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8) 황산대첩,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로 예정된 승리
부절리斧節里 논공행상 관여 안 해... 이성계李成桂 인품 돋보여 왕정리王亭里 전쟁 중에 한가한 승려보고 抑佛정책 다짐 동충리東忠里 의병지원 가장 많았던 민초民草의 충혼忠魂서린 곳
남원
승리로 이끈 세 가지 조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예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인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일러져 오고 있다.
첫째 때가 맞아야 한다는 天時요, 둘째는 피아간에 있어서 보다 작전수행에 유리한 지세를 재빨리 차지해야 한다는 地利며, 셋째는 핀 주먹보다는 꽉쥔 주먹이 힘을 지니듯 일치단결된 군사력이어야 한다는 人和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측의 열배나 되는 엄청난 왜구를 통쾌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남정북벌을 통해 탁월한 지략과 용기를 쌓은 백전노장이성계의 뛰어난 전술 감각이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출 수 잇게 했다는 점에서 그 승리의 가치를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용계리에서 울어준 초저녁 닭의 울음을 신호로 전주로 통하는 길을 구라치에서 막은 슬기와 격전에 앞서 서두르지 않고 고남산에 들러 하늘에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림으로서 얻은 단결력 그리고 또 “험한 고지에 웅거한 왜구를 치기에는 벅차니 그들이 그곳을 빠져 나오기를 기다려 치자”는 배극렴의 제언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곳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면 이미 왜구는 독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는 판단아래 바람을 잡고 달빛을 끌었던 전술전략 등이 모두 위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준 것들이었다.
위엄 과시한 大基里 말무덤
그런데도 이성계의 용기와 지략을 미처 몰랐던 휘하의 군사들은 처음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출정을 몹시 두려워했던 나머지 전투에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마다 이성계는 탁월한 용인술을 발휘하여 휘하 군사들을 덕으로 감화시키기도 했고 또한 덕화만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무애를 과시하여 장수로서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하나의 예가 산동면 대기리에 있는 말 무덤 이야기다. 즉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출정에 앞서 활을 쏘았는데 그의 말이 화살을 따라 잡지 못하자 이성계는 자신의 말을 단칼에 목을 베어 죽였다. 그러나 말을 죽인 뒤에야 화살이 뒤늦게 날아와 떨어졌다. 그러자 이성계는 말을 죽인 것을 뉘우치고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 또 전쟁터에서의 민폐는 곧 군사의 교만이며 군사의 교만은 군사의 교만은 자칫 패전의 주요 원인이 된다. 때문에 이성계는 이를 극히 경계하여 추호도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엄히 군율로 단속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 <東國戰爭史>권3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행군에서 군사들은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꿨는데 때에 이성계는 군사들에게“ 대는 나무보다 가벼워 널리 운반하기 편하다. 그러나 역시 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온 물건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묵은 물건을 잃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탄복하여 모두 대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성계는 때와 장소, 또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도 정확한 판단으로 군사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대동단결 다짐한 斧節里
흔히 명산은 병장과 같고 대천은 정병과 같다는 말도 있다. 이 말대로 끊임없는 외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우리네 땅을 묵묵히 우리네 땅으로 고스란히 지켜준 것은 바로 말없는 푸른 산이요, 유유히 흐르는 냇물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왜냐하면 지리산이 크게 한쪽을 막아 주었고 그 줄기에서 뻗은 크고 작은 모습들이 겁 없이 달려든 왜구를 중간 중간에서 그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용장 이성계는 용기백배하여 일단백의 힘으로 그 속에 섬 도둑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지나쳐서는 안 될 특기할만한 사실은 왜장 이지발도가 죽자 완전히 사기를 잃은 왜구들이 우왕좌왕하며 아비규환의 형상으로 허겁지겁 살 길을 찾아 각자 도망하는 모양을 본 이성계가 군사들에게 큰 소리로 “싸움을 그쳐라, 예로부터 싸울 뜻을 잃고 각자 도생의 길을 찾아 도망치는 적을 모조리 죽이는 일은 마땅히 취할 때에는 매섭게 몰아쳤으나 승리를 얻은 후 논공행 않고 조정의 지분에 맡겼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이성계의 인품을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남원으로의 개선 도중 여원치를 넘을 무렵 앞서 전투에서 겁에 질려 겁에 질려 뒷전에서 목숨을 아꼈던 군사들이 자청해 이성계에게 처벌해 줄 것을 원했는데도 그는 이를 모두 용서해 주었었다. 여원치를 막 넘은 재 밑에 있는 이 마을은 그래서 전쟁 뒤에는 의례히 장수가 행하여야 할 논공행상을 거두었던 곳, 곧 이성계가 斧節, 또는 義仗을 거둔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 斧節里라는 지명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충리東忠里와 왕정리王亭里, 만복사萬福寺
전쟁이란 그 원인이나 명분이 어떻건 간에 피아간의 다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의 손실일 뿐이며 그 중 가장 큰 뭐니 해도 인명을 잃는 일이다. 때문에 일장공성만고골一將功成萬枯骨이라는 옛말처럼 전혀 인명의 손실이 없는 승리는 찾아 볼 수 없다. 즉 용감한 군졸들의 충정 없이 우연히 장군에게 안겨지는 영광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 전쟁의 특성에 비춰볼 때 격전에서 살아남은 군졸을 이끌고 개선하는 장수로서는 당연히 살아남은 군졸들에게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너그러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까닭은 이미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모의 정이 마음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개선의 기쁨은 곧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보다 결코 더 크다고는 말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황산대첩을 가능케 한 충의로운 희생은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였던가? 물론 사근역 전투에서 희생단한 박수경이나 배언의 죽음도 그 중 하나였고 그보다는 이진에서 사로잡아 자신의 그림자가 된 장수 이두란의 희생이 더욱 큰 것이었으나 겁에 질려 주저했던 배극렴 휘하의 군졸보다는 남원에서 단지 의를 위해 따라 나선 이름 모를 군졸들이 희생이 승전의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해서 황산전투 당시 가장 많은 청년들이 의병으로 자원했던 곳을 東忠里, 개선의 기쁨과 희생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동시에 느끼며 전투에서 얻은 상처와 피곤을 풀었던 곳을 王亭里라 이름 지어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다. 다만 이성계가 머물렀던 남원 왕정동엔 만복가라는 아흔 아홉 칸의 절이 있었는데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며 싸우는 군사들과는 달리 승려들은 그저 한가로이 지내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국의 병장 이성계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저 같은 불교에서는 더 이상 호국정신은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조선개국 후 이워졌던 억불숭유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