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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무신 이방익과 선하고도(仙霞古道)
선하고도(仙霞古道)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장산시(江山市) 보안향(保安乡) 셴샤령(仙霞岭) 남쪽 푸젠성, 저장성, 장시성(江西省) 세 성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이 산을 구취안산(古泉山), 취안링산(泉陵山)으로 불렀다. 이 길은 고대 푸젠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공식 육로로 푸젠으로 가는 목구멍(入闽咽喉)이라 하였다.
조선왕조 무신 이방익과 선하고도(仙霞古道)
 
 
선하고도(仙霞古道)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장산시(江山市) 보안향(保安乡) 셴샤령(仙霞岭) 남쪽 푸젠성, 저장성, 장시성(江西省) 세 성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이 산을 구취안산(古泉山), 취안링산(泉陵山)으로 불렀다. 이 길은 고대 푸젠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공식 육로로 푸젠으로 가는 목구멍(入闽咽喉)이라 하였다.
 
청나라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顾祖禹, Gu Zuyu, 1631~1692)의 가문(家門)은 대대로 沿革地理와 軍事地理에 정통하여 평생 역사와 지리연구에 헌신했다. 顾祖禹가 쓴 《독사방여기요(读史方舆纪要)》에는 고대 민(闽)이 외부와의 교류가 매우 불편했다고 적었다. “浙江에서 민(閩)에 들어오는 사람은 청호(清湖)에서 배를 내려 상륙하고, 연이어 굴곡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 포성현(浦城县) 서쪽에 이르러 육지로 배를 타고 민(闽)해에 도달한다.”
 
《한서》에 따르면, 서한 건원 3년(기원전 138), 한 무제는 민월(闽月)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해륙(海陸) 두 갈래로 나누어 육로로 셴샤령(仙夏嶺)을 넘어 민(闽)으로 들어갔다.
 
【원문】
 
清代学者顾祖禹所著的《读史方舆纪要》认为,古时闽地和外界交流非常不便,“凡自浙入闽者,由清湖渡舍舟登陆,连延曲折,逾岭而南,至浦城县城西,复舍陆登舟以达闽海。”
据《汉书》所记,西汉建元三年(公元前138年),汉武帝发兵攻闽越,兵分海陆两路,陆路越仙霞岭入闽。
 
일본 견당선(사진;위키백과)
 
일본 귀족(貴族, 公卿) 후지와라 카즈노마로(藤原 野葛麻吕)는 延暦 20년(801)에 견당대사(遣唐大使)로 임명되었다. 그는 延暦 22년(803) 4월에 일본 난바진(難波津)에서 출항하였는데, 폭풍우를 받아 견당사선이 파손되어 항해가 불가능했다. 배를 정비하여 延暦 23년(804) 7월에 제16차 견당사(遣唐使)로 일행 천여 명을 이끌고 출항하여 8월에 福州에 표착했다. 그러나 견당사(遣唐使)의 증표인 도장이 빠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제2船에는 승려 사이초(최징, 最澄)가 승선했었다. 견당사 후지와라 카즈노마로(藤原 野葛麻吕)가 제출한 공문서에 내용이 잘못 기재되어 신분을 의심받았지만, 한자를 잘 아는 승려 구카이(空海, 공해, 弘法大師, 774~835)가 나서 문서를 다시 필사하여 해결되었다.
 
空海法师(사진:궁인창)
 
승려 구카이(空海)는 견당사 후지와라 카즈노마로(藤原 野葛麻吕) 귀족(公卿) 및 일행 천여 명과 함께 唐 덕종(德宗) 정원(贞元) 20년(804)에 선하고도(仙霞古道)를 지나 고대 관문 풍령관(枫岭关)을 거쳐 장안(长安)으로 향했다. 견당대사 후지와라 카즈노마로는 12월 장안성에 들어와 덕종(徳宗)을 알현하고 이듬해인 延暦 24년(805년) 정월 덕종 승하(昇遐)와 순종(順宗) 즉위에도 참석하였다. 동년 5월에 명주(明州, 寧波)에서 귀국길에 올라 對馬島國을 경유하여 7월에 귀국했다. 견당사는 천황이 내려준 칼을 반납하고 당나라의 정세를 보고하였다. 제17차 견당사 일행에 승려 엔닌(794~864)이 뽑혀 838년에 양주에 도착해 장안으로 갔다가 唐 武宗의 회창훼불을 당하고 등주 적산법화원에 머물다 신라 상인의 도움으로 귀국해 《入唐求法巡礼行記》 를 남겼다. 책 원본은 없어졌으나 1291년에 교토 기온(祇園) 쵸라쿠지(長樂寺)의 겐인(兼胤) 화상이 72세 때 만든 사본이 1883년에 교토 도지(東寺)의 간치인(觀智院)에서 발견되었다. 1955년에 하버드대학의 옌징(燕京)연구소 소장이던 라이샤워(E.O.Reischouer) 교수가 이 책을 연구해서 〈Ennin’s Travel in Tang China〉라는 연구서를 간행한 이후 널리 알려졌다. 이후 일본은 894년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唐나라의 쇠퇴를 이유로 견당사 파견의 폐지를 건의하여 견당사 제도가 폐지되게 된다.
 
근세 학자들은 셴샤령(仙霞岭) 길은 남송(南宋)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청나라 《浙江通志》 강희본과 옹정본 정판(正版)에는 “송나라 이래 사호(史浩, 1106~1194)가 산을 개간하여 길을 만들고, 돌을 수백 개 쌓아 산 위에 관을 쌓았다. 史浩가 복건의 총수로 돌로 길을 닦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돌로 길을 닦기 이전에도 흙길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원문】
淸朝康熙和雍正版《浙江通志》分别记述为“自宋史浩伐山通道,累石百盘,据颠为关”“史浩帅闽,甃以石路”,不过也不排除“甃以石路”之前有部分土路的可能性。
 
남송대신 사호(史浩, 1106~1194)(사진:위키백과)
 
사호(史浩)는 字가 直翁,号가 真隐,明州 鄞县人(今属浙江省宁波市鄞州区)이다. 그는 崇宁 5년(1106)에 태어나 소흥(绍兴) 15년(1145)에 진사에 올라 国子博士와 참지정사(参知政事)를 역임했다. 그는 송 효종(宋孝宗)의 동궁 교사(东宫教师)였다. 벼슬은 태사(太师)에 이르렀고 위나라 공(魏国公)에 봉해졌다. 소희(绍熙) 5년(1194년)에 卒했다. 시호는 문혜(文惠)였으나, 이후 월왕(越王)에 추서되고 충정(忠定)으로 시호가 변경되었다. 사호(史浩)는 아버지 史师仲英이 일찍 세상을 떠나 집이 가난하였다. 그는 귀족이 된 후 향곡의전(乡曲义을 설립했다. 건도(乾道) 4년(1168년)에 지소흥부(知绍興府)를 설립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돈을 기부하여 좋은 농지를 사고, 매년 그 이익을 마을의 가난하고 장례와 결혼에 쓸 돈이 없는 선비들의 후손들을 돕고, 그들이 배우고 의롭게 살도록 도왔다.” 마을 사람들은 농장에 스하오(史浩), 심환(沈焕), 왕대유(汪大猷)의 초상화를 그려서 보관했다. 셋째 아들 史弥远과 그의 조카 史嵩之는 모두 남송의 대신으로 이로 인해 “한 가문에 재상이 셋, 四代에 왕이 둘, 대신이 5명, 진사가 72명”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원문】 「有“一门三丞相,四世二封王,五尚书,七十二进士”之谓。」
 
남송의 문학가이자 교육자인 여조겸(吕祖谦)은 그의 여행 일기 《入闽录》에서 이 길을 셴샤로(仙霞路)라고 불렀다. 먼저, 성 간의 경계와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속성이 있다. 廿八都古镇은 모두 저장, 푸젠, 장시 세 성의 경계에 있는 셴샤 산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仙霞岭은 ‘저장산맥의 조상(浙江山脉之祖)’으로 불리며, 저장성과 푸젠성에 걸쳐 있다. 한쪽은 톈타이산(天台山)을 들고 다른 한쪽은 우이산(武夷山)을 메고 있어 두 지역을 가르는 천연 장벽으로 사방은 울창하고 험준하며 겹겹이 이어진 산들로 이어진다. 청나라 시인이며 학자 썬더첸(沈德潜, 심덕잠, 1673~1769)은 “저장에는 셴샤(仙霞)가 있고, 유촉(犹蜀)에는 검각(剑阁)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원문】 「浙之有仙霞,犹蜀之有剑阁也。」
 
 
검문관(剑门关)(사진:위키백과)
 
셴샤령(仙霞岭) 고개는 장구령(张九龄, 678~740), 왕안석(王安石, 1021~1086), 남송 애국 시인 육유(陆游, 1125~1210), 주희(朱熹), 유극장(刘克庄, 1187~1269), 황공도(黄公度, 1109~1156), 양만리(杨万里, 1127~1206), 신기질(辛弃疾, 1140~1207), 서하객(徐霞客, 1587~1641) 등이 발자취(足迹)를 남겼다. 주희는 공자의 76대손인 孔德成이 지은 저장성 취저우((衢州) 공자 위패를 모신 사당 남종묘를 찾아가려고 30번이나 이 고개를 넘었다.
 
명나라 지리학자 서학객은 1620년부터 10년간 仙霞岭을 세 차례나 오르내리며 “仙霞岭은 인구의 이동, 상품의 교류, 문화와 풍속의 전파 등이 이루어진 곳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徐霞客游记》에 많은 글을 남겼다.
 
“대장부(大人, 훌륭한 사람)는 아침에 푸른 바다를 유람하고, 저녁에는 창오(苍梧)에서 지낸다.” 【원문】「大丈夫当朝游碧海而暮苍梧。」
 
평생 구름만 짊어진 작은 꿈(내 인생에서 작은 꿈 하나만 이루지 못했을 뿐), 세상의 모든 산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짧은 시간 내에 천하의 명산을 모두 오르기를 희망하며) 한걸음에 오를 수 있다. 【원문】「生平只负云小梦,一步能登天下山。」
 
오악을 다녀온 후, 다른 산은 쳐다보지 않고, 황산을 다녀온 후, 다른 산은 쳐다보지 않는다.
【원문】 「五岳归来不看山,黄山归来不看岳。」
 
해 질 녘이 다가오자 서둘러 계곡을 빠져나와 어둠 속을 3리나 걸어 十方庵에 머물렀다.
【원문】 「暮色逼人,急出谷,黑行三里,宿十方庵。」
 
서하객 일생 여행로(사진:바이두백과)
 
중국 국무원은 명나라의 지리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서하객(徐霞客)이 33년간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남긴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를 기념하기 위해 2011년 5월 19일을 ‘중국 관광의 날’로 지정하였다. 서하객은 오지를 여행하며 중국의 지형, 문화, 사회상을 상세하게 여행 일기에 담았다. 중국 국무원은 서하객의 여행 정신을 높이 기리며, 국민의 여가 활동을 통해 중국의 아름다움을 탐험하고 여행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셴샤령 길은 최초의 원시적인 옛길(原始的古道)로 최근에는 마을 주민들이 경운기를 동원해 마을 길을 크게 넓혔다. 이 길에는 탐구할 가치가 있는 많은 고대 역사 유적이 있다.
 
셴샤령은 저장성의 대표적인 홍색관광(红色旅游, Red tourism) 명소 중 하나이다. 1942년, 일본 침략군은 취저우에서 군대를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와 8천 명을 동원하여 선하관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중국군 49군대는 이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고, 일본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끝내 셴샤령(仙霞岭)을 넘지 못했다. 이곳에 이 일본 군대와 싸워 승리한 곳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중국 정부는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과거의 계급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원칙을 모두 상실해 옛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여러 장소에 중국공산당(CCP)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지정했다.
 
선하고도(仙霞古道)(사진; 저장성임업국)
 
선하고도(仙霞古道)는 선하산맥을 넘어 첸탕강과 민강 수계를 연결하는 육로 연결선으로, 총길이 약 120.5km의 육로는 양쪽의 수로를 연결한다. 전체 노선은 북쪽으로 저장성 장산시 청관진 남쪽 7.5km 지점의 청호 부두에서 시작하여 장산 경내에서 75km에 달하며, 남쪽으로 푸젠성 푸청현 청남포진의 남포계 부두까지 이어지며, 푸청 경내에서 약 45.5km에 이른다.
 
선하고도는 저장성의 8대 등산로 중 하나로 길은 산의 등고선을 따라 뻗어 넓은 돌길은 “之”字形으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산 중턱에 다다르면 점점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지며, 길을 따라 푸르른 산들의 숨 막힐 듯한 경치가 펼쳐진다. 이 길은 평균 해발고도 1,000m로 서쪽으로 우이산맥과 연결되고, 동쪽의 여맥은 저장성 동부의 톈타이산과 다판산을 연결하며, 첸탕강 수계와 민강 수계의 분수령이다. 고대인들이 仙霞岭에 개척한 선하고도(옛 이름은 강포역도, 절민관도)는 절민 두 성을 연결하며, 역도, 상도 외에도 군사 등 여러 기능이 있다. 역사적으로 이 고대 도로는 푸젠과 중원을 오가는 가장 편리한 통로였으며 해상 실크로드 육상 운송 라인의 가장 중요한 경로 중 하나였다. 중국 경제와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엄자릉(嚴子陵) 조대(釣臺)(사진:위키백과)
 
仙霞岭을 넘은 이방익 일행은 浙江省 구주부(衢州府) 江山縣에 들어와 서안현(西安縣)과 용유현(龍游縣)을 지나 매령(梅嶺)을 넘어 바로 엄주부(嚴州府)에 진입해 퉁루현(通路縣) 부춘산(富春山) 기슭에 있는 엄자릉(嚴子陵) 조대(釣臺)를 방문했다.
 
엄자(嚴子)는 1세기 후반 동한(東漢) 학자 염광(炎廣, 嚴子陵)으로 그는 콰이지(悠条) 여요(御姚) 출신으로,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자는 문숙(文叔), BC. 6∼AD. 57)의 어린 시절 가장 절친한 竹馬故友였다. 炎廣은 친구가 황제에 오르자, 자신의 성을 嚴으로 改姓하고, 이름을 엄광(嚴光), 자(字)는 자릉(子陵)이라 하고 산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광무제가 엄자릉을 등용하고자 친구를 찾아갔다. 엄자릉은 황제를 보자마자 “아! 문숙(文叔)이 이게 얼마 만인가?”하였다. 이 광경에 신하들은 놀래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광무제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엄자릉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잤다. 함께 잠을 자던 중 엄자릉이 황제에게 이불을 덮어주어 황제는 편안하게 잠을 잤다. 그 이후에도 광무제는 엄자릉을 불러들여 옛날 일을 언급하며 며칠 동안 함께 누워 자기도 하였다. 하루는 천문(天文)을 보던 천문관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하는 천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제의 신상에 위해(危害)가 생기는 징조라고 여겨 천문관은 어전에서 이 사실을 고했다. 그런데 그것은 엄자릉이 자다가 무심결에 그만 광무제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황제가 옛 친구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려 하자, 엄자릉은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에 은거하였다. 건무(建武) 17(41)년에 다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고, AD. 43년 80세에 생을 마쳤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낚시하던 곳을 엄릉뢰(嚴陵瀨) 또는 엄릉조대(嚴陵釣臺)라 부른다. 이 일화는 엄자릉의 현명한 처신과 고고한 인품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엄자릉(嚴子陵) 상(사진:바이두백과)
 
송나라 개혁정치가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북송의 제4대 황제 仁宗(재위:1022~1063)을 보필하며 백성들의 평범한 일상을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인종은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진심으로 반성하며 황제의 옷을 입지 않거나 대신들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황제는 빈곤층에게 의약품을 제공하고, 죽은 자를 위해 유족들에게 관 구매 비용을 지원하고, 가뭄 등 곤란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줬다.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숨진 병사들의 가족도 돌봤고, 죄수들은 징역형을 면제해 자기 가족의 생계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재난으로부터의 구제를 기도하기도 했다. 지도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선한 마음을 내면, 하늘은 감동하여 사람을 도왔다. 범중엄은 엄주(嚴州) 태수로 부임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를 지었다.
 
【원문】 《고문관지(古文觀止)》 9권 唐宋文 〈嚴先生祠堂記〉
先生,漢光武之故人也。相尚以道,及帝握赤符,乘六龍,得聖人之時,臣妾億兆,天下孰加焉?惟先生以節髙之。既而動星象,歸江湖,得聖人之清。泥塗軒冕,天下孰加焉?惟光武以禮下之。在蠱之上九,衆方有為,而獨「不事王侯,髙尚其事」先生以之。在屯之初九,陽徳方亨,而能「以貴下賤,大得民也」,光武以之。蓋先生之心,出乎日月之上;光武之器,包乎天地之外。微先生不能成光武之大,微光武豈能遂先生之髙哉?而使貪夫廉,懦夫立,是有大功於名教也。某來守是邦,始搆堂而奠焉,迺復其為後者四家,以奉祠事。又從而歌曰:「雲山蒼蒼,江水泱泱。先生之風,山髙水長!」
 
【번역】
선생은 한(漢) 광무제(光武帝)와 오랜 친구이다. 두 사람은 도의로써 서로 존경하고 황제가 적부(赤符)를 손에 넣고, 여섯 마리의 용을 타고, 성인의 때를 얻어 수많은 관리와 백성을 다스렸으니, 천하에 고귀함이 이보다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오직 선생만은 절조가 높았다. 두 사람의 우정이 별자리를 감응시킨 후, 강호에 은거하며 성인의 고결함을 얻었다. 높은 벼슬과 녹봉을 진흙처럼 여겼으니, 천하에 이보다 더 고고한 것이 있겠는가? 오직 광무제(光武帝)만은 예의로써 그의 앞에 낮추었다. 《역경》의 고괘(蠱卦) 상구(上九)는 다른 효사(爻辭)는 모두 일에 능력을 발휘함을 나타내고 있으나 상구(上九) 홀로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자기의 일만 고상히 지킨다.”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선 그 말을 실천하였다. 《역경》의 둔괘(屯卦)의 초구(初九)는 밝은 덕이 마침 형통하여 이로 인해 “귀한 몸으로 비천한 곳까지 스스로 낮출 수 있으면 크게 민심을 얻는다.”하였는데 광무제는 그 말을 실천하였다. 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보다도 높고, 광무제의 도량은 천지의 바깥까지도 감싸 안을만하다. 선생이 아니라면 광무제의 위대함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광무제가 아니라면 어찌 선생의 고결함이 이룩될 수 있었겠는가? 선생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청렴결백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니, 명분과 교화에 커다란 공로가 있다 하겠다. 내가 이곳 엄주(嚴州)의 태수로 부임 후 사당을 지어 선생에게 제사를 지내고 선생의 후예인 네 집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어 선생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또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구름이 걸린 산 푸르고 강물은 깊고도 넓어라. 선생의 德風은 산 같이 높고 저 강물처럼 영원하구나!”
 
이방익 일행은 셴샤령(仙霞岭)을 힘들게 넘어 선하고도(仙霞古道)에 있는 엄자릉(嚴子陵) 조대(釣臺)를 방문해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에 빠졌지만, 호송관에 재촉에 다시 길을 떠났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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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8. 10:35)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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