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리 이산재(珥山齋)
이 재실은 청웅면 향교리 암포 마을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의 선조 박이(朴珥)의 재실이다. 문중에서 단기 4298년(1965)에 창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박이는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무릇 사람이 보본추원(報本追遠)68)의 예를 차리는 것은 천성을 근본하여 인도를 세우는 것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기맥이 하나로 꿰어지는 묘리는 모든 삶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없어서 천륜으로 맺어진 관계[天屬]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 몸이 처음 나온 근본을 본디 백세가 비록 멀어지더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천하의 이치는 일부러 생각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절로 얻는 것이 지극한 정이다. 그런 까닭으로 술을 마시는 자는 취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데도 취하고, 종고관약(鍾鼓管籥)을 듣는 자는 즐기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웃게 되고, 최마복을 입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면서 슬피 웃는 것을 본 자는 슬퍼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절로 슬퍼진다. 하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선조를 공경하는 것임에랴? 생각을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효와 경을 다하는 것은 하늘에 근본한 성격 때문이니 모름지기 눈에 나타나고, 마음속에 저촉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곳곳마다 발현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정은 오래되면 태만하고, 태만하면 잊기 마련이고, 잊어버려서 길가의 모르는 사람처럼 된다. 이는 정이 변한 것이니 어찌 두려워 떨면서 이것을 그리워하지 않으리오?
운수의 서쪽, 뭇 산 중에 옥등산이 가장 빼어난데, 그 동북쪽 사이에 수십 사람을 수용할 만한 동굴이 있다. 여기에서부터 구불구불 산이 이어지다가 바뀌어 들판에 이르러서야 그치니 이곳이 바로 지남동 자좌(子坐)의 무덤이다. 지금 우리 11세 조고 박이(朴珥)69)는 임진왜란 때 공신으로 진주 진영의 장관이었다. 부군의 분묘 이하 대대로의 선영이 지금 좌우에서 생존해 계시는 듯이 한 마을에 연접해서 자리 잡고 있다. 지금까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 재숙할 곳이 한 칸도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재실이 있는 묘소라고 이를 수 있으리오?
말이 여기에 미치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송연해졌다. 정미년(1907) 봄에 여러 종족들과 논의를 내어 몇 개 동우를 세우니 종중의 의론이 하나로 모아져 계획대로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여러 걸출한 재각에 비교하면 모자란 편이지만 모모 집안의 재실이라 일컫기에는 충분하였다. ‘이산’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선조 조에 공이 무과에 등과하여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승세를 탔다. 그러나 마침내 노량의 전투에서 다쳐서 왼쪽 귀가 떨어졌다. 한창 싸워 크게 이겼는데 원균(元均)의 참소가 이르자 분원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이곳에 자취를 감추었다.
공의 충의는 이 산과 함께 우뚝하다. 그런 까닭으로 지리지에 그 산이 ‘박이산’이란 이름으로 실렸다. 대개 충의는 천하의 큰 관건이요, 문장은 군자의 여사이니 나의 자손된 자들은 충신 효우를 잇고 닦는 것을 법칙으로 삼야 한다. 능곡(陵谷)은 비록 옮겨도 무덤은 지킬 수 있고 이 재실은 완성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이름을 오른쪽과 같이 걸어서 선조의 충의로운 행동이 후손들에게 모범을 드리움을 아직 보지 못한 제족들을 욱면하는 것이라고 하니 모두들 “네” 하였다. 인하여 우리 재실의 기문을 쓴다.
무신년(1908) 동짓달 기망(16일)에 11대손 박석래(朴錫來)가 삼가 기록하고 12대손 박병진(朴炳振)이 삼가 글씨를 쓴다.
夫人生報本追遠之禮 所以本天性而立人道者 其至矣 而自父祖溯而上之 則氣脉一貫之妙 無非生生相承 天屬之不可離 而吾身之所自出 故百世雖遠可以忘乎 天下之理 不待思而自得者 至情也 故飮者未嘗思醉而醉 至聞鍾鼓管籥者 不思樂而自笑 見衰麻擗踊者 不思衰而自悲 况父母之於孝 祖先之於敬 不待思而自盡者 以其根天之性 不須形於目 觸於中 而隨處發見 然恒人之情 久則怠 怠則忘 忘而至於路人 此情之變也 曷不惴惴焉 是懷哉 雲水之西 諸山之中 玉嶝山最秀 東北之間 有窟可容數十人 自此逶迤 轉換到野而止 乃作芝南洞子坐 今我十一世祖考諱珥 壬亂功臣 晉州營將 府君之墳墓以下世阡 今在左右 有如生存 一里連接而居焉 迨今幾百年 無一間齋宿之所 豈可謂有苗齋之堂封哉 言及于此 不覺悚然 丁未春 與諸族發論 建築幾個棟 宗議歸一 計劃竣功 較諸傑閣 則遜矣 稱此爲某家墳菴 則足矣 揭額珥山者 宣祖朝 公登武科 與李忠武公 同心協力乘勝 遂赴露梁之戰 傷落左耳 酣戰大捷 及其元均之讒 不勝憤寃 遂晦蹟於此 公之忠義 與此山共屹 故地誌所載名其山曰 朴珥山 盖忠義天下之大關 文章君子之餘事 爲吾子孫者 繼修忠信孝友爲法則 陵谷雖遷 墳墓可守 斯齋可完矣 故揭名如右 以勉諸族之未覩祖先忠義之行之垂謨來裔者云矣 僉曰唯 因爲吾齋記
戊申 冬月 旣望 十一代孫 錫來 謹識 十二代孫 炳振 謹書
각주 68) 보본추원(報本追遠):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는 것을 의미한다. 69) 박이(朴珥): 초명(初名)은 희현(希賢)으로, 문도공(文度公) 훈(薰)의 손자이며 첨지 공원(恭元)의 아들이다. 천성이 강개하고 용력이 절륜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진주 영장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을 좇아 노량 전투에서 왜적과 접전 중에 왼쪽 귀가 적의 칼에 맞아 떨어졌으나 더욱 분전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그 후 충무공(忠武公)이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체포되자 공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 산중에 은거하니 후인이 그 산을 박이산(朴珥山)이라 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