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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남산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청웅면 남산리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0개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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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청웅면 남산리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0개 걸려있다.
 
 
 

1. 남산 영모재기(永慕齋記)

 
다음과 같이 기술하노라. 건물의 처마 밑에 ‘永慕’라는 간판을 걸어둔 뜻은 어디에 있는가. ‘永’字에는 ‘오래 되었다.’는 의미가 있으며, ‘慕’字에는 ‘잊지 말라.’는 뜻이 새겨 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원히 효도를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한 발자국을 띨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무릇 뿌리 없이 가지나 입이 나는 나무는 없으며, 근원이 없이 이곳 저곳을 흐르는 물은 없는 법이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先祖들에게 있어 나무의 가지나 입사귀와 같은 존재요, 물의 흐름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가지나 입사귀 또는 흐름이 된 자들이 어찌 뿌리나 물의 근원을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한 즉 진정한 효에 대한 독실한 마음은 선조들에게 멀리 떨어질수록 더욱 깊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후손들의 도리이다. 생각건대 우리 천안전씨의 씨족은 백제시대의 歡城伯 이후로 몇 왕조를 거쳐 오는 동안 충효에서, 공훈에서 결코 보통 사람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우리 씨족을 잠영고가라고 불렀는데, 그러한 사실은 역사책이나 혹은 족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굳이 그러한 사실을 번거롭게 들추어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의 13대조 할아버지가 되시는 학생공 諱 有慶께서 처음 이 고을 임실에 존거하셨고 9대조인 봉사공 휘 得龍 할아버지께서 이 지역 구례동 간좌 들판에 처음 묘를 쓰신 이후 후손들도 대를 이어 장사를 지내어 구릉을 만들고 각자의 업을 수행한 지가 이미 300년이나 되었다. 그러니 후손으로서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에 어찌 슬픈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이에 지난 계유년에 비로소 이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하지만 자손들은 가난하여 넉넉지 못한 반면 건물을 짓는 과정은 힘들고 또 비용도 많이 들어, 능히 건물을 화려하게 만들지도 못하였다. 심지어는 풀이 그늘을 만들고 흙이 담을 정도로 초라하다. 하지만 먼 조상을 추모하고 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이후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가 되어 묘를 찾게 되면 언제나 이 집에 올라와 머물렀으니, 누군들 履霜感露의 회환이 마음 속에서 저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그날의 마음이 계속하기를 바라며 이 들을 쓰니, 후손들이여, 앞으로 수 천 년, 수 백 년 동안 옛날 선조들이 이 집을 짓느라고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집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 하기를 바란다.
 
 
棟宇刱成歲月遲  집을 처음 짓기 시작한 지 참 오랜 세월이 지났구나.
後來紹述敢爲思  후손들이 우리들이 겪은 어려움을 어찌 생각이나 할까.
邱壟松楸瞻仰地  언덕 위 소나무를 보니 가지가 땅에 닿고 있네.
春秋霜露感懷時  봄과 가을 이슬과 서리가 내리면 조상이 더욱 생각나네.
承其世世箕喪業  오래토록 선조들의 喪業을 이어 가고 잊지 않고.
薦此年年享祀儀  매년 언제나 조상에 대한 향사의 의식이 계속되기를 바라네.
欲知忠孝齊家意  우리 집안의 충효와 수진 제가의 모습을 알고 싶은가.
字字分明墓道碑  묘도비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 마다 그 내용이 분명히 적혀 있다네.
 
 
기유년 모춘 상한에 9대손인 참봉 周宅이 삼가 쓰다.
 
 
 

1.1. 永慕齋記

 
述夫齋以永慕揭楣者 寓意何在焉 永者久遠之謂也 慕者不忘之意也 古人云 永言孝思 又曰一擧足而不敢忘 夫木無無根之枝葉 水無無源之派流 人之於祖先亦是枝葉也派流也 則爲其枝葉派類者 豈可忘根而忘源乎 然則誠孝之篤 愈久而愈深 於祖先者 是乃後昆之道也 惟我天安全姓氏族 自百濟歡城伯 以後閱歷數朝 忠孝也勳業也 不在人後世稱簪纓 古家載在國乘 刊在譜卷 則不必疊床 而至於十三世祖 學生公諱有慶 始尊居玆鄕 至于九世祖 奉事公諱得龍 塋域於此求禮洞艮坐原 而後仍世葬邱壟成行業 已三百餘載矣 其於後昆 追遠之道 寧不感愴哉 玆庸頃在癸酉 始建此齋 而弱子殘孫 事巨力綿 不能壯麗 而茅蔭土築 然惟其永慕之意 則一也 每於享祀之日 省楸之行 登臨此齋 則履霜感露之懷 孰不油然自生于中也 庶以此日之心 繼以述之 則後來數千百載 不墜祖先 古昔成立之難矣 勉之勉之
 
棟宇刱成歲月遲 後來紹述敢爲思 邱壟松楸瞻仰地 春秋霜露感懷時
承其世世箕喪業 薦此年年享祀儀 欲知忠孝齊家意 字字分明墓道碑
 
己酉暮春上澣九代孫 叅奉周宅謹稿
 
 
 

2. 남산 전씨 영모재에 제함(題全氏永慕齋)

 
裔孫相誠我今遲  후손들이 들인 정성에 나는 지금 늦게라도
聊作殘詩寄遠思  애오라지 몇 글자 적어 그 분들을 멀리 생각하네.
更認文人追往迹  다시 한 번 훌륭하신 분들의 자취를 생각해 보니.
已欽賢祖聞當時  현조들이 당시에도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구나.
早揭齋顔知孝義  걸려 있는 재각의 현판을 보니 후손들의 효의를 알겠고,
應瞻堂斧想風儀  무덤을 바라보며 선조의 風儀를 떠오르네.
玉同洞裏耕樵老  옥 같이 깨끗한 곳에서 밭을 가는 樵老들이
百許年來誦口碑  선조들의 덕을 백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외워오네.
 
기유년[屠維作噩之歲] 봄 3월 운람생(雲藍生) 하동(河東) 정현봉(鄭鳳鉉)
 
 
 

3. 남산 영모재에 韻함[永慕齋韻]

 
每過禮洞我遲遲  매번 예동을 지날 때마다 내 몸이 느려지네
不肖何言敢孝思  불초한 내가 어찌 감히 효를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邱壠成行經累世  언덕에 선영을 만들기 시작한 지 이미 여러 세대가 흘렀네.
杉松連抱養多時  삼나무와 소나무가 재 안에 있는 영령들을 보호하네.
羹墻如在欽神道  선조들이 계신 듯 그리워하며 신도(神道)를 흠모하네.
冠冕相承覽德儀  벼슬이 계속 이어지는 속에서 조상들의 훌륭한 모습을 보네.
乘雨藍風磨洗日  비와 함께 불어오는 남풍 속은 해를 갈고 씻고,
後仍指點淚應碑  후손들은 손으로 점점히 집어보며 눈물짓네.
 
隆熙三年己酉暮春後孫 徹淳謹稿 융희 3년 기유년 모춘에 후손 철순 삼가 쓰다.
 
 
 

4. 남산 영모재(永慕齋)

 
經之久矣揭之遲  지은 지는 오래 되었건만 현판은 늦게서야 걸었네.
不肖何言萬一思  내 어찌 萬分之一이라도 조상의 은혜를 생각했다 할 수 있겠나
老大杉松曾幾歲  늙고 커다란 杉松은 이미 몇 해나 되었는가.
凄零霜露已多時  쓸쓸하게 내린 차가운 서리에 이미 오랜 시간이 스며 있네.
世居東土承先蔭  동쪽 땅에 세거하면서 선조들의 음덕을 이으며,
家有吉毪守舊儀  집집마다 吉毪를 지니면서 옛 풍속을 지키네.
杏雨藍風能蝕字  봄비와 가을바람에 글씨에 좀 슬었으니
凄然手讀錄苔碑  처량하게 손을 집어가며 이끼 끼인 비문를 읽어 가네.
 
歲在庚戌暮春九代 孫鳳宅謹稿 경술년 모춘에 9대손 봉택이 삼가 쓰다.
 
 
 

5. 남산 영모재기(永慕齋記)

 
무릇 하늘과 땅 두 곳 사이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반드시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생각하건데, 머리는 둥글고 발은 네모졌으니, 먹는 것과 입는 것[穀腹絲身]이 만물과 다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말하기를 아니다. 특별히 그 하늘이 부여한바 오상(五常; 인, 의, 예, 지, 신)의 성품이 있어 사람 된 바의 도리를 알기 때문이다. 대저 오상의 최고는 삼강이다. 삼강의 최고는 부자(父子)이다. 이미 부자가 있기 때문에 지맥(支脈)이 있는 것이다. 이내 말하기를 할아버지를 손자라 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한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고,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진 것이니, 이어진 것이 오래된 것이니, 그 세력이니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손자된 자로써 그 할아버지를 잊는다면 어찌 가히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곳 묘의 아래에 재각을 두고 그것을 영모(永慕)라 이름 지었으니, 어떻게 그 의리를 밟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재각에서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가시나무가 종횡으로 얽히고, 여우와 토끼가 뛰어다니니 슬프고 비참할 뿐이다. 어둠과 밝음이 서로 단절되고, 구롱(邱壠)이 옮기어 변하였으며, 소나무와 잣나무가 소소(蕭蕭)하니, 즉 술잔을 올리는 제사가 어렵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빈조(蘋藻)로 간략하게 마련하니, 어찌 장차 일어날 일을 염려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일에 이르게 됨을 이기지 못하고, 우양(牛羊)의 책임이다. 도끼를 금지시키는 것이 도리상 마땅함이다. 당연히 일에 맞닥뜨려서는 강요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행하는 것이며, 뒤에 교체하지 않으면 즉 영모라는 의미에 거의 근접하지 않겠는가.
 
아. 석만(錫萬)의 사모함은 더욱 여러 종원들보다 많았다. 무릇 이 건물이 뛰어나니[輪焉 奐焉], 이내 선군자의 주로(周魯)이다. 봄 가을의 제사지내는 날에, 바람 불고 비 오는 저녁에 이곳에서 잠을 자고, 엎드리고 우러러보는 건물에서 일어난 즉 차라리 같은 마음으로 선대의 업적을 이어받는[肯搆] 도리가 아니겠는가. 내가 이와 같이 기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빛내기 위한바가 아니다. 연이어서 스스로 서약하고 또 서약한다. 후손들은 이어 받고 이어서 삼가서 냉대하지 말고 간과하지 말고 삼갈 것이다.
 
零丁後葉近捷遲  외롭고 쓸쓸한 남은 잎은 머무는 것에 가까우며
每此登臨有所思  매번 이곳에 오르면 생각하는바가 있네.
草樹千年觀地理  풀과 나무는 천년동안 지리를 바라보고
露霜一夜愴天時  이슬과 서리 내리는 밤에 천시를 슬퍼하네
奐輪爲頌追先志  뛰어난 건물 칭송하니 선대의 뜻 이어받음이라.
芳苾直羞奠享儀  아름답고 아름다운 제물(祭物) 올려 제사 드리니
苟使雲仍能繼述  진실로 후손들이여 능히 이어 갈지어다.
萬春嘗羞蕩然碑  일만년 뒤에도 이어져 비석은 우뚝하리라.
 
융희 3년 기유(1909) 모춘 초길일에 10대손 석만(錫萬)이 삼가 기록하다.
 
 

5.1. 永慕齋記

 
夫玄黃二殼之間 最貴者 必謂之人 何也 抑以頂圓足方 穀腹絲身 有異於萬物而然歟 曰非也 特以其天之所賦五常之性 有知於爲人之道也 盖五常之最 三綱也 三綱之最 父子也 旣有父子 則扶於是泳 於是而乃曰祖曰孫焉 雖是一根之孼 一源之流 而傳之愈久 則其勢也 曷乎忘矣 以其孫而忘其祖 則豈可曰人也 此所以齋於墓下 而名之曰永慕也 何以則可踐其義 而無愧於齋歟 荊棘縱橫 狐兎跳躍則愴 幽明之相殊 邱壠遷變 松柏蕭蕭 則艱作酒之需 降霜露 旣修蘋藻略設 則懼將事之 不克至若 牛羊之責 斧斤之禁 自是道理上
 
當然底事 而不待於勉强也 萬以是而牖後使之勿替 則永慕之義 寧不庶幾乎 噫 錫萬之慕 尤異於僉宗者存焉 凡此輪焉奐焉 乃先君子之周魯也 春秋之節 風雨之夕 寢於斯興於斯 俯仰棟宇 則寧不慨然 同念肯搆之道乎 余之記此 非所以耀人耳目也 聊以自誓且以誓 後生者 繼繼承承 愼勿以冷眼看過焉
 
零丁後葉近捷遲 每此登臨有所思
草樹千年觀地理 露霜一夜愴天時
奐輪爲頌追先志 芳苾直羞奠享儀
苟使雲仍能繼述 萬春嘗羞蕩然碑
 
隆熙三年己酉暮春初吉
十代孫 錫萬謹記
 
 
 

6. 남산 영모재서

 
무릇 사대부 집안의 재각이 무덤의 아래에 있게 된 것은 오래되었다. 그 실마리를 자세히 상고해 보면[夷考],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아닌지,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顧名思義]하면서 머무르는 것이며, 후손이 또한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고자 할 따름이겠는가.
 
대저 우리 천안 전씨의 최초의 시조에 대해서는 문헌으로써 증명할 수 없어, 뻔뻔스럽게도[長喙] 제멋대로 전거와 출처가 확실하지 않나 틀린 것이 많게[杜撰] 기록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백제의 환성백(歡城伯), 신라의 문정공(文正公), 문헌공(文獻公), 문건공(文建公), 무강공(武康公), 정선군(旌善君), 고려의 천안군(天安君), 무강공(武康公), 충숙공(忠肅公), 문정공(文正公), 무랑공(武郞公), 영평공(寧平公)이 있으며, 본조에 이르러서는 삼재공(三宰公), 부사공(府使公)은 모두 덕행과 훈업(勳業)이 많아, 세상의 추대를 받아 (우리 가문이) 높은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것이) 계속해서 이어져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어 우리나라[大東]의 이름난 가문[巨閥]이 되었다.
 
봉사공(奉事公)에 이르러서는 가득차서 넘치도록 풍성해[盛滿]져서 큰 바람을 이루게 되었다. (봉사공은) 멀리서 가족을 이끌고 운수(雲水; 임실)고을 석두리47)로 왔다. 그때를 헤아려 보니 벌써[倐忽] 300년이 지났다.
 
무덤이 연달아 이어지고, 풀과 나무사이로 봉분이 이어졌다. 지금과 옛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슬픈 감정이 들지 않겠는가. 선조를 추모하는 도리를 행해야 하는 곳에 합하여 1간 모옥(茅屋)이 있었다. 힘은 약하고 일은 크다는[力綿事鉅]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그대로) 경영하여, 황송하다는 한 생각을 왕래할 때마다 가슴에 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난 계유년 봄에 재종숙 치형(致亨), 삼종숙 후택(厚宅), 사종질 석풍(錫豊) 등이 모든 사람의 공론을 이끌기 시작하였으며, 나[愼宅]도 역시 이에 따르며 고심하였다. 점을 쳐서 힘에는 정도(正道)가 필요하다는 대장(大壯)의 좋은 괘를 얻어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재각이 완성되고 그 처마에 영모재(永慕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아! 영모(永慕)의 뜻은 어찌 쉬운 말이겠는가. 진실로 선조가 없었다면 반드시 그 후손도 없었을 것이다. 그 후손된 자는 반드시 없었을 것이라는 이치를 가슴에 새긴다면 마음을 안정하고 인내하지 않으며, 사모하지 않겠는가.
 
봄과 가을의 절기에 가시나무가 우거진 들판[荊榛之原]에 귀신(鬼神)의 분위기(雰圍氣)가 서려있어[焄蒿悽愴] 벌초할 때에 방황하는 행동이 일상이었으나, (이제 재각이 만들어져) 이곳에서 제사지내게 되어 보호하고 잃지 않게 되니 이것이 영원히 사모하는[永慕] 도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늙고 또 병이 들었으나, 욕심을 부려 힘을 내었으나 이때에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다만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이 이것을 이어서 힘쓰고 이룬다면 좋지 않겠는가. 조상의 뜻과 사업을 대대로 이어 나갈[繼述] 뿐이다.
 
기유년(1909) 3월 1일
9세손 승정원 좌승지 이조참판 전신택(全愼宅)이 삼가 쓰다.
 
 

6.1. 永慕齋序

 
夫士夫之齋 於塋下古也 夷考其凡紀 則顧名思義以寓 乃孫之慕焉 曷嘗以輪焉奐焉 爲人觀美而已哉 盖我天安之全 在昔鼻祖 文獻無徵矣 不可以長喙 妄加杜撰 而濟之歡城伯 羅之文正公 文獻公 文建公 武康公 旌善君 麗之天安君 武康公 忠肅公 文正公 武郞公 寧平公 逮夫本朝 三宰公 府使公 俱以德行 勳業篤 世所推 簪纓軒冕 次第蟬聯而蔚 爲大東巨閥矣 及夫奉事公 以盛滿爲成飄然 遠引而家 於雲水鄕石頭里焉 屈指顚末 則倐忽已三百餘年矣 邱隴成行 草樹連阡 俯仰今古 寧不愴感歟 其在追先之道 合有一間茅屋 而力綿事鉅 末由經紀 惕然一念 未嘗不 往來於胷臆矣 往在癸酉春 再從叔致亨氏 三從兄厚宅氏 四從姪錫豊甫 肇發大同之論 而愼宅亦從以周章 筮得大壯之吉 而訖工焉 齋旣成揭于楣曰 永慕齋 噫 永慕之義 豈可易言哉 苟非乃祖 則必無乃孫矣 爲乃孫者 銘肺於必無之理 則安忍乎 不慕乎 霜露之節 荊榛之原 焄蒿悽愴 瞻掃彷徨之行尙矣 而祭之如在 守之勿失 其非永慕之道乎 余旣老 且病矣 縱欲作力 於是而不能焉 只俟後生者 勉之成之 善乎 繼述也已
 
歲屠維作噩之暮春初吉 九世孫
承政院左承旨吏曹參判 愼宅 謹稿
 
 
 

7. 남산 영모재기(永慕齋紀)

 
오호라, 이곳은 우리 9세조 봉사공(奉事公)과 배위 이씨의 무덤이다. 영모재는 봄과 가을에 성묘를 마친 뒤에 쉬는 장소이다. 계유년에 만들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 사실을 기록하게 되었으나, 비록 늦었을 지라도 잘된 일이다. 대저 봉사공은 훌륭한 덕을 감추었으며, 뛰어난[雄偉] 문장으로 당시에도 알려졌으며, 그 뒤에도 여러 명승지에 대해 지은 시가 현판에 새겨져 걸려있는 것이 아주 많다. 이것은 족히 앞에서 부르고 뒤에 전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릇 후손된 자라면 어찌 우러러 사모하고 취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높은 곳에 올라가 고향[松梓]을 바라보고, 언덕으로 선조[親堂]를 생각하면, 견성(甄城 ; 순임금의 봉읍지)의 가르침과 같다 정자를 만든 이미를 생각하면 싹을 키우는 근본이니, 역시 싹으로써 본당(本堂)을 적시는 것이다. 마치 왕실에서 춘우정의 경계를 삼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히 선대의 빛남을 떨어뜨리고, 서로 사귀고 권면하지 않겠는가. 회옹부자(晦翁夫子; 주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대에 일이 있음에도 분명하지 않은 것과, 아는 것이 있음에도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진 것이 아니다. 자손이 되었다면 어찌 이 책무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이에 염려하는 바가 있으나, 그 일을 이와 같이 기록한다.
 
기유년 봄 3월 정사일에 구세손
주사(主事) 전은택(全殷宅)이 삼가 쓰다.
 
 

7.1. 永慕齋紀

 
嗚呼 此我九世祖 奉事公與配位李氏之墓 而永慕齋者 春秋展省 竣事休焉之所也 創在癸酉 而今也始克記其實者 吁亦晩矣 盖奉事公 潛懿之德 雄偉之文 聞于當時 其後諸名勝以詩 揭板于齋者甚多 此足以徵前而傳後矣 凡爲子姓者 安有不瞻慕而取則哉 登高而望松梓 下邱隴而思其親堂 如甄敎授 思亭之作物 以本滋苗 亦以苗滋本堂 如王室謹春雨亭之戒 則庶不墜先徽 而交相勉勵也 晦翁夫子 有言曰 先世有業 而不分不明也 知而不能暴白於世不仁也 爲子姓者 安得免此責乎 玆庸懼焉 略記其事 如右云
 
己酉春三月丁巳 九世孫
主事殷宅 謹書
 
 

 
각주
47)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
【향토】 임실의 재실
• 남산리 술효재(述孝齋)
• 남산리 영모재(永慕齋)
• 남산리 추모재(追慕齋)
(2024.01.0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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