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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석두리 추원재(追遠齋)
청웅면 소재지 농협창고에서 좌회전하여 너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석두마을이 나오는데 마을을 진입하기 전 좌회전하여 마주 보이는 언덕 밑에 있다. 추원재(追慕齋)는 함양박씨의 재실로 문중에서 세웠다. 팔작지붕 아래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개국오이칠년(開國五二七年)戊午年(1918) 8월 30일 상량을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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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두리 추원재(追遠齋)
 
청웅면 소재지 농협창고에서 좌회전하여 너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석두마을이 나오는데 마을을 진입하기 전 좌회전하여 마주 보이는 언덕 밑에 있다. 추원재(追慕齋)는 함양박씨의 재실로 문중에서 세웠다. 팔작지붕 아래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개국오이칠년(開國五二七年)戊午年(1918) 8월 30일 상량을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실 중앙의 기둥 하나는 당시 모과나무 기둥이라고 관리인이 전하며, 이곳은 특이하게도 편액이 재실 우측 칸에 걸어져 있다. 제각 내에는 3개의 현판이 있고 5개의 주련과 솟을대문에도 작은 주련 2개가 걸려 있다. 또한 고서가 詩傳 10책, 書傳 10책, 小學諸家 3책, 小學集設 1책, 詩經諺解 5책, 書經諺解 5책, 小學諺解 2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2천년 초 도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기와를 시멘트 기와로 교체한 후 옛 기와는 한쪽에 쌓아둔 상태이며, 흙으로 만든 조선식 담장이 있고 100여 년이 된 은행나무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1. 석두 추원재창건기(追遠齋刱建記)

 
선조는 자손들에게 일신을 시작하게 해 주었는데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지나 멀리 수십 세대에 이르면 추모의 마음이 혹 정성스럽지 못함을 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증자가 말하기는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하게 행하고 먼 조상님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하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59)라고 하였으니 추원(追遠)은 조상의 덕을 사모하여 잊지 않는 데 있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선조 박평(朴枰)60)이 처음 임실에 살게 된 분으로, 사마시 문과에 합격하여 남원 교수가 되었다. 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 박현동(朴玄童)은 사마시에 등과하여 봉직랑, 군자감 봉사가 되었다. 둘째 박현몽(朴玄蒙)은 호가 나헌(蘿軒)으로, 선교랑 풍천 교수가 되었다. 봉사공 박현동에게 아들 박훈(朴薰)이 있었는데 호는 수심재(收心齋)이며,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인으로,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근실함과 학행으로 현랑과에 등과하였고, 효성으로 정려를 명받았으며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 일이 『기묘록』에 실려 있다. 나헌공의 아들 박번(朴蕃, 1469~1542)은 호가 인덕정(仁德亭)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행과 학술로 현량과에 등과하여 공주 교수가 되었으며 효성으로 정려를 명받았다. 학정서원에 배향되었다. 일이 『기묘록』에 실려 있다.
 
수심재공의 아들 박원영(朴元英)은 군자감이 되었다. 직장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박효달(朴孝達)이고, 둘째 박충달(朴忠達)은 군자감 봉사가 되었으며, 셋째 박순달(朴順達)61)은 호가 저정(楮亭)으로 군자감 참봉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극념당(克念堂) 김천일, 제봉(霽峯)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일이 『호남사』에 실려 있다.
 
아, 효행과 아름다운 사적은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이 될 만하니 백세의 갱장(羹墻)62)을 선영이 아니면 어디에 의탁하리오? 두만산 아래 구상동이 바로 우리 선조 교수공 삼대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니 자손들이 오르내릴 적에 발을 멈추게 되고,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며[風泉]63) 업해[業海]하던 슬픔과, 우로상설(雨露霜雪)64)의 감회는 세대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깊어졌다. 다만 재력이 넉넉하지 않아서 재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무오년(1918년) 가을에 이르러 여러 종중들과 함께 돈을 모아서 공사를 시작하였다. 4년이 지나 신유년(1921년) 가을에 재실 공사가 끝났음을 고하였다. 동우와 문과 담장은 비록 조탁하고 꾸민 아름다움은 없지만 맑고 검소함은 더욱 좋다. 묘소에 올라가 살피고 묘소에서 내려가 재실에 들어가면 거의 오르락내리락하는 혼령이 양양하게 위에 계시는 듯하다. 조상을 사모하는 자손들의 마음도 또한 금일에서야 뒤따를 수 있게 되었다.
 
편액을 거는 날에 경건하게 종족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처음 짓는 것은 진실로 어렵지만 잘 끝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금일의 일로 우리 일은 이미 다 끝냈다고 하지 말고, 훼손하는 대로 곧바로 보수하는 것에 힘써서 영원히 그 뜻을 바꾸지 말라. 위로는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며, 아래로는 후손의 화목을 닦아서 우리가 저 두산과 함께 천년만년 이지러지거나 붕괴되지 않고 길이 보존케 하자.”
 
신유년(1921년) 음력 10월 하순에 14대손 종헌(琮憲)이 삼가 기록한다.
문장(門長) 준근(準根)
도유사(都有司) 일근(泆根)
공유사(公有司) 정모(廷謨)
감독(監督) 혁근(赫根) 정두(廷斗)
재정담당[掌財] 종헌(琮憲)
서사(書寫) 중엽(重燁)
 
 

1.1. 追遠齋刱建記

 
祖先之於子孫 始一身也 而及其一世 又一世 至於遠而爲數十世 則追慕之心 恐不免乎不誠矣 故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其追遠在乎慕先德而不忘也 恭惟我先祖諱枰 始居任實 登司馬文科 行南原敎授 公有二男曰 諱玄童登司馬行奉直朗 軍資監奉事 曰諱玄蒙 號蘿軒 宣敎朗 行豊川敎授 奉事公 有一男曰諱薰 號收心齋 靜菴趙先生門人 甲子中司馬 以謹實學行 登賢良科 以孝命旌 享鶴亭書院 事載己卯錄 蘿軒公 有一男曰 諱蕃 號仁德亭 中司馬 以孝行學術 登賢良科 行公州敎授 以孝命旌 享鶴亭書院 事載己卯錄 收心齋公 有一男曰 諱元英 行軍資監 直長公 有三男曰 諱孝達 曰諱忠達 軍資監奉事 曰諱順達 號楮亭 行軍資監參奉 當龍蛇之變 與克念堂金公 霽峯高公 擧義殉節 贈兵曹參判 事載湖南史 噫 忠孝懿蹟 足爲子孫之貽謨 而百世羹墻 非邱墓焉托焉 斗滿山下九相洞 卽我先祖敎授公 三世同岡 衣履攸藏之地也 子孫登降躑跼 風泉業海之悲 雨露霜雪之感 愈遠愈深 而但財力不贍 不遑營齋 至戊午秋 乃與僉宗 鳩財設役 越四年 辛酉秋 齋事告竣 棟宇門垣 雖無雕飾之美 而淸儉可尙矣 上山而省 下山而入 庶見陟降之靈 洋洋在上 子孫遠慕之心 亦得今日而可追矣 揭額之日 敬告諸宗曰 刱始固難 而善終爲尤難 勿以今日之事 謂吾事已畢 務益隨補 永遠無替 上承先世之懿德 下修後仍之睦 我與彼斗山 千斯萬斯 不騫不崩而長存云爾
 
歲辛酉 小春下澣 十四代孫 琮憲 謹識
門長 準根
都有司 泆根
公有司 廷謨
監督 赫根 廷斗
掌財 琮憲
書寫 重燁
 
 
 

2. 석두 추원재 창건사항

 
우리 박씨가 임실에서 살게 된 것은 교수공 때로부터 처음 시작되어 십 수 대가 지났는데 자손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그런데 재력이 넉넉하지 않아서 묘지 아래에 재실 짓는 것을 아직도 겨를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종족의 의론이 일치하여 대종(大宗)으로부터 사종(私宗)에 이르기까지 종중 땅에서 거둔 세금이 약간이고, 구실을 집집마다 거두고, 기부 받은 것이 대략 천금이니 이것으로 재실 건축 시작 경비로 충당하였다. 4년이 지나서 공사가 끝났음을 고하였다. 인하여 갱장의 사모함을 여기에 부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항목들을 거론하고 조목을 왼쪽과 같이 열거한다.
 
세금을 거둔 것은 무오년(1918년)에서부터 경신년(1920년)까지였다.
 
[인명목록 생략]
 
신유년(1921년) 11월 일
 
 

2.1. 追遠齋 刱建事項

 
我朴氏之居任實 自敎授公 始而伊來 十數世 子孫不夥 亦不尠焉 然而財力不贍 墓下營齋 尙未遑 乃者 宗議詢同 自大宗以下至私宗 宗土收稅爲若干 租逐戶排斂及寄附爲略千金 以是當始 閱四載 告功竣 仍羹墻之慕 於是乎有寓矣 乃擧事項 條列于左
 
收稅秩 自戊午至庚申 [인명목록 생략]
 
辛酉 十一月 日
 
 
 

3. 석두 추원재기

 
말이 지극히 가까우면 ‘내 몸은 오늘’이라고 하고, 말이 이미 멀어지면 ‘선산은 상세(上世)’라고 한다. 오늘은 상세(上世)에서 말미암으니 사이가 없을 수 없는데도 기송(杞宋)65) 양 대를 의론하여 노나라나 위나라라고 한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 문왕을 조상으로 하여 진실로 만일 능히 살아계신 듯이 대하는 정성을 드린다면 하늘이 비록 높지만 상제(上帝)를 대할 수 있고, 신은 자취가 없지만 추념할 수 있으니 ‘갱장’에 빗대어 재실의 당에 들어가 추모할 수 있다. 재실의 편액을 ‘추원’이라 한 것은 그 조상을 사모하여 가까이하고자 해서이니 자손들이 급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삼가 박씨 계보를 살펴 보건대, 교수공 박평(朴枰), 교수공 박현몽(朴玄夢), 인덕정공 박번(朴蕃) 삼대의 묘가 두만산 구상동에 함께 있으니 기운이 모여 아름다워서 정령이 이곳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듯하였다. 수심재공 박훈(朴薰, 1471~1551)66)은 인덕정공과 같은 집안, 같은 덕으로 둘 다 정암 조광조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학정서원에 제향 되었다. 군자감 봉사공 박충달은 당시에 충의(忠義)가 미치지 않음이 없었지만 학행으로 자정하였다. 저정공(楮亭公) 순달은 극념당 김천일과 제봉 고경명을 따라서 임진왜란 때 함께 순절하였다. 그 충효의 가풍은 정사, 야사에 근거해 보면, 더욱더 호남에서 밝게 드러나니 남쪽 인사들이 지금까지도 이야기들을 한다.
 
만약 혹 사물의 이치가 서로 바뀌어 창업[滄業]이 환영이나 물거품 같아지고 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번쩍하게 되면 마땅히 명성이 후손에까지 반드시 머무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길이 머무는 것은 후손들의 한결같은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항상 닦아서 잇는다면 정령의 묵묵한 도움이 대대로 감동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때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 재실의 편액은 외형에 있지 않고 내심에 있으니 이것으로 욱면하니 박씨는 모름지기 모든 사람이 정성스러워야 한다. 정두(廷斗)는 의관(議官)이고, 종헌(琮憲)은 차관(差官)이다. 두만산의 산 빛 우뚝 솟아 길이 보존되리니 누구인들 우러르지 않으리오?
 
나에게 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니 내가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오른쪽과 같이 기문을 짓는다.
 
신유년(1921년) 11월 상순에 청주 한영석(韓榮錫)이 삼가 기록한다.
 
 

3.1. 追遠齋記

 
語至近而曰 吾身也今日也 語旣遠而曰 邱隴也上世也 由今日於上世 則不能無間 杞焉宋焉二代之後 曰魯曰衛 俱祖文王 而苟能致 如在之誠 則天雖高而對越 神無跡而儼臨 寓羹墻 入室堂而可追矣 齋顔之追遠 歎其尊慕 而近之也 子孫之不能不急焉 謹按朴氏譜系 敎授公諱枰 敎授公諱玄夢 仁德亭公諱蕃 三世之墓 同占於斗滿山下九相洞 氣聚佳麗 庶幾精靈陟降於此 而及夫收心齋公諱薰 與仁德亭公 同堂而同德 俱摯學於靜菴趙先生門 聯享於鶴亭書院 行軍資監奉事公諱忠達 當時忠義 非爲靡逮 以孝學行自靖 楮亭公諱順達 從克念堂金公 霽峰高公 同殉于龍蛇之變 其忠孝家風 考據國野之乘 尤克章明著于湖山之間 而南服人士至今說道者也 若或物理相禪 滄業幻泡 風掣電爍 則當曰 聲㣱之所留未必 必其長留 而後孫之一誠 常修而百世相承 則精靈之默佑 無世不感 無時不格 斯齋之扁 不在於形乎外 亦在於心乎內矣 以此勉勗 朴氏須人人之誠 廷斗議官 琮憲若焉 斗滿山色 屹然長存 孰不仰止 屬余爲文 不揣愚庸 敢記如右
 
辛酉 復月 上浣 淸州 韓榮錫 謹識
 
 

 
각주
59)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구절로, 증자가 말한 것이다.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愼終追遠 民德歸厚矣’에서 종(終)은 부모의 죽음을 뜻하고, 원(遠)은 선조를 뜻한다.
60) 박평(朴枰): 본관은 함양으로 문원공(文元公) 지빈(之彬)의 둘째 아들이며 문양공(文良公) 리(理)의 현손(玄孫)이다. 조선 세종(世宗) 4년에 선교랑(宣敎郞) 행남원부교수(敎授), 세종12(기유1429)년 중사마, 문종2(신미1451)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 하였다. 2남(현동, 현몽) 1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전북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 구상동 산2번지에 있다.
61) 박순달(朴順達): 상서공(尙書公) 15세 손으로 2파 문원공(文元公) 지빈(之彬)의 둘째 아들이며 문양공(文良公) 리(理)의 8대손이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둘째 아들 박사숙(朴思叔) 등과 함께 의병(義兵) 활동(活動)을 주도하다가 금산(錦山)에서 순사(殉死)하였다.
62) 갱장(羹墻): 사람을 심히 그리워한다는 뜻. 옛날 순(舜)임금은 앉아서는 요(堯)임금을 담장에서 보았고, 식사할 때는 국에서 보았다고 한다.[坐則見堯於墻食則覩堯於羹]
63) 풍천(風泉): 『시경』의 <비풍(匪風)>, <하천(下泉)> 편명을 지칭하는 듯하다. 『시경』의 이 편은 현인이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는 내용인데, 여기에서는 박씨의 선조가 임진왜란에 나라를 걱정하여 순절한 것을 슬퍼한다는 내용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64) 우로상설(雨露霜雪): 관장(官長)이 백성을 대함에 우로는 은덕을, 상설은 위엄을 의미한다.
65) 기송(杞宋): 증거할 만한 문헌이 됨을 뜻함. 기(杞)는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멸한 뒤에 하우(夏禹)의 후손 동루공(東樓公)을 봉하여 하우의 제사를 받들게 한 나라이고, 송(宋)은 주 무왕이 은(殷)의 주왕을 멸한 뒤에 성탕(成湯)의 후손 미자(微子)를 봉한 나라임. 공자(孔子)가,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의 예제(禮制)를 고증하려 하나 기와 송의 문헌(文獻)이 없어서 고증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음.《論語 八佾》
66) 박훈(朴薰): 자는 덕형(德馨) 호는 수심재(收心齋)이다. 정암(靜庵) 조광조 선생 문인(門人)으로 중종14(1519)년 봄 조광조 선생에 의해 도입 실시된 현량과를 통해 급제하였으나 그해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 선생과 함께 화를 입어 귀양 가시었다. 명종7(신해1551)년 81세로 졸하였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해동삼강』에 기록 되어있다. 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는 등 효심(孝心)이 지극(至極)하여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고 종형(從兄) 인덕정과 함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묘(墓)는 전북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 구상동 선산에 있다.
【향토】 임실의 재실
• 남산리 추모재(追慕齋)
• 석두리 추원재(追遠齋)
• 옥전리 명성재(明盛齋)
(2024.01.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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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