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리 수구당(守邱堂)19)
이 재실은 임실읍 신정리 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입향조인 청주 한씨(淸州 韓氏) 韓빈의 재실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20)
一堂擎立秉彛天 한 건물을 지으니 하늘에 떳떳하구나 孝柱忠樑蕉範傳 기둥에 담긴 효와, 들보에 담긴 충은 홍범전에 내용이 모여 있다 瞻掃誠勤霜露履 돌아보고 청소하는 정성스러운 부지런함은 서리와 이슬에 적시네 尊攘義炳日星懸 높이고 멀리하는 의를 밝히는 것은 해와 별에 걸려있네 抱經當世專修道 당세에 경전을 끌어안고 도를 배우고 익히니 承誨諸公盡就賢 여러 선비들이 말씀을 받들어 모두 현명함으로 나아가네 追想精靈驂羈返 지나간 일을 정령을 생각하니 수레가 돌아오네 滿牎笙響綿風煙 창에 생황소리 가득하니 공중에 떠있는 흐릿한 기운 면면히 이어지네
後孫 肯錫 謹稿 후손 오긍석이 삼가 짓다.
예는 선조를 받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어, 마땅히 제사를 받들 수 있는 곳을 만들어, 효가 훌륭한 자손[錫類]들에게 이어져 끊어지지 않고 다행하게도 그것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일을 쉰 것이(건물이 퇴락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것이) 몇 년이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점괘[龜筮]가 딱 맞아 떨어져 규모를 더욱 새롭게 하였다.
저 후손들이 그 역을 감독함으로써 돌아가신 할아버지[皇祖]가 뜰에 내려오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서 일을 하였다. 지난번에는 성황이 무너지고 기울어지는의 운을 만나, 동량(棟樑)이 퇴락하는 것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으며, 비바람이 그 담장과 벽에 스며들었다.
아! 세월이 그 얼마던가. 잡목[荆榛]이 그 담장이 없어진 뜰을 막고, 부러진 꽃과 나무가 (길을 막아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날은 저무는데 어느 곳에 가서 휴식을 취할까. 매번 이슬 밟아야 하는 새벽에 많은 감정이 있다. 땅에 그 재각의 밝고 항상스러움이 없어 제사지내는 저녁이면 눈물을 흘린다.
이때에 종족원들에게 공평하게 하여 업무를 정하고, 그 후손들이 협력하여 일을 맡기고, 일을 할 때에는 먹줄을 가지런히 하고, 도끼를 바로잡고 옛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여, 돌무더기는 피하고, 지세가 높고 트이며 건조한(爽塏) 부분을 취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옮겨 자르고 쪼개서 기둥과 서까래를 세우고, 길고 크게 하였다[有梴有閑]21). 방에 들어서면 오르내리는 신이 문호(門戶)에 계시는 것과 같으니, 추모하는 마음 더욱더 부지런하다.(愈勤) 백양(白楊)나무가 늙을 때까지22) 오랜 세월 동안, 마땅히 좋은 노래를 일으키니, 풍수가(靑烏)가 와서 그곳이 좋은 땅이라 점복하였다. 이에 장엄하며 굉장한 규칙과 명령, 좋은 시절이나 계절(令辰)을 잡아 날짜를 잡았다. 들보를 닦고 이를 들어 올렸다.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뻗치니, 훤히 내다보아 여러 집안사람들이 일에 종사하여 변함없이 이를 끌어들이니 오로지 효도로 향기로이 따르니, 이것이 영원히 무궁하리라. 들보를 서쪽으로 뻗치니, 감히 도솔가를 찬하니 경제(景禔)를 축하한다. 10년 동안 경영한 것을 이제야 끝마치니 우리 군자와 더불어 다 함께 부르네. 들보를 남쪽으로 뻗치니, 우리 가문 형제들 대대로 화목함을 즐기네, 미물일지라도 진정을 시켜 위로하여 서로 더불어 즐거워 하니, 새로이 집을 지은 것을 축하하며 재잘 거리네. 들보를 북쪽으로 뻗치니, 탁 트인 곳에 서서 구름을 부르니 마치 질서정연한 듯하네. 이와 같은 기이한 절경은 마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네. 물은 더욱 많아져 넘치고 산은 색을 더해가네. 들보를 위로 뻗치니, 밤이 와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니, 오로지 조상님이 천제를 모시고 후손들(雲仍)을 돌보는 듯 하네, 오복성은 높고 화를 부르는 길은 막히네. 들보를 아래로 뻗치니, 하루 종일 같이 기뻐하고 옥 술잔이라 부르네, 혹 떠돌아다니는 먼지가 정갈한 집에 떨어질까 염려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비를 들고 항상 깨끗하게 하네.
바라 건데 상량한 이후에 위로는 선조의 영혼을 편안히 하며, 아래로는 자손들의 경사가 열리도록하고, 동량을 견고하게 하고 산하가 긴것과 같이 하며, 창문에 밝게 비추는 것은 해와 달이 호응하여 비추는 것이니, 사계절 내내 극진하여 만년토록 공경할 것을 생각하라.
광무 9년 을사 3월 상한에 10세손 한기석(韓琦錫)이 삼가 기록하다.
禮莫重於奉先 宜建享祀之所 孝不匱於錫類 幸有繼承之 休營是幾年 修自今日伏惟 龜筮載協 規模益新 瞻彼 肖孫以董其役 念玆皇祖 如降于庭 頃者 運値城隍之覆傾 愁見棟樑之頹落 風雨侵其垣壁 嗟 歲月之幾何 荆榛塞其牖庭 傷花樹之遅 暮向何而休息 每多感於履露之晨 無地其齋明常 垂泣於薦裸之夕 於是詢于宗族 而定謀襄 其子姓而協力責工 任事儼繩墨 而正斧斤 捨舊圖新 去磊砢 而就爽塏 遷松栢而是斷是度 立楹桷 而有梴有閑 入于室堂 陟降之神 如在出于門戶 追慕之心愈勤 白楊得老於永年 宜興善頌 靑烏來 卜其吉地 迺壯宏規 令辰載涓 修梁斯擧 兒郞偉
抛樑東 善見諸宗 就役同 勿替引之 惟孝道 苾芬從此 永無窮 抛樑西 敢贊兜歌 祝景禔 十載經營 今告落 喚吾君子 与同躋 抛樑南 吾門兄弟 共和湛 慰熟微物 如相樂 燕賀新成 奏語喃 抛樑北 踈立雲皐 斯翼翼 惟此奇絶 如畵裡 水增淸溢 山增色 抛樑上 夜來倚檻 觀天象 惟祖侍帝 助雲仍 五福星高 除禍障 抛樑下 盡日同懽 稱玉斝 恐或游塵 落淨軒 使人奉箒 常淸灑
伏願 上樑之後 上安祖先之靈 下開子孫之慶 棟楹之鞏固 等山河之長 牎牖之煥明 應日月之照 四時克享 萬年惟欽
光武九年乙巳三月 上澣 十世孫琦錫 謹記
3. 신정 수구당 중창 서실기(守邱堂重創叙實記)
우리 첨정부군(僉正府君; 韓贇)의 후손들은 매번 당에 오를 때마다, 그곳에 있는 편액을 바라보면서 부군(府君)의 평생의 이력과 사행(事行)을 다시 뒤돌아보면, 마치 궤안(几案)사이에서 공의 기침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효제(孝悌)와 충의한 마음이 뭉게뭉게 스스로 일어나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공경함이 일어나고 그치는 것이 있게 된다.
무릇 효는 어버이를 섬김에서 시작되고, 임금을 섬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효가 옮겨지면 충(忠)이 되는 것이니, 끝과 시작은 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신하와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크고 훌륭한 덕을 가진 군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임금은 마땅히 관대히 봐 주는 관가(寬假), 친절하게 받아들이거나 내버려 두는 우용(優容)으로 천하의 충과 효를 권장해야 한다.
오호라, 첨정공과 같은 이는 임금과 부모에게 충과 효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곤란함으로 그 뜻을 다하지 못하였다. 공의 휘는 한빈(韓贇)이고 자는 미숙(美叔)이며, 시직(侍直)을 지낸 상헌(愓軒)공23)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남다른 성품이 있어, 임신하기 전에 집에 빛이 있었다.
학문의 연원이 바르니, 사계선생[沙溪 金長生]에게 나아가 배워 전심으로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예(禮)에 대해서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많은 질문을 하여 선생이 예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백강(白江) 이상공(李相公)24)이 평소 공의 재주와 식견을 알아, 특별히 연달아 음사(蔭仕)에 추천하였다. 공은 선비는 마땅히 평소에 수양을 쌓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藏器待時) 것이지 어찌 빠르고 늦는 것에 구애받겠는가하였다. 관직에 나가려고 하는 뜻에 급급해함이 없었다.
병자년의 난을 당하여 북쪽 오랑캐가 함부로 황제라 일컫는 것(僭號)을 듣고, 충의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분한 마음(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읊으니, 주(周)를 존중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겨울에 오랑캐의 기병이 갑자기 성 아래에 밀어 닥쳐, (임금이 몽진하였다는) 슬픈 조서가 서글펐다. 공은 조서를 받들어 읽고 울면서 “군부가 몽진(蒙塵)하였으니, 나는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다.
백형(伯兄) 정안공(靜安公)25), 족숙 판관 한경생(韓慶生)26)과 함께 부의방략(赴義方畧)을 정하고 가동을 이끌고 군량을 모았다. 주변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달하고, 이흥발(李興浡)27) 등을 만나 합세하니 충간의첨(忠肝義瞻)으로 일당백이 아님이 없었고, 군성(軍聲)이 크게 떨쳤다.
과천에 이르러 독전어사(督戰御史) 김경여(金慶餘)28)를 통해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계달(啓達)하니, 전교하기를 “벼슬하지 않은 평민의 신분(白衣)으로 적에게 맞선 것은 그 의로움이 가상하다”고 하였다.
밤에 광교산(光敎山)29)을 습격하여 적진을 격파하고 수백명을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주변의 여러 의병장들은 모두 공의 충용과 재략을 추천하여 날을 정하여(剋日) 미친 오랑캐를 소멸시키자고 하였다. 갑자기 화친이 이미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병사를 파하였다.
문학(文學) 이경상(李慶相)30)과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에 들어갔다. (심양) 질관(質館)의 곁에서 오랫동안 생활(久處)하면서, 이곳저곳 떠돌며 아주 고생하였으나, 마음을 분발(奮發)하며 성질(性質)을 굳게 참아 울분을 떨치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옳다는 생각(朝聞夕死)으로 생활하였다.
오히려 오랑캐 가운데 있으면서 풍토와 언어, 지리(地鎭) 등의 형태뿐만 아니라 기술과 재주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장상과 우두머리들의 재능이 있음과 없음(能否)에 이르기까지 익혔다. 입으로는 오로지 강역(講易)을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믿음에 충실(篤實)하였다. 오랑캐 사람들도 또한 그 의로움에 감동하였다.
돌아와서는 조용히 천막(幄) 안으로 들어가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구할 계책을 명확하고(歷歷) 상세하게(備陳) 몰래 찬술하였다.
아, 간사한 자는 뜻한 바를 얻기 위하여 남을 헐뜯어 올라가고자 하지만, 충의로운 선비는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 그때의 운수가 좋지 않아 그가 가진 바를 모두 펼치지 못하였다.
이때 향리로 돌아와 오로지 조용히 생활하면서 어은동에 집 한 채를 짓고, 스스로 수구(守邱)라 이름 하였다. (수구라는 의미는) 대개 선대가 살던 곳(先邱)에 거하면서 보호한다는 것이니, (선대에 대해) 제사를 받드는 것(薦苾)에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성리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寬樂). 심지어는 서적에 황명(皇命)의 연월을 크게 쓰기도 하였고, 혹은 달밤에 술에 약간 취하여 말이 남한산성의 옛 일에 이르게 되면, 깊은 산에 들어가 피 눈물을 공중에 뿌리니 상자 속에 든 담비가죽과 같았다.
(공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으니, 첫째는 휘 한성오(韓省吾; 1612~?, 1662년 생원) 창주공(滄洲公)이고, 다음은 한경오(韓儆吾; 1619~?, 1648년 생원)로 용와공(傭窩公)이다. 조카로는 한양오(韓養吾; 1626~?, 1646년 진사) 반환공(盤桓公)과 한정오(韓正吾; 1619~?, 1657년 생원) 이안공(怡顔公)은 모두 문장과 경학에 밝고 착하 행실(經行)이 그 당대에 이름이 높았는데, 모두 공이 채찍질을 하듯 격려한(責勉)한 공이다.
매번 주부자(朱夫子; 주자, 주희)의 위패를 설치해 놓고 여러 유학자들[章甫]과 함께 향음례를 행하니 멀지 않아 좋은 풍속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기 까지 그 유풍이 남아 있다. 불행하게도 당우가 강한 바람(風母)에 들어 훼손되자, 후인들이 탄식하면서 황폐해진 것을 가리켜 이곳은 한수구공(韓守邱公 ; 한빈)의 유허(遺墟)이다. 자손들이 보잘 것 없는 처지가 되어(零替) 아직 계승하여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니 어찌 부끄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지난 을사년(1905) 봄에 후손 한규서(韓圭瑞)와 단문(袒免)31)의 친척인 한규봉(韓圭俸)이 바야흐로 열심히 노력하여 중건하기로 하였다. 이내 부군(府君)의 의관이 묻힌 권가동(임실읍 망전리 가동)에 천문(景緯)을 헤아리고 기추를 재단하여 여러 공인들을 격려하여 재각을 완성하니, 우뚝 서게 되어, 옛것과 비교하여 완공하였음을 고하였다. 꾸밈은 더하였으나 사치하지 않았다.
감히 보잘 것 없는 말로써 선송(善頌)을 대신한다. 땅은 마치 신령함을 내린 것과 같으며, 하늘은 응하여 복을 내리는 것 같다. 선대를 추념하거나, 성현을 앙모하는(羹墻)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은 정결하게 하였다. 또 별의 보호를 받아 채색을 베푸니 동쪽으로 돌아보니, 이잠(尼岑)이 어둠속에 드리워져 양양(養養)한 색이다. 서쪽으로 돌아보니 덕간(德澗)은 멀리서 떠오르고 콸콸 흘러가는 소리 좋구나. 정령들이 기뻐하여 오르내리는 구나.
지금 오로지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어른이 그 일의 사실을 서술32)하여 후진들로 하여금 선배를 흠모하고 학문에 뜻을 두게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즉 어찌 일문의 아름다움에 그치겠는가.
한용하(韓容夏), 한용화(韓容華), 한용필(韓容弼), 한규호(韓圭晧), 한창석(韓昌錫), 한기석(韓基錫), 한정석(韓正錫) 등이 삼가 힘써 일을 끝내니 여러 후손들이 다투어 생각하고 힘을 내니 이것이 모든 바로 굳게 지켜야할 마음이니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凡堂之有興有廢 亦由於苖裔 修之悖之 可不懼哉 不願僣妄 累綴先蹟 攸載追述 移建顚末 門長淀氏 執觥而喜曰 病粍獲睹 斯堂之復作 餘慶未艾 益懋孝友睦婣 俾彰先德云爾
무릇 건물의 흥함이 있고, 폐함이 있는 것은 또한 후손들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니, 그것이 다스려지고 어그러지는 것을 가히 염려하지 않겠는가. 간사하고 허망함(僣妄)을 돌아보지 않고 선대의 행적을 엮어서 글을 짓고, 또 옮겨 지은 전말을 기록한다.
문장(門長) 한정(韓淀)씨가 술잔을 잡고서 기뻐하며, 병이 깊은데 이 사당이 다시 중건되는 것을 보게 되니 남아 있는 경사가 다하지 않았으니, 더욱 효우에 힘써 친족과 화목하여 선대의 덕을 더욱 드러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오년(1906) 11월 하한에 10세손 한경석이 삼가 쓰다.
維我僉正府君後孫 每於登堂之時 瞻其所扁額 追想府君平生 履歷事行 如承警欬於几案間 而使孝悌忠義之心 油然自生 有不覺起敬 而止矣 夫孝始於事親 終於事君 移孝爲忠 終始不渝 盡臣子之職者 非盛德之君子 能若此乎 人君所當寬假優容 勵天下之忠孝也 嗚呼 若僉正公者 欲盡忠孝於君親 而困不得其志也 公諱贇 字美叔 侍直愓軒公之子 生有異質 胚胎前光家 學淵源有素矣 贄謁沙溪先生 專心承誨 多有質問疑禮 先生稱以好禮 白江李相公 素知公才識 特薦連除蔭仕 公曰 士當藏器待時 何拘早晩 無汲汲 就職之意 値丙子之亂 聞北胡僭號 不勝忠憤 詠詩有寓尊周之義 冬虜騎猝迫城下 哀詔惻怛 公奉讀泣曰 君父蒙塵 余得死所矣 與伯兄靜安公 族叔判官慶生 定其赴義方畧 率家僮治兵糧 傳檄列邑 遇李興浡等合勢 忠肝義瞻 無不一當百 軍聲大震 至果川 督戰御史金慶餘 啓達此由 傳曰 白衣赴敵 其義可尙 夜襲光敎山 破賊陣 斬獲數百 彼諸義將 咸推公忠勇才畧 擬謂剋日 掃滅狂胡矣 遽聞和事已成 痛哭罷兵 同李文學慶相 陪昭顯世子入瀋陽 久處質館之側 流離辛苦 動忍拂鬱 以朝聞夕死爲念 而尙此習知其虜中 風土語譯 地鎭之形 及技藝長短 將相頭目之能否 口惟講易不輟 篤實自信 虜人亦感其義也 及還從容入幄 歷歷備陳密贊 討復之策 噫 險人得志 謗議旋騰 忠義之士 鉗口無言 時運不利 未能展其所蘊 於是退歸鄕里 專事自靖 搆一堂于漁隱洞 自號曰守邱 盖處守先邱 盡其薦苾之誠 磨礱性理 而寬樂焉 至於書籍特書 皇命年月 或月夕微醺 語及南漢故事 窮山血淚空漬 箧裏之貂裘也 二子有若諱省吾滄洲公 儆吾傭窩公 及其侄養吾盤桓公 正吾怡顔公 俱以文章經行爲一世矜美 皆公責勉之功 每設朱夫子位 而率諸童甫 行鄕飮禮 遠邇遄化善俗 至于今 賸有其流 風餘韻矣 不幸堂宇 入於風母所燬 後人嗟指荒蕪 曰此則韓守邱公遺墟也 子姓零替 未克嗣守 可勝羞哉 去乙巳春 後孫圭瑞 與袒免之親圭俸 始克宣力 亟圖重建 乃就府君衣冠所臧 勸佳洞 揆景緯 而裁基 趨衆工 而齊事 巋然 告成比舊 增餙亦不過侈 敢將菲辭 庸替善頌 地若效靈 天應降福 羹墻寓而致潔 又星護而旋彩 東睠則尼岑暗獻 養養之色 西顧也 德澗遠揚 㶁㶁之聲 庶幾 精靈欣悅陟降焉 今維心石宋文丈叙 其記實之事 使後進興起 慕先向學之心 則奚止一門而美哉 容夏 容華 容弼 圭晧 昌錫 基錫 正錫 勤敏完事 諸孫爭思出力 此皆秉彛之心 自然也 凡堂之有興有廢 亦由於苖裔 修之悖之 可不懼哉 不願僣妄 累綴先蹟 攸載追述 移建顚末 門長淀氏 執觥而喜曰 病粍獲睹斯堂之復作 餘慶未艾 益懋孝友睦婣 俾彰先德云爾
柔兆 敦牂 至月 下澣 十世孫 敬錫謹識
대방(帶方; 남원)의 치소 북쪽에 어은(漁隱)과 권가(勸佳) 두 개 마을은, 이곳은 즉 상당 한씨(上黨 韓氏; 청주 한씨)의 선영(邱墓族位)들이 있는 곳이다. 올해(1906) 음력 10월(小春)에 한백도(韓伯道)가 와서 나[心石子; 송병순33)]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에 휘(諱) 한빈(韓贇)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일찍이 사계선생(沙溪先生 ; 김장생)의 문하에 나아가서 공부하며, 예학에서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서 자주 질문하니, 선생께서 예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 추천(道剡)을 받기도 하였다. 백강 이 문정공(白江李文貞; 문정공 이경여)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특별히 참봉(除齋)에 천거하였으며, 벼슬이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에 이르렀다.
병자년의 건주 오랑캐[建虜 ; 建州女眞]의 난리(병자호란)가 일어나자, 탄식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千秋尊統義 길고 오랜 세월 의로움을 높이 사 왔구나. 誰有魯連風 누구에게 노련(魯連34))의 풍모가 있겠는가.
이어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싸움에서 이겼다. 문득 화친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병사를 해산하였다.
문학(文學) 이경상(李慶相)과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위하여 심양에 들어가 질관(質館)의 곁에서 오랫동안 거처하였다. (이때에) 일찍이 험한 운명과 구사일생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 와중에도) 오랑캐인들 기예의 장단과, 장수와 재상의 능력 여부 등을 파악하고, 돌아와서는 조용히 장막안으로 들어가서 분명하게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책략을 아뢰었다. 시운이 불리하여 그가 본디 쌓아 놓았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서는 어은동에 있는 선대의 묘소 아래에 당우(堂宇)를 축조하고 편액하기를 수구(守邱)라 하였다. 이것은 선대의 무덤을 지키며, 도의를 강의하는 의리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항상 주부자(朱夫子; 주희)와 율곡(이이) 사계(김장생) 두 분 선생의 위폐를 모시고, 여러 유학자들(章甫)과 함께 엎드려 절하고, 뒤에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좋은 풍속을 이끌어, 지금도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어,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오는 풍속은 그 향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건물은 수풀이 우거지는 바가 되어 곤궁해져 폐허가 되어, 뒷사람들이 탄식하게 되었다. 이내 권가동의 선영 아래에 중건하여 새롭게 하였다. 높고 화려한(奐輪) 규모는 이전보다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서 부족한 것은 그 사실을 기록한 하나의 글일 뿐이다. (그러므로) 바라 건데 우리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여 그것을 꾸며달라고 (한백도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궐연(蹶然)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좋구나. 수구공의 후손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의 집안을 보건데 후손들이 선조들의 옛 일을 능히 보전하기가 어려우며, 계곡과 산의 경치를 즐기기 위해 지은 누각이나 정자(臺榭)는 왕왕 허물어지고 황폐해지면 다시 짓지 않는다. 비록 이찬황35)의 평천(平泉)장이나, 배진공(裵晋公)36)의 녹야(綠野)장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모두 선대를 잃어버렸기에 그러한 것이다.
지금 한씨들은 정성과 힘을 다해[殫竭誠力] 선대의 일을 이어 받아 성공시키니[肯構肯堂] 이것은 진실로 선대의 유업을 지키고자 하는 아름다운 일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함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건물을 짓는 한 가지 일만을 좋게 여기는 것은 좋지 않다.
매번 당에 오를 때에는 첨정공께서 선대를 받들어 제사 받드는 정성과, 도를 강의하고 예의를 익힌 훌륭함을 흠모하고 따라하였으니,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이곳은 실재로 그 현조의 의관을 보관했던 곳이니, 즉 마땅히 공경하고 삼가며 감히 나태할 수 없다. 한씨 여러분들은 생각할 지어다. 나는 병이 있어 말을 줄이고, 대략으로 다듬을 수 없어 말로써 당(수구당)의 흥함과 폐함의 전말을 이처럼 기록하며, 산천과 경치의 형승에 대해서 까지는 서술할 겨를이 없어 서술하지 않는다.
병오년(1906)에 송병순이 쓰다.
帶方治北 漁隱 勸佳二洞 卽上黨韓氏 邱墓族位之地也 是歲小春 韓君伯道 來謂心石子曰 吾先祖有諱贇 嘗贄謁沙溪先生之門 多質問疑禮 先生稱以好禮 屢登道剡 白江李文貞 判銓曺時 特擧除齋 卽官至司䆃寺僉正 値丙子建虜之變 慨然詠詩曰 千秋尊統義 誰有魯連風 仍擧義夛有捷 獲聞媾成 痛哭罷兵 同李文學慶相 陪昭顯世子入瀋陽 久處質館之側 備嘗險釁 九死靡悔 習知虜人之技藝長短 將相能否 及還從容入幄 歷歷陳奏 㕥獻討復之策 時運不利 未能展其素所蘊蓄 退歸鄕里 築堂宇漁隱 先隴之下 扁曰守邱 盖處守邱隴 講明道義之義也 每設朱夫子 及栗沙二先生位 與諸章甫展拜 後行鄕飮禮 以導善俗 至今傳誦 其遺韻賸馥矣 堂入於鬱攸 鞠爲荒墟 後人齎咨 乃就勸佳塋下重建 㕥新之 其奐輪之制 視舊有增 而所欠者 一記實之文也 願吾子不恡 片辭以賁之 余蹶然作而歎曰 善哉 守邱公之後承也 余觀人家 雲仍鮮能保 有祖先之舊業 至於溪山臺榭之勝 往往圮頹而不治 雖以李贊皇之平泉 裵晋公之綠野 亦未免他人之所有 此皆繇於忘先而然也 今韓氏殫竭誠力 肯構肯堂 此固嗣守之美事 令人起欽也 然毋徒以堂構一事爲美 每於登堂之時 慕效僉正公 奉先薦苾之誠 講道習禮之懿 則尤不亦善乎 嗚呼 維玆之邱 實其賢祖衣冠之所藏 則宜其敬止 而不敢懈矣 韓氏諸君子念哉 余不以病耗辭畧綴 口語以識堂之興廢顚末 至若山川雲物之形勝 有不暇述焉
柔兆 敦牂 月 日 德殷 宋秉珣 記
각주 19) 조선후기 한빈(韓贇)의 호이다. 본관은 청주. 시직 응록(應錄)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계 김장생을 사사하여 예학을 배웠다.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다가 화의(和議)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돌아와 해산했다.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에 들어가 인질로 있는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며, 돌아온 뒤 조정에 들어가 토복책(討復策)을 건의하였다. 20) 조선후기 한빈(韓贇)의 호이다. 본관은 청주. 시직 응록(應錄)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계 김장생을 사사하여 예학을 배웠다.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다가 화의(和議)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돌아와 해산했다.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에 들어가 인질로 있는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며, 돌아온 뒤 조정에 들어가 토복책(討復策)을 건의하였다. 21) 『詩經』 「商頌」 殷武 참고. 22) 張籍의 野田이란 시에서 漠漠野田草 草中牛羊道 古墓無子孫 白楊不得老. 23) 侍直을 지낸 韓應錄을 말한다. 24) 이경여를 말한다. 이경여는 본관은 전주. 자는 직부, 호는 백강·봉암. 아버지는 목사 수록이다. 효종 1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25) 한황(韓貺)을 말한다. 한황의 자는 受而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安襄公 終孫의 6세손이며, 어모장군 應祿의 아들로 1574년 지금의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 26) 한경생의 자는 子善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淸城君 終孫의 5세손이며, 승지 輹의 손자이며, 應文의 아들로 지금의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 27) 자는 油然, 호는 雲巖. 본관은 한산. 전북 전주 출신.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진사 克誠의 아들이며, 起渤, 生渤의 형이다. 28) 본관 경주. 자 유선(由善). 호 송애(松厓). 시호 문정(文貞). 이귀(李貴)의 사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2)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29)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와 용인시 수지구에 걸쳐있는 높이 587m의 산. 30) 호는 黙菴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비서관으로 심양에 갔다가 돌아올 때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왔다. 31) 袒은 '웃옷 벗을 단' 이며 免은 이 경우에는 '면할 면' 이 아니라 '상복 문' 임. 32) 송병순이 중건기를 쓴 것을 말하는 듯 33) 송병순(1839~1912),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 대전시 회덕(懷德) 출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 34) 魯仲連을 말함. 중국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장군. 35) 본명은 李德裕(787~849). 당나라 헌종대의 재상인 李吉甫의 아들로 태어나 무종 때 재상을 지냈다. 그의 별장인 平泉莊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36) 본명은 裵度(765-839), 당나라 때의 정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