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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조선에 돌아와서 정조와 대화 내용 승정원일기 수록... 청조 양자강 이남 사람들의 삶과 경제활동 궁금해
무신 이방익의 〈표해가〉
무신 이방익은 언문과 국한문을 섞어 표류 당시의 상황을 1인칭 화법으로 잘 묘사하여 기행가사 〈표해가〉에 3·4 및 4·4 운문으로 남겼다. 이 가사는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이 소장했던 것으로 서울대 중앙도서관 《아악부가집》 1권이 남아있고, 이용기가 펴낸 《악부》에 〈표해가〉가 실렸는데 이은상 선생이 보관하고 있다가 고려대도서관에 기증하였다. 당시 이 〈표해가〉 가사는 제주도에 전해지지 않았다. 〈표해가〉가 처음 활자화된 것은 1914년 《청춘》 창간호에 실린 것이다.
무신 이방익의 〈표해가〉
 
 
무신 이방익은 언문과 국한문을 섞어 표류 당시의 상황을 1인칭 화법으로 잘 묘사하여 기행가사 〈표해가〉에 3·4 및 4·4 운문으로 남겼다. 이 가사는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이 소장했던 것으로 서울대 중앙도서관 《아악부가집》 1권이 남아있고, 이용기가 펴낸 《악부》에 〈표해가〉가 실렸는데 이은상 선생이 보관하고 있다가 고려대도서관에 기증하였다. 당시 이 〈표해가〉 가사는 제주도에 전해지지 않았다. 〈표해가〉가 처음 활자화된 것은 1914년 《청춘》 창간호에 실린 것이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수로 있다가 한국전쟁 중에 납북된 우리어문학회 회원이었던 국문학자 고정옥(高晶玉, 1911~ ?)과 윤동주의 동기생인 월북 국문학자 김삼불(金三不, 1920~ ?)이 1955년 북한에서 주해한 가사집이 있다. 김삼불은 1947년 열린 윤동주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맡아 낭독했다.
 
2011년에 서강대 료욜라도서관에서 순한글 필사본 1책 표제 《漂海錄 單》이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에 기존에 알려진 표해가 4,500자보다 훨씬 많은 전체 52장 16,000여 자의 표해록 분량이 있다.
 
이방익 언문 《漂海錄》(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문....
 
茫茫大海 潮水頭에 一葉漁艇 올나타니
李有甫 等 일곱 船人 차례로 조찻고나.
風帆을 놉히 달고 바람만 조차가니
遠山에 빗긴 달이 물 가운대 빗최엿다.
靑紅錦緞 千萬匹을 匹匹이 헷떠린 듯
하날인가 물빗인가 水天이 一色이라.
陶然히 醉한 後에 船板치며 즐기더니
西北間 一陣狂風 忽然이 이러나니
泰山 갓흔 놉흔 물결 하날에 다핫고나.
舟中人이 慌忙하야 措手할길 잇슬소냐.
나는 새 아니어니 엇지 살기 바라리오.
밤은 漸漸 깁허 가고 風浪은 더욱 甚타.
万頃滄波 一葉船이 가이 업시 떠나가니
슬프다 무슨 罪로 하(下)直 업슨 離別인고.
一生一死는 自古로 例事로대
魚腹 속에 永葬함은이 아니 寃痛한가.
父母妻子 우는 擧動 생각하면 목이 멘다.
죽기는 自分하나 飢渴은 무삼 일고.
明天이 感動하샤 大雨를 나리시매
돗대 안고 우러러서 落水를 먹음으니
渴한 것은 鎭定하나 입에서 셩에 나네.
발그면 낫이런가 어두으면 밤이런가.
五六日 지낸 後에 遠遠히 바라보니
東南間 三大島가 隱隱히 소사낫다.
日本인가 짐작하야 船具를 補緝하니
무삼 일로 바람 形勢 다시 變하는고.
그 섬을 버서나니 다시 못보리로다.
大洋에 飄飄하야 물결에 浮沈하니
하날을 부르즈져 죽기만 바라더니,
船板을 치는 소래 귀가에 들니
거늘 물결인가 疑心하야 蒼黃이 나가 보니
자 넘은 검은 고기 舟中에 뛰어든다.
生으로 토막 잘나 八人이 논하 먹고
頃刻에 끈을 목숨 힘 입어 保全하니
皇天의 주신 겐가 海神의 도음인가.
이 고기 아니러면 우리 엇지 살엇스리....
 
 
무신 이방익이 지은 〈표해가〉의 어휘력은 정말 대단하여 그의 가사를 읽고 있으면 바다 냄새가 물씬물씬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표류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생활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무신 이방익 일행은 동려현(桐廬縣)과 부양현(富陽縣)을 지나 공로를 따라 순탄하게 북상하여 4월 8일에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府)에 도착한다.
 
여기서 두 가지 논란이 생긴다.
 
이방익 일행이 바로 蘇州로 가지 않고 준비된 朝鮮人蕃人護送船에 올라 洞庭湖와 岳陽樓를 구경하고 赤壁江을 지나 蘇州에 이르렀다는 설과 바로 太湖로 갔다는 설 때문이다.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인문한국 김강식 교수는 2019년에 발표한 〈李邦翼 漂海錄 속의 漂流民과 海域 세계〉 논문에서 洞庭湖를 방문한 것으로 보았다.
 
이방익 일행은 4월 15일에 杭州府를 출발하여 5일 만에 악주(鄂州) 북운에 도착하고 4월 19일에 주장(九江) 도착. 蘇州에서는 王公의 환대를 받아 배를 타고 虎丘寺 등을 유람하고 4월 25일에 양주에 도착해 金山寺를 구경하였다.
 
金山寺 (鎮江市)(사진:위키피디아)
 
5월 3일에 江南省을 지나 山東에 이르고 허젠(河間)을 거쳐 5월 9일 燕京에 도착해 청나라 관리에게 그동안의 사연을 진술한 후 朝鮮館에서 20여 일 머물다 6월 2일 太平車를 타고 조선관을 출발하여 山海關, 瀋陽, 鳳凰城을 거쳐 1797년(정조 21년) 윤 6월 4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들어섰다. 9개월 보름 만에 조선 땅에 돌아왔다.
 
이방익이 용만(龍彎, 義州)에 도착했을 때 의주(義州) 府尹 심진현(沈晉賢, 1747~ ?)에게 말한 내용이 곧바로 조정에 전해졌다. 심진현은 정조 6년(1782)에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정조 11년(1787)에 호남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민심을 살폈다. 암행어사는 ‘오수찰방(獒樹察訪) 안매권(安邁權)은 사람 됨됨이가 진실로 정밀하고 자세하며, 정사 또한 근실하고 겸손하며, 기민을 진휼하는 데에 능히 정성을 다하였다.’라고 왕에게 복명(復命)하였다. 심진현은 정조 17년(1793)에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왕에게 “수토관(搜討官) 월송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이 1794년 4월 21일에 출발하여 5월 8일에 돌아왔다.”라고 울릉도 수토 결과를 보고했다.
 
표류민 이방익 일행은 조선 귀국 시 소지품 검사를 받고 청에서 받은 구호품과 화폐를 자세하게 말했다. 이방익 일행은 섬에 표착하여 1796년 10월 26일 팽호부에서 이방익은 10냥, 나머지는 각 4냥을 지급받았다. 대만부에서 10월 29일 쌀 2되와 반찬값 80文을 제공받았으며, 11월 14일 털모자, 大綿衫, 천으로 만든 신발값으로 돼지 한 마리 등, 은자 20냥을 제공받고, 배 값으로 30냥을 받았다. 12월 10일 팽호부 아문에서 돈 10貫을 받았으며, 12월 27일 천주부에서 은자 1냥씩을 제공받았다. 1797년 1월 5일 福州에서 매일 각자에게 돈 100문을 받았으며, 각자 편의에 따라 먹게 했다. 3월 21일 양주 강도현에서 각자에게 향 1部를 주었다. 6월 1일 제독이 은 2냥씩을 주었다. 이방익 일행이 받았던 구호품과 지원금은 상당한 규모로 이불, 貢緞, 黑角, 長衣 등이었다. 특이한 품목에 담배와 담배대가 있었다. 이방익은 자신의 노정을 세 권의 언서일기(諺書日記)로 정리했다. 심진현이 왕에게 보낸 장계 〈義州府尹沈晉賢以濟州標人李邦翼等從大國出來馳啟〉는 《日省錄》에 있고, 정조와 이방익의 대화 내용은 《承政院日記》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는 조선에 돌아온 이방익이 당상조관(堂上朝官)임을 알고 1797년 윤 6월 20일 誠正閣에 불러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山川風俗을 묻고 상세한 표류 이야기를 들었다. 정조가 특별히 이방익을 불러 대화한 이유는 淸朝 남쪽의 사는 사람들의 경제 활동과 삶의 모습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조정에서는 북학파인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등을 통해 청나라의 새롭게 변모하는 모습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이방익이 다녀온 臺灣과 江南의 풍요로운 상황을 전혀 몰랐다. 이방익은 江南 지역의 풍요롭고 번화한 모습과 변화상 등을 본 대로 정조에게 아뢰었는데, 그의 경험담은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정조는 비변사 제조에게 명하여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이방익을 위유(慰諭)하게 하여 五衛將 겸 全州中軍에 임명하였다.”
 
【출처 원문: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윤 6월 20일 무오 3번째기사】
○ 濟州人前忠壯將李邦翼, 漂到福建, 由旱路歷蘇、楊州, 至燕京。 上, 以邦翼, 以朝官, 漂流異域, 萬死生還, 命備邊司提調, 招見慰諭, 除全羅中軍。
 
《燕巖集》(사진:위키백과)
 
연암 박지원은 나이 61세로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사임(辭任) 차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했는데, 정조가 引見하여 연암이 청더(熱河)를 다녀온 적이 있어 이 일의 적임자로 생각하고 이방익의 표류를 好文字로 지어 바치도록 지시하였다. 연암은 글을 잘 아는 무신 이방익과 대화를 하였으나, 그가 겨우 노정만을 기억할 뿐으로 상세한 내용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연암은 글을 쓰기 전에 처남 이재성에게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연암은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전달받기로 한 언서일기가 중간에 유실되어 받지 못해 할 수 없이 이방익이 말한 지명과 사물을 대조하며 지리 고증을 통해 현장을 직접 방문한 이방익의 오류를 하나씩 밝혀냈다. 연암은 燕行을 통해 중국에 가본 적은 있지만, 江南 지역은 방문한 경험이 전혀 없어 중국의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고증했다.
 
이방익은 자신이 동정호(洞庭湖)와 악양루(岳陽樓)를 보았다고 진술했지만, 연암 박지원의 고증 결과 사실은 동동정(東洞庭)이라 불렸던 타이후(태호, 太湖)를 본 것임을 자료를 통해 밝혀냈다. 太湖는 중국 내의 세 번째로 큰 담수호로 호수 내에 섬 90여 개가 있다. 남부의 시산도(西山岛)는 서울 여의도 면적의 10배나 되며 진팅진(金庭镇)이라는 도시까지 있다. 둥팅산(洞庭山)은 석회암 지대로, 중국 정원을 장식하는 석회암 수석의 상당량이 이곳에서 온 것이다. 무신 이방익이 작성한 가사 〈표해가〉와 연암 박지원이 정조에게 올린 〈書李邦翼事〉 글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장소가 바로 동정호(洞庭湖) 방문이다.
 
경남 함양 상림역사인물공원 박지원 흉상(사진;:함양군)
 
방익이 아뢰기를, “항주(杭州)로부터 엿새 만에 소주(蘇州)에 당도하니 서쪽에 한산사가 있는데 누런 기와집 40칸이었습니다. 현(縣)의 고귀한 사람들이 저희 사정을 알고 음식을 장만하여 후대하고, 유람을 시켜 주었습니다. 배로 10리를 가니 고소대(姑蘇臺)에 당도했고 또 30리를 가니 악양루(岳陽樓)가 나왔는데 구리로 기둥을 세웠고 창문과 대청마루는 다 유리를 써서 만들었으며 대청 밑에다 못을 파고 다양한 색깔의 물고기를 길렀고, 앞에는 洞庭湖가 보였습니다. 거기서 돌아와서 또 호구사(虎邱寺)에 당도하니 천하에서 제일 큰절이라고 하는데, 7층의 탑이 바라보니 가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출처 원문】 연암 박지원 〈書李邦翼事〉
邦翼奏曰。自杭州六日至蘇州。西有寒山寺。黃瓦四十間也。知縣王公。設饌款待。使之遊賞。舟行十里至姑蘇臺。又三十里有岳陽樓。以銅爲柱。牕戶廳版。皆用琉璃。爲之鑿池於廳底。養五色魚。前望洞庭還。又至虎邱寺。天下第一大寺云。七級浮圖。望見無際。
 
한산사(寒山寺)((사진:바이두백과)
 
寒山寺는 쑤저우 경항대운하(京沆大運河) 변에 있는 임제종(臨濟宗)의 고찰로 6세기 초에 창건되고 淸代에 재건되었다. 한산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당대의 시인 장계가 일본에 포교한 절친한 친구를 걱정하며 읊은 풍교야박(楓橋夜泊) 야하쿠'라는 한시부터이다.
 
한산사 옆을 흐르는 강에 놓인 다리, 풍교 옆에서 한산사의 종소리를 듣고 '월락새 啼 있어 서리가 내리는 하늘에 가득…'이라는 유명한 말이 읊어졌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종루, 장경당 등 여러 개의 신전이 있다. 고소대는 春秋時代 오왕 합려(阖闾)가 기원전 505년에 처음 건설되고 그의 아들 부차가 계속 건설한 궁원 건축물로, 소주성 남서쪽 고소산(姑苏山) 위에 있다. 唐代의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의 시인들은 종종 고소대를 향수를 표현하는 이미지로 회고적인 정을 담아냈다.
 
고소대 원림(园林)(사진:每日头条)
 
“신 지원이 일찍이 듣건대, 중국 사람들은 강산이 아름답기로는 항주가 제일이요, 번화하기로 소주가 제일이라 하였고, 또 여자의 머리 모양새는 소주에서 유행하는 모양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소주는 한 주(州)의 부세(賦稅)만 보더라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항상 10배가 더하니, 천하의 재물과 부세가 소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산사(寒山寺)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계(張繼)의 시(詩) 중에 ‘고소성 밖의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익히 들어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로써 품평을 하는데 이것은 모방이 지나친 것으로, 진짜 한산사나 진짜 고소대로 말하자면 종래로 이곳에 몸소 갔다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방익이 창문(閶門)에서 옷을 털고 태호(太湖)에서 갓끈을 씻을 수는 있으나, 그가 악양루(岳陽樓)를 보았다고 말한 것은 사뭇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개 태호는 동동정(東洞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태호 속에는 포산(包山)이 있어 동정산(洞庭山)이라 불렀습니다. 이 동정(洞庭)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침내 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岳陽樓)의 이름까지 함부로 들먹였으니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태호와 관련된 여러 기록을 부기(附記)하여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를 논파하고자 합니다.”
 
太湖 동정산(洞庭山)(사진:sohu.com)
 
연암은 이방익의 말이 상세하지 않고 사물, 누대(樓臺), 이정표(里程標)의 이름이 어긋난 부분이 많아 이방익의 진술을 1차 기록하고, 자신이 강남(江南)과 관련된 문헌 청나라 린첸광(林謙光)의 《대만기략(臺灣記略)》, 북송 때의 소설총집 《태평광기(太平廣記)》, 명나라 때의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등을 참조하여 이방익의 노정에 관한 지리 고증을 시도했다. 린첸광(林謙光)은 청나라 강희 22년(1673년)에 臺灣이 청나라에 합병된 후, 臺灣府 교수로 부임해 타이완의 풍속과 관습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연대기를 편찬했다.
 
《臺灣記略》에는 지형, 역사, 행정 구조, 산과 강, 암초와 섬, 수도, 가계와 세금, 학교, 선거, 군사 방위, 나룻배 운항, 날씨, 지리, 풍속, 지역 특산물 등 15개 항목을 다루고 있다. 연암 박지원은 풍부한 지리정보와 엄밀한 실증정신이 잘 나타나게 고증해 나가는 방식을 사용해 《書李邦翼事》을 작성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이 내용은 《燕巖集》 권 6 別集에 실려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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