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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이방익이 지나간 선하관(仙霞關)
제주 출신 이방익 일행이 걸었던 아치형 관문 선하관(仙霞關)은 중국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선하관은 처음에 다섯 개의 관문이 있었지만, 네 개의 관문만 보존되어 있다. 선하관은 한국의 문경새재처럼 1관에서 4관까지 가는 길이 1시간 이상 소요되는데, 경관이 뛰어나고 중간에 쉴 곳이 많아 탐방객이 아주 좋아한다.
선하관(仙霞關) 유적지(사진:仙霞關)
선하관을 통과하면 비석이 진열된 비랑(碑廊)과 황차오(黄巢, 황소, 835~884) 석상이 있다. 석상 밑에는 “9월 8일 가을이 찾아오면 내 꽃은 피고 다른 꽃들은 시들어 버릴 것이다. 내 향기가 장안에 가득 차 스며들고, 온 도시가 황금 갑옷으로 뒤덮이리라.”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원문】 「待到秋来九月八,我花开尽百花杀。冲天香阵透长安,满城尽带黄金甲。」
황차오는 관리가 되고 싶었으나 과거에 낙방하고 나서 소금 장사를 하여 큰 부를 축적했다. 당시 당나라는 정치가 부패하고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되어 민심이 사나웠다. 식료품 가격이 오르고 소금 가격이 30배나 뛰어 매일 먹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사람이 많았다.
황차오(黃巢) 동상(사진:스타투어)
흉년이 들어 민심이 동요한 틈을 타 왕선지(王仙芝)가 상군장(尚君长), 시존(柴存), 필사탁(毕师铎), 조사웅(曹师雄), 유언장(柳彦璋), 유한홍(刘汉宏), 이중패(李重霸) 등 3,000명과 함께 ‘평균(平均)’이란 구호를 최초로 사용해 군사를 일으켰다. 황차오가 이에 호응하여 唐 乾符二年(875) 북방 출신 병사들을 회유해 민란을 일으켰다. 황차오 봉기군은 번진(藩鎭)의 힘이 강한 중원(中原) 지역을 피하여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형양(荆襄), 안후이 남부, 저장 동부, 푸젠으로 이동했다. 乾符 五年(878) 왕선지가 호북으로 출격했다가 黃梅(황강시)에서 증원유(曾元裕)에게 패해 전사했다. 왕선지의 부하 상양(尙讓)이 부하들을 이끌고 황차오에게 의탁하여 황차오는 농민 봉기군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충천대장군(冲天大将军)으로 추대되었다.
봉기군의 진격로(사진:궁인창)
879년, 황차오는 10만 명 대군을 이끌고 저장성 서부(浙西)를 진격하고 방비가 허술한 浙江과 福建 일대를 가로질러 원정 전쟁을 벌였다. 봉기군은 남쪽의 요충지인 광저우(广州)를 함락하고 절도사 리위안(李迢)을 생포하여 영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농민군은 정부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황차오가 유일하게 대규모로 근거지를 세운 곳은 광저우였지만, 황차오의 부하들이 대부분 북방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염병(瘟疫)으로 사망해 광저우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60만 봉기군은 광저우에서 북상하여 880년 화이허를 건너 뤄양을 점령한 뒤 동관을 공격하고 881년에 도읍인 長安에 진입했다. 이때 당나라 금오대장군(金吾大将军) 장직방(张直方)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황차오 봉기군을 맞이하였다.
881년 1월 16일 황차오는 唐 제18대 황제 희종(李儇, 862~888, 재위: 873~888)을 내쫓고 함원전(含元殿)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 881~884)이라고 하였다. 황제는 상양(尙讓)을 재상으로, 주온(朱溫)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민심을 안정시켜 나갔다. 그러나 동주를 지키던 大将 주온(朱溫)이 배반하고 당에 투항했다.
梁 태조 주황(太祖 朱晃)(사진;바이두백과)
唐 王朝는 주온에게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要職에 등용했다. 泗川으로 피신한 당 희종(僖宗, 862~888)이 각지의 잔여 세력을 모아 봉기군을 향해 반격을 가해 봉기군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어쩔 수 없어 長安에서 철수하여 산둥 타이산(泰山) 일대로 이동하였다. 황차오는 中和 四年(884) 6월 당나라 병마사 이극룡(李克用, 唐 太祖, 856~908)과 주전충에게 연속 격파당해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泰山 동남쪽으로 도망갔다가 당나라 장수 시푸(时溥)가 지휘하는 군사에게 호랑곡(虎狼谷)에서 패하여 자결한다. 이로써 9년여에 걸친 농민 전쟁은 종료되어 사천에 피란을 떠났던 희종은 885년 수도 長安으로 돌아왔다. 당 농민 봉기는 당나라 정권에 타격을 주었고, 봉건사회가 형성한 지주제경제(地主制经济)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봉기는 중국 고대 농민 전쟁사에서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泰山 虎狼谷(사진: 抖音百科)
황차오가 이끄는 농민 봉기군(唐末农民起义, 唐末農民起義)은 선하령을 통과해 차지하고 700리에 이르는 산길을 개척하고 개간했다(刊山伐道). 이로 인해 험준하고 차도가 통하지 않는 길이 크게 확장되어 福建省 7성을 장악하고 浙江, 福建 두 성의 울타리로 만들었다.
선하관(仙霞關) 유적지는 황차오의 난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시비 주변에 浣霞池 정자가 있고, 關帝廟와 觀音閣과 茶室과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다. 이 길은 남송 시가(诗词)의 길로 辛弃疾、陆游 等 많은 文人과 墨客이 많은 시를 남겼다.
선하가도 지도
황차오 난 때 신라의 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唐朝 관리로 있으면서 각 지방의 힘을 동원하고 연합하여 황소 봉기군을 토벌하고자 廣明 二年(881)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배포했다. 격문의 내용은 黃巢가 惡을 山처럼 쌓고 끊임없이 어지럽히는 것을 엄격히 질책하며, 《道德經》 등의 경전을 인용하여 그 악행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孤雲 최치원(崔致遠)동상(사진;궁인창)
절도사 고변(高骈)이 이끄는 팔만 대군과 이천 전선의 군사 배치를 상세히 기록하여 당군의 강력한 실력을 강조하여 黃巢의 봉기군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격문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무력을 집중시키며 黃巢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고, 그가 항복하기를 원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으며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권유했다. 격문의 마지막에는 黃巢에게 경고하기를, 만약 집착하여 깨닫지 못하면,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것이며 그 부하들은 소탕되고 아내와 아이들도 살해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대범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는 것이요,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百年의 생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萬事는 마음이 주장된 것이매,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討黃巢檄文〉 공로를 인정하여 최치원에게 비은어대(緋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했다.
양저우 최치원기념관 개관식(사진:연합뉴스)
2000년 양주당성유적박물관의 관장 동쉐팡(董学芳, Dong Xuefang) 등이 최치원기념관 건립을 중앙 정부에 제안하여 중국 외무부가 특별 검사팀을 파견하여 현장 검사를 거쳐 2005년 10월 揚州에 최치원기념관의 설립을 승인했다. 양저우시 당국은 唐城유적박물관과 인접한 곳에 최치원기념관을 2007년에 건립하고 초대 관장에 董学芳을 임명했다.
2023년 7월 25일에 장보고 유적지 답사 대원들은 중국 장쑤성 양저우시 최치원기념관을 방문하여 黄巢의 난과 재당신라인의 생활상을 관람했다. 전시장에는 新羅의 대학자이자 문필가인 최치원이 揚州에서 牧民官으로 활동했던 것을 기념하여 그의 생애와 활동, 사상과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전시했다.
〈천년의 기억을 뛰어 넘어〉(사진;궁인창)
국제문화가 크게 번성했던 통일왕조 唐王朝(618~917, 李渊 建立)는 安史之乱과 唐末農民起義 이후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藩镇将领 朱溫(852~912)은 어릴 때 이름이 朱三이었다. 주온은 黃巢의 부하였으나 배반하고 唐에 투항하여 공적을 세웠다. 주전충은 宣撫節度使로 승진한 후, 황소에 대항했던 李克用과 주도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당나라 실권을 장악했다. 904년 주전충은 당나라 제19대 황제 소종(昭宗)을 살해하고 그의 9번째 아들인 13세의 哀帝를 제위에 올렸다.
天佑 二年(905년) 3월 하늘에 彗星이 갑자기 나타났다. 점쟁이는 이를 두고 “황제와 신하들이 모두 곤경에 처해, 처벌받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주전충의 심복인 이진(李振), 장현휘 등은 하늘의 현상을 빌미로 “唐 고관들을 처형하여 일시에 황하에 던져버려라.”라는 선동을 하였다. 주전충은 고민을 거듭하다 재상 유찬(柳璨)에게 살해를 지령해 유찬은 左仆射 배추(裴樞), 清海军节度使 독고손(独孤损), 右仆射 최원(崔远), 이부상서 육의(陆扆), 공부상서 왕부(王溥), 병부시랑 왕찬(王赞), 守太保致仕 조숭(赵崇) 등 衣冠淸流라 불리던 30여 명의 관료를 滑州 白馬驛(今河南滑县境)에 소집하게 한 후 살해하고 그 시신을 황하에 던져버렸다. 이것은 당나라를 찬탈하기 위한 잔인한 권력 투쟁의 잔혹성(残酷性)을 보여주는 사례로 전통적 유교적 가치관에 어긋나는 만행으로 ‘白馬之禍’라고 부른다. 2년 후 907년에 朱全忠이 唐나라 마지막 황제 애제(哀帝)로부터 선양(宣讓)의 형식을 빌려 황제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梁(后梁, 후량)이라 하고 이름을 황(晃)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五代十國時代(사진:바이두백과)
당(唐) 왕조가 멸망한 10세기 초부터 송(宋) 왕조가 개창된 10세기 중엽까지 혼란기를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라고 한다. 五代는 후량(後梁: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晉: 936~946), 후한(後漢: 947~951), 후주(後周: 951~960)이고, 十國은 마초(馬楚: 907~951), 오(吳: 902~937), 오월(吳越: 907~978), 전촉(前蜀: 907~925), 민(閩: 909~945), 남평(南平: 907~963), 남한(南漢: 909~971), 후촉(後蜀: 934~965), 남당(南唐: 937~975), 북한(北漢: 951~979)이다.
구양수(歐陽脩)(사진:바이두백과)
북송의 史學家이며 政治家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는 《新五代史》 〈杨氏列传〉에서 “아아, 梁의 惡은 극에 달했다! 도적으로서 起義해 唐을 멸망에 이르게 할 때까지 그 독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천하의 호걸들이 사방팔방에서 일어났고 각자 가슴에 칼을 겨누려 했지만, 칼날이 무뎌져서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양나라는 천하의 무적이었으며, 가위 호랑이나 늑대처럼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라고 비평했다.
【원문】 「新五代史·传呜呼,梁之恶极矣!自其起盗贼,至于亡唐,其遗毒流于天下。天下豪杰,四面并起,孰不欲戡刃于胸,然卒不能少挫其锋以得志。梁之无敌于天下,可谓虎狼之强矣。」
浙江 江山市 江郎山 풍광(사진:向明超)
무신 이방익 일행은 청나라 호송관(護送官)이 들려주는 고대 唐王朝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깊고 험난(險難)한 산에 올라 선하관(仙霞關)에서 筆談을 나누고는 선하고도(仙霞古道)를 지나 江山市 江郎山을 거쳐 항저우로 향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