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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남산리 추모재(追慕齋)
청웅면 소재지 농협창고에서 좌회전하여 너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남산리 명교마을 내에 있다. 추모재는 천안전씨 선조 전유경(全有慶)의 재실로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두르고 현판이 7개와 주련이 4개가 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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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 추모재(追慕齋)
 
 
청웅면 소재지 농협창고에서 좌회전하여 너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남산리 명교마을 내에 있다.
 
추모재는 천안전씨 선조 전유경(全有慶)의 재실로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두르고 현판이 7개와 주련이 4개가 걸어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상량문에 개국 528년(1919) 기미 3월 2일이라 명시되어 조선 건국인 1392년을 기준으로 1920년이어야 하지만 간지와 문중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919년 기미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기와와 본채를 보수한 상태에 재실 앞마당에는 학생천안전공석기불망비(學生天安全公錫琦忘碑)와 구한말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킨 양윤숙 휘하의 의병장 전석기선생기적비(義兵將全錫基先生記蹟碑)가 최근에 세워져 있다. 또한 솟을대문 기둥에도 2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이 재실은 처음에 관리인 집을 통과할 때도 솟을 대문을 통과해야 되고 관리인집에서도 다시 대문을 통과해야 재실 마당에 당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 남산 추모재 추모재실기(追慕齋實記)

 
내가 예전에 송나라 잠계(潛溪)선생께서 지으신 「평양개죽임씨묘각기(平陽盖竹林氏墓閣記)」를 읽고 본디 무릎을 치고 탄상했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임씨 선조 임담(林䉞)이 처음으로 평양에다 살 곳을 정하게 되자 후손 임극신(林克愼)이 추원(追遠)48)의 정성으로 사정(思亭)49)을 짓게 되었다. 대문 좌우 양편에 행랑을 겹으로 지어서 손님들이 묵을 장소와 독서의 방도 두었는데 10여 대에 전하여도 무너짐이 없었다고 한다.
 
오호라. 임실 청웅면 고창동 진천(辰阡)이 바로 우리 14대조 전적공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무덤 아래에 예전에는 재실이 있었는데 해가 오래되자 다 기울어져 후손들의 슬픔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기미년(1919년) 봄에 종족들의 의론이 일치하여 하루도 안 되어 건축 자재와 공인들을 모았다. 그리고 사종형 석기(錫琦) 씨가 먼저 천 꿰미를 내놓아서 공사 시작 비용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여러 종족들이 집집마다 곡식 한 말씩을 거두어 모은 것이 1년 남짓 되었고, 또한 종중의 토지 세목을 감면해주어 오히려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탄식이 있었다. 내가 이에 말하기를 “창건에서 귀중한 일은 바로 용감하게 매진하고 견고하게 버티는 것입니다.”
 
6개월 후에 이성(利成)50)을 마쳤음을 고하였다. 족제 석창(錫昌)이 몸소 먹줄과 자를 잡았고, 모든 종족들이 일제히 힘을 합했다. 또한 뭇 공인들은 도끼질 톱질에 아무도 다른 이의가 없었으니 그 신속하게 재실이 완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재실은 4개 시렁에 대문은 3칸이고, 중문은 2칸, 직실(直室)이 위아래 모두 7칸이며 담장을 둘렀는데 재실의 기둥과 들보가 매우 홍랑(鴻朗)하고 장엄하였다.
 
내가 이에 동기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모든 일의 시작이 지극히 어려운 것은 그 마지막에 지극히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좋아지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족한 것을 보수한 연후에야 더럽힘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겠는가? 그 반드시 정성을 다할 따름이라고 한다. 정성의 힘은 재력보다 나으니 이것으로 아비는 자식을 면려하고, 할아버지는 손자를 면려한다. 그것이 지극히 좋아지는 방법인저.” 이것을 재실기로 삼는다.
 
계해년(1923년) 9월 상순에
전적공(典籍公) 14세손 석영(錫永), 15세손 성순(聖淳)이 삼가 쓴다.
 
 

1.1. 追慕齋實記

 
不肖嘗讀宋潛溪先生所撰 平陽盖竹林氏墓閣記 擊節歎尙者雅矣 其□曰 林氏先祖䉞 始奠居于平陽 雲仍克愼 追遠之誠 創其思亭 疊建翼廊 有徒賓之所 與讀書之室 傳十餘世 無墜云 嗚呼 任實靑雄面高昌洞辰阡 卽我十四世祖 典籍公衣履之阡也 阡下舊有齋 而歲久傾盡 後昆之悽愴 不可以言喩 己未春 族議僉同 不日鳩材集工 四從兄錫琦氏 首出千緡 以爲經始之資 前此諸族戶刷斗穀者 有年矣 而又減宗土稅條 猶有不饒之歎 不肖乃言曰 事貴於刱 卽勇邁堅柱 六閱月 告訖利成者 族弟錫昌 躬執繩尺 僉族惟一齊力 而衆工斧鉅 無異辭 其神速以有祐助 齋四架而大門三間 中門二間 直室上下幷七間 周以垣墻 齊之棟樑 甚鴻朗莊嚴 不肖於是乎戒于同根曰 凡事之始極難者 其終有至好 至好之道非他焉 克世修葺 然後乃可以無忝 此何以下乎 其必曰誠而已矣 誠力勝於財力 以此父勉其子 祖勉其孫 其至好也耶 是爲記云
 
癸亥 菊月 上澣
典籍公 十四世孫 錫永
十五世孫 聖淳 謹識
 
 
 

2. 남산 추모재창건기(追慕齋刱建記)

 
무릇 선영 아래 둔 제실(祭室)이 어찌 유독 웅장하고 화려하겠는가?[輪奐]51) 보기에 아름다울 뿐이며, 두려워 조심하여 추모하는 바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나라의 성대한 문벌에서는 곳곳마다 묘각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오직 우리 14세조 전적공 임유경(林有慶)의 무덤이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고창동 부진(負辰, 진 방향을 등진)의 언덕에 있는데, 자손들이 여러 군에 흩어져 살면서 그 숫자는 적지 않지만 적막한 4백년 세월에 무덤 아래에는 한 간(一架)의 묘지기 방도 없으니 후손들이 재계하여 술잔을 올린 지가 오래되었다.
 
지난 갑인년(1914년) 가을에 나와 사종형 석만(錫萬) 씨가 먼저 의론을 일으켜서 몇 칸의 재실을 짓고자 하였지만 재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종족의 의론이 모두 일치하여 종안(宗案) 한 질을 개수하여 종안에 계원으로 이름이 들어간 사람들로부터 각각 한 말씩을 거두었고 구실을 합해서 조금 넉넉한 집안에서 더욱 불렸다. 기미년(1919년) 가을에 근 20포대가 되었다. 게다가 크고 작은 종중의 위직토(位直土)에서 사이에 물품을 줄여 들어온 조세가 40포대에 이르니 합해보니 60포대로, 돈으로는 삼천 꿰미 쯤 되었다.
 
이에 크게 융성할 만한 터[大壯]52)를 점쳐서 잡았지만 부역을 시작하기에는 재력이 부족하다는 탄식이 많았다. 이에 사종형 석기(錫琦)씨와 모의하여 특별히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을 내어 먼저 천 꿰미를 출연하여 공사를 처음 시작하는 비용으로 삼았다. 묘시파리(眇視跛履)53) 같은 자질로서 감히 스스로 좌우의 일을 처리하고 토목공사를 감독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종족의 의론을 수렴하였다. 모두 6개월 뒤에 공사가 끝났음을 고하였다.
 
재실은 총 4간(四架)으로, 재의 양쪽에 문을 두고, 내외 직사(雇舍)54)는 3간(三架)이며 문루(門閣)과 담장을 둘렀다. 여러 종족들이 오직 한결같은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은 당연하였고, 몸소 먹줄과 자를 잡은 이는 성택(性宅), 석창(錫昌)이 서로 도왔으며, 성심으로 감역한 이는 재순(在淳), 성순(聖淳), 규순(奎淳)이다. 나는 몸소 기와를 매입하였다. 2년간 기와를 파니 돈이 7천 6백 꿰미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부족하였다. 고로 삼년을 더 품세를 줄여서 부역을 마치니 쇠잔한 종족들의 어려운 상황이 이와 같았다.
 
아, 모든 세상일에 정성이 있는데 그 실제가 없는 것은 없다. 오직 원컨대 모든 종족들은 이런 정성을 쌓아서 해가 오래되면 될 수록 돈독해진다면 일가가 도탑게 화목하게 되는 의리와 천년 추모의 마음이 거의 민멸되지 않을 것이다.
 
개국 532년 계해년(1923년) 9월에 14대 손 석환(錫煥)이 삼가 기록하다.
 
 

2.1. 追慕齋刱建記

 
夫先塋下置祭室 奚獨輪奐焉 觀美而已 有所怵惕然追慕之義 故我東盛閥 無處無墓閣也 然惟我十四世祖典籍公 崇封在於任實郡靑雄面南山里高昌洞負辰之原也 子孫散在列郡 其麗不鮮 而寥寥四百星霜 墓下無一架司墓室 後昆之齋盃久矣 往甲寅秋 不肖與四從兄錫萬氏 先倡是議 欲營數間室 財力靡逮 族議僉同 改修宗案一秩 而自入案員名下 各收一斗 租合轉殖于稍饒家矣 至己未秋 僅二十苞也 且自大小宗中位直土 間減品收入租 至四十苞 則合租六十苞 價三千緡假量也 乃卜大壯 而設役不足之歎 夥數也 於是謀于四從兄錫琦氏 則特祭慕先之誠 首出千緡 以爲經始之資 以若眇視跛履之質 敢自幹蠱左右 視土木之役 暮朝收宗族之議 凡六閱朔 功告訖 總四架齋 兩間門 內外雇舍三架 門閣而垣墻也 諸族惟一勤誠當矣 而躬執繩墨者 性宅錫昌相翊也 誠心監役者 在淳聖淳奎淳也 躬兼瓦買者 不肖也 兩年賣瓦 金至七千六百餘緡 而猶爲不足 故加以三年 減品稅了役 孱族之艱狀如是也 噫 凡天下事有其誠 而無其實者無焉 惟願僉族 積此誠意 愈久愈篤 則一家敦睦之義 千秋追慕之心 庶乎不泯云爾
 
開國五百三十二年 癸亥 菊秋 十四代孫 錫煥 謹識
 
 
 

3. 남산 추모재중수기(追慕齋重修記)

 
재실의 창건이 지난 기미년(1919년)에 있었는데 지금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15대조 전적공 임유경(林有慶)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자 임인손(林仁孫)은 나주목사이고, 차자 임의손(林義孫)은 학생이었는데 바로 이분이 나의 조상이다. 재실이 건립될 당시 목사공파가 가난하게 흩어져 살아서 협력하지 못했고 오직 우리 학생공파가 홀로 부담하여 공사를 마쳤다. 게다가 이후 40년 간 조금씩 보수를 더한 것이 3, 4회에 그치지 않았다.
 
경인년(1950년) 난리 후에 기와가 훼손되고 담장이 무너져서 재실 공사가 엄청나니 내가 흥순(興淳), 상철(相哲) 및 여러 종족들과 함께 중수하기로 모의하고 여러 종족들에게 두루 알렸다. 목사공파 종족들은 더욱 즐겨 따라 주면서 곧바로 힘을 다하여 서로 도와주었다. 학생공파와 목사공파 두 파에서 거두어 모으니 모두 대략 20만원에 이르러서 비로소 몇 개월간 공사를 하였다. 부역이 마침내 끝나니 동우(棟宇)와 문과 담장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청신함은 더욱 좋았다. 아침저녁으로 살펴볼 수 있으니 거의 밝은 혼령이 살아 계신 듯하였고, 자손들 추모의 마음도 또한 남은 한이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대략 사실을 순서대로 서술하여 기문으로 삼는다.
 
단기 4292년 기해년(1959년) 10월일
불초 15세손 학순(鶴淳)이 삼가 기록한다.
 
역원
도유사 학순(鶴淳)
부유사 두석(斗錫)
석옹(錫雍)
재무담당[掌財] 상철(相哲)
감역 상오(相伍)
 
[* 이하 방명 및 출연 금액은 생략]
 
 
 

3.1. 追慕齋重修記

 
齋之刱建也 往在己未年 今四十有星霜矣 惟我十五世祖 典籍公諱有慶 有二男 長諱仁孫羅州牧使 次諱義孫學生 直我祖也 齋建時牧使公派 貧孱散居 未之協力 而惟我學生公派 獨擔了役 且以來四十年間 略加修葺 不止三四回矣 庚寅亂後 瓦毁垣頹 齋役巨大 余與興淳相哲及諸族 謀重修 遍告諸宗 牧使公派諸族 尤爲樂從 而卽極力相助 兩派收合 全略至二十萬圓 始工數箇月 役遂完竣 棟宇門垣 雖未華麗 而淸新可尙矣 朝夕省視 庶幾明靈如在 而子孫追慕之心 亦得無憾矣 故略序事實 以爲之記
 
檀紀 四二九二年 己亥 十月 日
不肖 一五世孫 鶴淳 謹記
 
役員
都有司 鶴淳
副有司 斗錫
錫雍
掌財 相哲
監役 相伍
 
[* 이하 방명 및 출연금액은 생략]
 
 
 

4. 남산 추모재 원운

 
自我先公有德風  우리 선조대부터 덕풍이 있어
於家於國一般功  집안과 나라에 두루두루 공이 있네.
退耕草野專心孝  초야에 물러나 농사지으며 전심으로 효도하였고
進排明堂必效忠  명당(明堂)55)에 물품을 바치니 반드시 충을 본받았네.
 
盃彼杉松遠庇蔭  저 삼나무 소나무에 술잔 올려 멀리 그늘을 덮으니
大同花樹漸生叢  대동의 화수회 점점 무리 짓게 되었구나.
年年香火春秋節  해마다 봄 가을철에 제사지내니
神鑑昭昭格此中  밝게 비추어 이 가운데 이르시리.
 
13대손 봉택(鳳宅)이 삼가 쓴다.
 
 
 

5. 남산 추모재기(追慕齋記)

 
묘소에는 옛날부터 재실이 있었다. 진나라 때에 잠자는 곳이 되었고 한나라 때는 침식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의 곳곳에 남아 있다. 대개 그 해 제수를 올릴 적에 혹 음산하게 내리는 비를 만나면 제수와 술을 올리는 데 의례가 없게 되고, 혼령이 살아계신 듯 엄숙하게 이르는 것을 보기 어려우니 이러한 재실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선조 전적공[林有慶]은 무덤이 임실 서쪽 청웅의 고창동에 있는데, 우리 15대에 미치니 재소(齋所)가 훼손되어 밝고 깨끗한 정성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기미년(1919년) 봄에 4개 시렁을 세우고 ‘추모재’로 편액을 거니 이는 후손들의 다행이다.
 
『예기』에 이르기를, ‘음악은 처음 생겨난 곳을 즐기고 예는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다.[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56)라고 하였으니 예약의 도가 얼마나 중대한 것이리오마는 그 요체는 곧 선조를 추모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미만을 알고 아비를 모르는 것은 날짐승이고, 아비를 알고 선조를 모르는 것은 들짐승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그 영장이 되는 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호북 사람은 성묘를 가서 원조(遠祖)를 불문하고 모두 곡하고 절하였다. 비록 백 천대가 멀어지더라도 점점 미루어 올라가면 필경에는 바로 조상이 되니 어찌 곡하고 절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악이 정(情)이 되는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예기』에 이르기를 “장차 착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부모님께 아름다운 명예를 끼치게 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는가? 이에 그 덕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우리 전적공의 후손이 된 자들은 전적공의 문행과 아름다운 사적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만을 기술하고자 한다면 어찌 추모하는 일이겠는가? 산골 물, 못가[澗溪沼沚]에서 자란 풀이나 광주리, 솥[筐筥錡釜]57) 같은 그릇을 비록 나열해 놓는다 해도 또한 문식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청컨대 우리 종족들은 각각 몸을 경건히 하고 각각 그 업에 힘써서 금일 추모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계해년(1923년) 동짓달 하순에 15세손 철순(澈淳)이 삼가 기록하다.
 
 

5.1. 追慕齋記

 
墓之有齋古也 秦而爲寢 漢而因寢 至于今殆隨處在在 盖其歲薦之際 或遇陰雨 則籩豆罍爵之奠無儀 僾然肅然之格難見 此設之不得不爾也 審矣 惟我先祖典籍公 佳城在任實西靑雄之高昌洞者 逮我爲十五世 而齋所顚蹶 無以致明潔之誠也 故己未春 建四架額以追慕 寔苗裔之幸也 傳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禮樂之道 何重何大 而其要則不越乎追慕其先也 知母而不知父禽也 知父而不知祖獸也 人爲物之靈 而不有其所靈之道乎 湖北之人上墓 不問遠祖 皆哭拜 雖百千世之遠 漸漸推上 則畢竟是乃祖也 安得不爲且哭且拜也 所以爲禮樂之情矣 雖然 禮云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詩云 無念爾祖 聿修厥德 爲吾典籍公之子姓者 不思夫典籍公之文行懿蹟 而欲述其事 則焉有追慕之事乎 澗溪沼沚之毛 筐筥錡釜之器 雖爲之陳 亦不過爲文具也 請吾諸族 各敬其身 各懋其業 毋負今日追慕之旨哉
 
歲在癸亥 至月 下弦 十五世孫 澈淳 謹識
 
 
 

6. 남산 추모재서(追慕齋序)

 
진나라 사람의 병사(丙舍, 재실)와 당나라 사람의 춘우정(春雨亭)58)은 모두 선조 무덤을 우러러 사모하고자 하는 재각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풍속이 성행하여 세족가에서는 묘소에 재각이 없는 곳이 없다. 오호라. 우리 14세조 전적공[林有慶] 무덤길 아래 재각이 허물어지니 후손들의 슬픈 탄식을 어찌 하리오?
 
기미년(1919년) 봄에 종족의 의론이 일치하여 네 칸 재각을 짓는데 공사는 크고 재력은 부족했지만 6개월 만에 족당의 다함없는 근심 속에서 공사가 마쳤음을 고하였다. 나는 두루 살피어 검사하는 것에 힘쓰지 못했지만 이어서 보수하는 책임은 후손에게 있다. 그래서 내가 여러 조카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선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서 하나라도 부러지거나 무너진 곳이 있으면 꼭 빨리 보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계해년(1923년) 9월 상순에 전적공 14세손 석만(錫萬)이 삼가 기술하다.
 
 

6.1. 追慕齋序

 
晉人之丙舍 唐人之春雨亭 皆其瞻慕先阡之閣也 我東其風盛行 世族家無墓無閣 嗚呼 維我十四世祖典籍公 隧下齋閣累圮 雲仍之愴歎 爲何如哉 歲己未春 族議僉同 爰構四間閣 事鉅力綿 而凡六閱朔 族黨無竭蹶之患 而功告訖 不肖無務看檢 而嗣葺之責 在後昆 不肖諗于諸弟姪曰 蔽一以祖先之心爲心 有一桶□摧 會不移時修補 惟其可耳 勉乎哉勉乎哉
 
癸亥 菊秋 上弦 典籍公 十四世孫 錫萬 謹述
 
 

 
각주
48) 추원(追遠):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원(遠)은 선조를 뜻하는데,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하게 행하고 먼 조상님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하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는 말이 나온다.
49) 사정(思亭): 무덤 옆에 짓는 정자, 즉 재실을 말한다.
50) 이성(利成): 제사 때 축이 시동(尸童)에게 공양(供養)의 예가 이루어졌다고 고하는 절차로, 제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51) 윤환(輪奐):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건물이 낙성된 것을 축하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예기(禮記)』<단궁하(檀弓下)>
52) 대장(大壯): 『역경』의 육십사괘(六十四卦)의 서른네 번째 괘(卦). 우레를 나타내는 진괘(震卦)와 하늘을 나타내는 건괘(乾卦)가 위아래로 이어진 것으로, 뇌천대장(雷天大壯)이라고도 한다. 우레가 하늘 위에 우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양이 크게 융성함을 상징한다.
53) 묘시파리(眇視跛履): 『역경』<이괘(履卦)>에 나오는 문구로,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환히 다 보려고 하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먼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는 무리하게 자기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려다가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54) 직사(雇舍): 제구 등을 간수해 두는 곳으로, 제향 때에는 제수 등을 준비해 두는 곳으로 쓰인다.
55) 명당(明堂): 임금이 조회를 받던 정전을 일컬음.
56) 『예기』〈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이다.
57) 광거기부(筐筥錡釜): 광거는 모두 대나무 그릇인데, 광은 네모난 것, 거는 둥근 것이다. 기부는 모두 솥을 뜻하는 것인데, 기는 다리가 있고 부는 다리가 없는 솥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마음이 광명하고 신의가 있으면 시내나 못에서 자라는 수초(水草)와 부평이나 마름 같은 야채와 광주리나 솥 같은 용기와 웅덩이나 길에 고인 물이라도 모두 귀신에게 제물로 바칠 수 있고 왕공에게 올릴 수 있다.〔苟有明信 澗溪沼沚之毛 蘋蘩薀藻之菜 筐筥錡釜之器 潢汙行潦之水 可薦於鬼神 可羞於王公〕”라고 한 데서 나왔다.
58) 선조의 무덤 옆에 짓는 정자, 즉 재실을 말하는데 그것을 ‘사정(思亭)’ 혹은 ‘춘우정(春雨亭)’이라고 하기도 한다.
【향토】 임실의 재실
• 남산리 영모재(永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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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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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