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리 모선재(慕先齋)
이 재실은 임실읍 감성리 감성 마을에 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창원 황씨(昌原 黃氏)의 재실이다. 문중에서 단기 4200년(1957)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선대의 뜻을 받들어[肯堂肯構]8) (이 제각을 설립하오니) 삼가[用伸]9) 선조들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향기로운 제물을 제기에 담아[于豆于籩] 조상님들께 올립니다. (자손으로써) 조상님께 드리는 제사를 받들고 향을 사르는 규범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집을 지은 까닭[經之營始]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데, 우리의 집안은 호남에서 이름난 가문이다. 창원의 옛 가문은 판돈령공(判敦寧公)의 음덕(蔭德)를 받았으나(판돈령공으로부터 시작되나), 고려시대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공신 황거정(黃居正, ?~1416)이 훈봉을 받았다. 의원군(義原君)10)의 9세손인 척진공(滌塵公)은 휘(諱)가 황후재(黃厚載)이다. (공은)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마음에 영화를 행하지 않아 용감하게 산림에 은퇴하여 시서(詩書)를 업으로 삼았다. 돌아가시자 늙어서 은퇴했던 곳(林泉)에 묘소를 마련하였다(塋域).
이곳에 재각은 여러 해 동안 이루어지지 않아 원망으로 여겼다. 지난 경인년(1950) 봄에 종중의 의논을 모아 모두 함께 (재각 건립을) 시작하였다. 무릇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겨우 준공하였다. 진실로 뜻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들보를 올리면서 육위(六偉)11)의 시를 기록한다.
이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보세. 성수산(聖壽山)의 밝은 새벽에 떠오르는 해는 붉고, 골짜기 입구는 빛나는 구나. 집의 마룻대와 추녀 끝에 비추는 빛은 천만년 동안 닳아 없어지지 않고, 맑은 바람으로 화목해진다. 이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보세. 봉황은 상서롭게 휴식을 취하고(瑞憩), 앞 시내는 어둠에 묻히는데, 솟아나는 신령스러운 기운(氣雲)은 들보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더하여, 어두워가는 것을 아래서부터 뒤집는다. 이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보세. 옥녀가 단장을 하고, 수목의 검푸른 색은 밭두둑을 검푸르게 하네. 바람과 먼지를 등지고 청소하는 것과 같으니, 마치 종원들이 조용히 앉아 참여하는 것 같구나. 이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보세. 북두칠성이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아 우러러 천리 떨어진 창원이 어느 곳이더냐, 해와 달이 기꺼이 온 나라를 비추는 것 같구나 이 들보를 위쪽으로 들어보세. 칠요(일 월 금 목 수 화 토의 7별)가 어긋남이 없이 매달려 있으니, 대상(大象)의 산가지 옛 사람의 일을 따르게 하네. 오히려 지금 하늘의 이치가 어찌 높은 이상(理想)이라고 하겠는가. 이 들보를 아래로 들어보세. 만물(品物)을 크게 대접하니 모든 조화가 각각의 이치에서 나온다. 아름다운 옥으로 거울을 만들어 오니 자손이 사모하고 사모하여 끊임없이 돌아온다.
7세손 황해수가 삼가 글을 짓다.
肯堂肯構 用伸 慕先之心 于豆于籩 式薦香火之典 經之營始 愀然見如 伏念 吾宗湖南世族 昌原古家 判敦寧公之蔭德 冝其麗不億 我朝開國功臣 諱居正勳封 原義君之九世孫 滌塵公諱厚載 年少擢第 心不爲榮 勇退山林 詩書爲業 終老林泉塋域 玆地齋閣 未成多年齎恨 去庚寅春宗議 齊發役 夫 衆力始克竣工 眞是有志者 事意成修 樑載擧 六偉綴辞
拋樑東 聖壽山靑曉旭紅 谷口煌煌 映棟宇 不磨千萬 穆淸風 拋樑西 鳳凰呈瑞憩 前溪暗 噴靈氣雲 成梁蕩蔚 燔窨覆低 拋樑南 玉女凝粧 黛色藍疇 昔風塵令和掃 恰是種宗精坐叅 拋樑北 北斗迢瞻 仰極千里 昌原何处 是槿邦日月照靑籍 拋樑上 七曜無差懸 大象筭 推軌步古 猶今天理 何曾高理想 拋樑下 品物洪饋 皆造化箇理 坐磨瑤鏡來 子孫慕慕綿綿回
七世孫 海秀 盥手以誌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깊이 묻혀 있는[天作地秘] 빼어난 곳은 반드시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드러나는 것이다. 운수(雲水)의 동쪽 감천동(甘泉洞)12)의 은연중에 자유롭게 솟아올라13) 여러 산의 중록(中麓)을 이루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 척진공(滌塵公)의 의장(衣藏)을 둔 곳이다. 공의 휘(諱)는 황후재(黃厚載)이고, 호는 척진(滌塵)으로 본관(系出)은 창원이다. 창원 황씨는 나라의 큰 성씨로, 고려시대에 이미 번성하였으며, 우리 조정[조선]에 들어와서 휘(諱) 황거정(黃居正)이 계시니, 우리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에 책봉(冊封)되었고, 의원군(義原君)에 훈봉되었으니, 공에게 9세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황원길(黃元吉)14)로 생원 진사이시다. 부친의 휘는 황대유(黃大惟)이시며, 어머니는 이씨로 한익(漢瀷)의 딸이다.
공은 천성이 재주가 뛰어나(俊逸) 어려서 성균관(上庠)에 들어갔으나, 마음에 영화로움을 추구하지 않아 산에 들어가 자취를 거두었다. 스스로 은거함을 좋아하여 세속을 피하였고 번민함이 없이, 자연(山水)에 있는 것을 좋아하다가, 천명을 다하고 돌아가시니, 이곳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하나의 재각도 두어진 것이 없어 자손들이 원통함을 가진 것이 오래되었다.
지난 경인년(1950) 봄에 두루 제족(諸族)들이 모여서 (재각 건립을) 시작하였다. 재물을 거두는 것은 순의(詢議)하여 균등하게 하였다. 새로이 집을 지으니 동서에 각기 방을 두고 중간에 대청을 둔 3간으로 완성하고, 이름을 모선재(慕先齋)라 하였다. 대저 서리와 이슬을 염려하기 때문이며, 선영을 추모하는 의미이다. 자손이 된 자로 아련하게 당에 들어가면 뭉게뭉게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즉 건물을 만든 노력이 이로써 크게 되는 것이니 비로소 서운함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제기에 넣어 바치는 곡물인 자성(粢盛)을 드리는 공손함이나, 제사를 지내는 예의는 오래갈수록 새롭구나. 즉 선조를 위하는 정성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는 선대와 후손을 위한 것이므로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라건데 후손들이 이어 가면서 이 건물을 수리해 간다면 이 건물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을미년(1955) 9월에 8세손 중환이 삼가 기록하다.
天作地秘之俊區 必待其人 而後發闡 雲水之東 甘泉洞 隱然自在聳翠 諸山之中麓 乃是滌塵公衣藏之置也 公諱厚載 號滌塵 系出昌原 昌原黃爲國大姓 在麗已盛 入我朝有諱居正 佐我太祖 策開國功臣 勳封義原君 於公爲九世祖 曾祖諱元吉 生員 進士 考諱大維 妣李氏 漢瀷之女 公天性俊逸 早登上庠 心不爲榮 入山収跡 自愛林泉 遯世無悶 樂在山水 以天年終 葬于玆地 無一齋閣之置 子孫齎恨者久矣 去庚寅春 周合諸族營始 鳩財詢議均同 新建棟宇 東西兩房 中間大廳 三間完成 名曰慕先齋 盖怵惕霜露 追慕先塋之意也 爲子孫者 僾然入堂 油然興孝 則建搆之力 於斯爲大 而庶乎無憾 粢盛之供 香火之儀 愈久愈新 則爲先之誠 貽後之謀 幾乎兩全 可不愼哉 華望來後嗣 而葺之 則可期此堂之永保也歟
乙未九月 日 八世孫 重煥 盥水以記
각주 8) 肯堂肯構는 父業을 받아 성공시키다는 뜻이다. 『서경』 「大誥」에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한데서 유래하였다.(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 9) 용신건고(用伸虔告) : 경건하게 고하다 10) 현판에는 原義君으로 되어 있으나, 황거정은 의원군에 봉해졌음으로, 의원군으로 기록하였다. 11) 상량문의 끝에 붙이는 글로 화재를 진압하는 하나의 비방이었다고 한다. 들보가 동 서 남 북 상 하로 뻗기에 6위로 글을 지었다. 12) 임실군 임실읍 감성리 감천골 13) 취미[翠微] : 산의 중허리. 14) 자 상지(裳之), 부 황안로(黃安老), 1546년(명종 1) 생원시 합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