인근에 있었는데. 커다란 섬은 홍수가 나면 잠실도, 부리도, 무동도 3개의 섬으로 변했다. 오늘날의 송파구 지형은 1968년 2월에 한강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2개의 물줄기 중 아래쪽 송파강이 사라지고 한강이 일직선으로 변했다. 모래사장은 모두 사라지고 그 땅에 대단위 아파트가 건축되었다.
▲ 삼전도 위치(사진:궁인창)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는 조선 백성 60만 명을 만주 지역으로 끌고 가 농사에 투입했다. 청과 화친 중립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636년 강화 교동도에 안치하였다가 이듬해인 1637년 6월 6일 강화를 떠나 제주도로 보내졌다.
광해군은 강화를 떠나 제주로 가면서 시를 읊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9년 7월 10일 자에 기록이 남아 있다.
風吹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 (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暮 (창해노도래박모) 碧山愁色帶淸秋 (벽동수색대청추)
바람이 불고 비 날리는 데 성문 옆을 지나네 후덕지근한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푸른 바다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 (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 (인파강상와고주)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지만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상제의 아들)주에 깨이누나 고국의 존망 소식은 끊아지고 안개 끼고 물결치는 강가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 제주 연북정(사진:궁인창)
연북정(戀北亭)은 1590년대에 어촌 평지에 현무암 돌로 쌓은 성 위에 가만히 얹혀 있었다. 제주에 유배되어 온 많은 사람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북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냈다고 해서 탄생한 이름이다.
▲ 1930년대 제주농업학교 조회 오현단(五賢檀)(사진;제주의 소리)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제주도에 유배형을 받아 온 사람이 200여 명이 넘어 현재 40여 곳의 유배문화 유적지가 남아 있다.
▲ 오현제(五賢祭) 진설(陳設)과 조두석(俎豆石)(사진:박홍학)
<제주시 지역>
오현단 –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배향, 귤림서원터 제주목 관아 - 유배인들이 입도를 목사에 신고 광해군 적거(謫居)터 - 중앙로 KB국민은행, 이익(李瀷, 1579~1624) 적거터 – 제주목 관아 서쪽벽 최익현 적거터 - 칠성로 횡단보도 인근, 김진구, 김춘택 적거터 - 동문시장 김정 적거터 – 동문시장, 김윤식 적거터 - KEB하나은행 김정희 <은광연세> - 김만덕 기념관 화북포 - 유배인 입도(김정희, 이건 등) 화북포구(해신사 앞) 조천포 - 유배인 입도(최익현, 김춘택 등) 조천포구(연북정 앞) 어등포(행원포) - 광해군 입도, 행원포구, 산지포 - 유배인 입도(김윤식) 산지포구 해신사 - 김정희 제문 올림, 향사당 - 신성여학교 개교, 방선문 – 마애명(최익현). 백록담 - 마애명(이익, 조관빈, 조정철, 최익현 등) 홍윤애묘 - 조정철의 연인, 김진용 유허비 - 이익 문하에서 수학 이승훈 적거지 - 조천마을 내, 보우선사 순교비 - 평화통일 불사리탑 송당리 대비공원 - 노씨부인 일가를 기리는 공원, 문연사터 - 최익현 추모, 김만희 신도비 - 과오름 인근, 이세번 묘 - 고산리 신물 인근
▲ 1709년 탐라지도병서(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서귀포 지역>
임관주 시비 – 천제연폭포, 임관주 마애시 – 창고천, 권진응 창주정사 - 안덕계곡 동계 정온 유허비 – 보성초등학교, 삼의사비 – 대정현성, 제주추사관 - 대정현성 정난주 마리아묘 – 대정성지, 김정희 의문당 현판 – 대정향교, 임징하 유허비 - 감산리 복지회관, 한천 유허비 - 가시리 충의사, 안조환 유배지 – 추자도
안조환(安肇煥)은 조선왕조 정조 때 34세 나이에 궁궐 대전별감으로 있으면서 주색잡기로 국고를 탕진하여 추자도(楸子島)로 종신 유배되었다. 대전별감은 액정서(掖庭署)에 소속되어 왕의 처소인 대전(大殿)을 담당하며 왕의 시중과 호위를 맡았다. 그는 먼 섬에 유배 가면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을 하며 자신이 지은 죄를 뼈저리게 뉘우쳤다. 추자도 사람들이 박대하여 거처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고, 매일 동냥을 해 얻은 거친 음식으로 겨우 연명했다. 말 그대로 비참한 삶을 이어 나갔다. 일하고 싶어도 바다 일을 배운 것이 없어 구걸하며 추위 속에 지냈다. 한 벌의 옷으로 사계절을 지내며 굶어가며 유배가 빨리 풀리기를 기원했다. 그는 중인 계급이라 양반인척하는 허식과 과장이 없이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한 일들을 그대로 고백했다, 위선이 없이 본인의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며 탐화봉접(探花蜂蝶) 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했다. 요새 말로 말하면 정치범이 아니라 경제사범이다. 가사 중에 나오는 ‘한단’ 고사를 어떻게 알고 썼는지 조금은 신기했다. 그는 눈물로 용서를 비는 3,500여 구에 달하는 유배 장편 가사 《萬言詞》 사고향(思故鄕)을 남겼다. 《萬言詞》는 〈만언답사(萬言答詞)〉, 〈사부모(思父母)〉, 〈사처(思妻)〉, 〈사자(思子)〉, 〈사백부(思伯父)〉 등으로 구성되어 안조환의 애절한 가사는 한양 땅 궁중에 있는 궁녀들에게 전해져 이를 읽은 궁녀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글이 임금에게 바쳐져서 해배(解配)의 기회를 맞아 겨우 풀려났다.
【번역문】 인용
“조그만 실개천에 발이 빠진 소경도 눈먼 것을 한탄하고 개천 원망하지 않으니 주인이 아니어서 짖는 개를 꾸짖어서 무엇하리.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생계를 생각하고 물고기 낚기를 하자 하니 물머리(배 멀미)를 어찌하고, 나무를 베자 하니 힘이 모자라 어찌하며, 돗자리 치기와 신을 삼는 일은 할 줄 모르니 어찌하리. 아아! 할 일 없다. 동냥이나 하여보자. 탈망건 갓 숙이고 홑 중치막의 띠를 끄르고 총만 남은 헌 짚신에 가는 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담뱃잎도 없는 빈 담뱃대를 심심풀이로 조로 가지고서 비슥 비슥 걷는 걸음걸음마다 눈물이 난다. 세상에 인간사 모두 꿈이로다. 내 일 더욱 꿈이로다. 엊그제는 부귀자(富貴者)요 오늘 아침 빈천자라. 부귀자 꿈이런가 빈천자 장주호접(큰 낮의 호랑나비 되는 꿈) 황홀하니 어느 것이 정 꿈인고. 한단치보(邯鄲稚步) 꿈인가 남양초려 큰 꿈인가. 화서몽 칠원몽에 남가일몽 깨고서 몽중흉사 이러하니 새벽 대길 하오리다. 가난한 집 지내치고 넉넉한 집 몇 집인고 사립문을 드자할가 마당에 섰자하랴.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