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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 만안교
무신 이방익 일행은 흥화부 북성현으로 가다가 푸젠성 취안저우시 인근에 있는 돌다리 만안교(萬安橋)를 보고 감탄했다. 면천군수(沔川郡守) 박지원이 정조에게 올린 〈書李邦翼事〉에 의하면 【원문】 〈書李邦翼事〉 「沔川郡守臣朴趾源奉敎撰進」
“대홍교는 낙양교(洛陽橋)로서, 당나라 선종(宣宗)이 미행(微行)을 나와 산천의 승경(勝景)을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경탄하며 하는 말이, “우리 낙양과 너무나 닮았구나!” 했기 때문에 낙양교라 이름한 것이고, 一名 만안교(萬安橋)라고도 합니다. 또 강어귀에 낭자교(娘仔橋)가 있는데 그 길이가 매우 깁니다. 예전에 바닷나루〔海渡〕에서 해마다 빠져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군수 채양(蔡襄)이 돌을 포개어서 교량을 만들고자 했는데, 조수가 밀려들어 인력으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해신(海神)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어 한 아전에게 주어 보냈는데 그 아전이 술을 실컷 마시고는 해안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다가 조수(潮水)가 빠질 때 깨어나 보니 문서는 이미 봉투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바치므로 채양이 열어 보았더니 다만 작(醋) 한 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채양이 그 뜻을 깨닫고서 “신(神)이 나에게 스무하룻날 유시(酉時)에 공사를 시작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그날에 이르자 조수가 과연 물러갔다. 그리하여 8일 저녁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소비된 금전이 1400만이요, 길이가 360장(丈)이요, 너비는 1장 5척(尺)이다. 예전에도 표류하다 돌아온 제주 사람 가운데 이 다리를 지나온 자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다리의 길이가 10리라 하고 어떤 이는 50리라 하는 등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길이가 360장이고 홍공(虹空)이 47개라고도 합니다.”라고 기록했다.
다리 위에 무지개 세문(細紋)이 몇 개나 되는 줄 모를 정도였고, 다리 가운데는 무쇠로 은장(銀裝)을 박았으며, 난간을 만들어두어 천하의 넓은 석교라 할만했다. 만안교는 진강현과 혜안현의 경계에 있는 낙양강(洛陽江)을 넘을 때 지나는 석교로, 일명 낙양교(洛陽橋)라고도 한다. 만안교는 북송 황우(皇祐) 5년인 1053년 군수 채양(蔡襄, 1012~1067)이 건설했다. 다리 길이가 약 1km, 너비 5m, 기둥 40여 개, 난간 50여 개로 구성되었다.
명나라 시인 릉등명(凌登名)이 이 다리를 보고 “낙양의 다리는 천하에 기이하고, 무지개가 천 길이나 강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다리의 웅장함을 극찬했다.
【원문】 「洛陽之橋天下奇 飛虹千丈橫江垂。」
채양(蔡襄, Cai Xiang) 동상(사진:福建省泉州觀光協會)
채양은 흥화군(興化郡) 선유현(仙遊縣, 현재의 푸젠성 푸톈 시 셴유현) 출신으로 북송의 문인이며 서예가이다. 자는 군모(君謨),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채경과는 동족에 해당한다. 그는 苏轼(蘇軾, 東坡居士, 1037~1101), 黃庭堅(1045~1105), 미푸(米芾, 미불 1051~1107)와 함께 송나라 사대가(宋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차를 만들고 마시는 것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다록(茶錄)》을 저술하며 육우와 함께 중국의 차 문화 정립에 기여하였다.
武夷山 茶公園 채양 조각상(사진:위키백과)
낙양교(洛阳桥)의 특이한 점은 시공 기술에 있다. 첫 번째는 굴을 심고 기초를 다지는 방법(种蛎固基法)으로, 옛날 사람들이 배에 돌을 실어 다리 중간선을 따라 많은 돌을 던져 강바닥에 낮은 돌 제방을 형성한 후, 제방 위에 교각을 세웠다. 교각의 양쪽 끝이 뾰족하여 강물과 바닷물이 교각에 미치는 충격을 줄였다. 굴은 수중 주춧돌 위에서 양식되며 굴에서 분비되는 콜로이드 액체로 돌을 결합하여 다리 기초의 견고함을 유지한다. 또한, 다리 표면에 사용되는 거대한 화강암 돌은 적어도 10톤의 무게가 나간다.
萬安橋(사진:福建省泉州觀光協會)
기술자들은 조수의 간만 밀물과 썰물을 충분히 활용했다. 먼저 그 무게를 견딜 만큼 튼튼한 배에 무거운 돌들을 실었다. 만조가 되면 배를 부두 사이로 몰고 가서 돌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배를 정박시킨 후 조수가 빠지기를 기다렸다. 수위가 낮아지면 돌들은 부두에 놓이고 빈 배는 돌을 가지러 떠나는 반복 작업이 계속되었고, 거대한 돌들이 하나씩 놓였다.
北宋蔡襄楷书万安桥记(사진;바이두백과)
북송 채양이 쓴 해서체 비문 萬安橋錄은 153자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비에는 다리 건설 시기와 연대, 길이와 너비, 소요 금액, 관련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높이 2.89m, 너비 1.46m, 두께 0.3m의 두 개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각 비석의 글자는 6줄로 배열되어 있고, 각 글자의 길이는 18cm, 너비는 15cm이다. 현재 두 개의 비석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훼손된 후 1963년에 원본을 본떠 다시 조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강 왼쪽 기슭에 새겨진 북송 시대의 원본 비문이다. 현화 연간(1119-1125)에 채양의 증손자이자 해관(海官)을 역임하고 후에 취안저우 태수가 된 채환(蔡煙)이 원본을 복사하여 사당에 다시 새겼다.
《万安桥记》 全文:「泉州万安渡石桥,始造于皇祐五年庚寅,以嘉祐四年十二月辛未迄功。址于渊,酾水为四十七道,梁空以行。其长三千六百尺,广丈有五尺,翼以扶栏,为其长而两之。糜金钱一千四百万,求诸施者。渡实支海,去舟而徒,易危而安,民莫不利。职其事者:庐锡、王实、许忠、浮图义波、宗善等十有五人。既成,太守莆阳祭襄为之合乐宴饮而落之。明年秋,蒙召返京,道由出是,因纪所作,勒于岸左。」
【번역】 “취안저우의 萬安橋 돌다리는 皇祐 5년 경인(庚寅)년에 착공하여 嘉祐 4년(1059) 12월 辛未에 완공되었다. 깊은 심연 위에 47개의 다리를 놓았고, 통행을 위해 들보를 파서 만들었다. 길이는 1,000m, 너비는 4.5m였으며, 난간은 양쪽으로 뻗어 있다. 금은화 1,400만 냥을 여러 사람에게 시주를 받았다. 바다를 건너갈 때 배를 묶어두고 걸어간다. 위험하지 않게 안전을 택한 것은 모두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이 일을 맡은 자는 루시(庐锡), 왕시(王实), 쉬종(许忠), 푸투이보(浮图义波), 종샨(宗善) 등 15명이다. 다리가 완공되고 나서 푸양(莆阳) 태수 祭襄은 연회를 열어 이를 축하했다. 이듬해 가을, 채양은 황제가 불러 수도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왼쪽 강둑에 비문을 새겼다.”
채양은 15세에 鄕試에 응시하고 18세에 국자감에 입학하여 天聖 8년(1030)에 開封鄕試에서 급제했다. 이듬해 進士 및 장주군사판관(漳州軍事判官)이 되었다. 경우(景祐) 3년(1036)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을 제수받았다. 寶元 3년(1039) 저작좌랑(著作佐郎)을 거쳐 관각교감(館閣校勘)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慶曆 3년(1043) 비서성승(秘書省丞) 및 지간원(知諫院)을 역임하고 1044년 직사관(直史館)과 기거주(起居注)로 직을 옮겼다. 이후 우정언(右正言), 지복주사(知福州事), 福建路轉運使, 판삼사염철구원(判三司鹽鐵勾院), 삼사탁지구원판관(三司度支勾院判官)을 맡았으며, 황우(皇祐) 4년(1052)에 지제고(知制誥), 기거사인(起居舍人), 權同判吏部流內銓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權同知貢擧, 權知開封府를 거쳤다. 지화 2년(1055)에 樞密院直學士와 겸직으로 知泉州事로 부임하여 중국 최초의 해상 석교인 萬安橋 건설을 주도하였다. 禮部司郎中을 마치고, 가우(嘉祐) 5년(1060)에 翰林學士, 三司使, 吏部司郎中, 給事中으로 활동하였다. 治平 2년(1065)에 禮部侍郎, 端明殿學士, 知杭州事로 승진했다. 채양은 1067년 세상을 떠났다.
萬安橋와 채양(蔡襄) 동상(사진;바이두백과)
다시금 길을 떠난 이방익 일행은 복청현(福淸縣)과 민현(閩縣)을 지나 2월 2일 푸젠성(福建省) 福州 성내(城內)에 이른다. 민현은 민절총독(閩浙總督)과 福建省 순무(巡撫), 포정사(布政使)가 모두 이곳에 주재하고 있었다. 나산 법해사(法海寺)는 후진(後晉) 개운(開雲) 2년(945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원래 맹사공(孟司空)의 거처였던 이곳은 후진(后晋) 개운(开运) 2년(945년)에 도한선사(道闲禅师)가 開山하여 흥복원(興福院)이라고 하였다. 북송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법해사로 개명되어 줄곧 푸젠의 유명한 선불장(选佛场)이었다. 일행은 중간에 명찰 법해사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
【원문】 연암집/제6권 별집 邦翼奏曰。正月初五日。入福建省。門內有法海寺。大麥已黃。橘柚垂實。衣服飮食。與我國彷彿。來見者兢以蔗糖投之。或留戀不能去。或著我人衣服。而相視流涕。或有抱衣歸。示其家人而還曰。愛玩傳看云。
福州 罗山 法海寺 법당(사진:福建省佛敎協會)
【번역】 이방익이 아뢰기를, 정월 초닷새에 복건성에 들어갔는데, 성문 안에 법해사가 있었습니다. 보리는 하마 누렇게 익었으며, 귤과 유자(柚子) 열매가 드리워 있고 옷과 음식은 우리나라와 흡사했습니다. 우리 일행을 보러 온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사탕수수를 던져 주었으며, 어떤 이는 머뭇거리고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어떤 이는 우리의 의복을 입어 보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옷을 안고 돌아가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돌아와서는 “소중하게 감상하면서 가족들과 돌려 보았다.”라고 말하였다.
福州 罗山 法海寺(사진:福建省佛敎協會)
법해사는 민현(閩縣) 내 좌삼방(左三坊) 지역에 있었다. 《경덕전등록》에 수록된 사오쯔(绍孜), 의인(义因), 의총(义聪) 등 대덕 고승들은 모두 법해사 출신이다. 명나라 가정(家靖) 초기에는 개인 住居地로 사용되었다. 청대에도 법해사 내에 나산당(羅山堂)과 금적원(金積園), 만록당(萬綠堂)과 같은 여러 명승지가 있었다. 이방익은 법해사라고 하는 절의 나산당이라고 제액(題額)되어 있는 법당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고는 “관왕(關王)의 화상(畫像)을 으뜸으로 앉히고 차례로 금불(金佛)을 앉혀두었다.”라고 回想했다.
福建省 순무(巡撫) 야오펀(姚棻)(사진:快懂百科)
청나라 문서를 보면 福建省 독무(督撫) 야오펀(姚棻, 요분 1732~1815)이 이방익 일행의 漂人을 자세히 살핀 뒤 신분을 복건표인(福建漂人)으로 확정하여 관원 오현사(五縣司) 순검(巡檢) 마승길(馬勝吉)을 호송관으로 삼아 燕京으로 호송하였다. 요분은 건륭제 26년(1761)에 進士하고 간쑤성 경현(景縣)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논에 물을 대는 법을 가르쳤다. 이후 승진하여 광둥성(廣東省)의 감찰관과 장시(江西), 貴州, 윈난(雲南), 푸젠(福建)의 순무(巡抚, 1795~1797)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임했다.
“방익이 아뢰기를, 행차가 지체되어 또다시 글을 올려 福州 순무부(巡撫府)에 애걸하던 차에 관인(官人) 한 사람이 쌍가마를 타고 누런 일산(日傘)을 받치고 지나가기에 바로 나아가 길을 가로막고 진정하였더니, 그 관원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며칠 후에 서른다섯 명의 관원이 일제히 모일 터이니 그때 다시 오라.’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가서 호소하였더니 뭇 관원이 돌려 가면서 보고 나서 순무부에 고하여 순검(巡檢) 한 사람을 임명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성(城)의 서문(西門)으로 나와 40리를 가서 황진교(黃津橋)에 당도하였고, 작은 배에 올라 이틀 만에 상륙하여 서양령(西陽嶺), 보화사(寶華寺)를 경유 저장성(浙江省)에 당도하여 선하령(仙霞嶺)을 넘었습니다. 살펴보건대, 선하령은 강산현(江山縣)에 있습니다. 송 나라 사호(史浩)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돌을 쌓아 길을 냈는데 모두 36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민강(閩薑, 생강)(사진;바이두백과)
이방익 일행은 황진교(黃津橋)에서 출발해 민청현(閩淸縣)과 수구진(水口鎭) 등을 지나 연평부(延平府) 황전역(黃田驛)에 이른다. 이방익이 민강(閩薑)이나 수기(水器), 상여(喪輿), 석교(石橋)와 같은 견문을 언급했는데, 민강(閩薑)은 푸젠성에서 재배된 생강이 들어간 음식을 자주 먹은 것으로 보인다. 생강은 위를 따뜻하게 하고 냉기를 없애며, 혈액 순환을 촉진하고 위를 튼튼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효능이 있어 자주 따듯하게 차로 우려내 마셨다. 당시 福建省의 음식은 조선의 음식과 비슷해 국물이 있는 것이 많고 대나무밥(대통밥, 죽통밥)이 유명하다. 이방익이 기술한 福建驛路는 거의 일치하며, 福州에서 선하령(仙霞嶺)으로 가는 중간에 하루 거리마다 역참(驛站)이 있어 바꿔 탈 말도 준비되어 편하게 쉬기도 하였다.
선하관(仙霞關) 풍경구 전경도(사진; 저장성임업국)
이방익 일행은 3월 12일 福州를 출발해 음력 3월 26일 높이 1,150m 선하령(仙霞嶺)을 지났다. 이 길은 너무나 험해 말이 다닐 수 없어 짐꾼이 짐을 어깨에 메고 넘어갔다. 이 길은 875년에 발생한 황소(黃巢)의 난 때 처음 닦아졌다. 선하령은 福建省과 저장성(浙江省) 경계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120km 긴 산맥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육상운반로였다. 군사요충지로 중요시 여겼고, 취저우(衢州, 구주) 江山 경내에 있는 선하고도(仙霞古道) 75km 중 완전하게 보존된 구간은 30km에 이른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