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리 영목재(永穆齋)
이 재실은 청웅면 향교리 청룡마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운수의 남쪽 중산(中山)의 침갑원(枕甲原)은 우리 13대 할아버지 용양위(龍驤衛) 부사용(副司勇) 한응몽(韓應夢)의 묘와, 배위(配位) 숙인(淑人) 남양홍씨(南陽洪氏)이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일찍이 모두 모여서 묘를 청소하고 해마다 제수를 올리고 치제(致齊)할 곳이 없어서, 모두 모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혹시라도 비나 눈이 오면 가리거나 피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그 자손이 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흔쾌해 할 수 없는 것이 평소 이러하였다. 다행히 계묘년 동지에 강회할 때에 분발하여 재실을 지으려는 논의를 일으켜서 종론을 하나로 모아 한결같이 재물을 모으기를 도모하여 이듬해 갑진년 가을에 장인을 불러지었다.
한봉수(韓鳳洙), 한연수(韓演洙), 한병덕(韓秉德) 세 명이 주로 일을 맡아서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준공을 하였다. 무릇 3칸의 재각, 세 칸의 문, 주위에 담장을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고직사[庫舍]는 네칸이고, 행랑(行廊) 세 칸을 나란히 지었다. 이곳은 우리들이 모두 잠자는데 만족하는 것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공부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수백 년의 숙원이 이처럼 이루어졌으니 만족하지 않겠는가. 선조를 사모하는 것에 보충함이 있을 것이고, 만약 존모하고 애경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간절하지 않겠는가.
(이 제각의) 이름을 영목(永穆)이라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무릇 목(穆)이라 하는 것은 공경함이요, 화목함이라. 선조를 사모하는 도리는 공경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 친족이 화목하는 도리는 화목하는 것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대저 그 경(敬)과 화(和)를 따온 것이다. 세세도록 그 의리를 잊지 말지어다.
무릇 우리 여러 종인들이 이 재실에 오르면, (영목이라는) 이름을 돌아보고서 의를 생각하여 반드시 그 공경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므로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羹墻]이 일어 (그분의) 목소리와 얼굴색을 생각하게 되어 좋아하고 즐기려는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로다. 마음으로 공경하면 화답할 것이니 끝없이 넓은 데에 이를지라도 곁에 있는 것과 같은 정성으로써 할 것이다. 그러하니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는 도리라 할 것이다.
또 선대의 덕을 이어받아 닦아서 영원히 지키며 폐하지 않고, 이곳에서 함께하고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이곳에서 강의하고, 시와 예를 전수하고, 충효를 세워서 드날리면 조상의 뜻과 사업을 대대로 이어 나가며 스스로 지키는 도리가 이곳에서 모두 갖추어질 것이니, 그곳이 바로 이 재각이다. 장차 이그러지지 않고 다함이 없을 것이다. 후손된 자로써 선조를 사모하는 자는 더욱 더 힘쓰고 힘쓸 일이다.
낙성하는 날에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부탁하여 대략 그 전말을 기록하여 이와 같이 한다.
을사년 봄 3월 상한에 13세손 황대연(黃大淵)이 삼가 글을 짓다.
雲水之南 中山枕甲原 卽惟我十三代祖考 龍驤衛副司勇 應夢 曁配淑人 南陽洪氏之阡也 曾無齊所省掃歲薦 致齊爲難 或有雨雪 則庇避亦難 爲其子孫者 孰不爲慨然 平此哉 幸玆 癸卯冬至講會時 奮發建齋之議 宗論歸一 詢謀鳩財 翌甲辰秋 招工營之 鳳洙 演洙 秉德 三氏 担主役 不幾月告訖 凡三間齋閣 三間門 周圍墻垣 瓦以葺之 庫舍四間 行廊三間 並以築之 非惟爲齊宿而亦足 爲來裔肄業之所也 幾百載之宿願 於斯成之 則庶乎 有補於慕先之 萬一而尊慕 愛敬之心 寧不彌㘦哉 遂顔之以永穆 夫穆也者 敬也 和也 慕先之道 莫重於敬 睦族之道 莫切於和 故蓋取其敬和 而世世勿忘之義也歟 吾宗之登斯齋也 顧名思義 必思肅然羹墻 思其聲色 嗜慾不忘乎 心敬之和之 以致洋洋如在之誠 則可謂追遠報本之道 而且念聿修之德 永守勿替 齊於斯 祭於斯 會于斯 講于斯 詩禮以傳受 忠孝以立揚 則繼述自修之道 於斯備具 而是齋也 將不杇無窮矣 後之慕先者 益加勉勗哉 落成之日 囑余爲記 故略識其顚末 如右云爾
乙巳春三月上澣 十三世孫 大淵 謹識
운수현 남쪽 중산리 갑좌원은 바로 우리 13대조고 용양위 부사용 홍응몽 및 배위 숙인 남양홍씨의 묘소이다. 일찍이 재계할 재실이 없어서 성묘하거나 시제시 치제하기가 어려웠고 눈비가 내릴 때에는 피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 자손되는 자가 누구인들 여기에 개연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계묘년 동짓날 강회(講會)할 때에 재각을 건축하자는 논의가 분분하여 전 종중의 의론을 모아서 계책을 세우고 재정을 모았다가 이듬해 갑진년 가을에 목공을 불러 재실을 건축하는데 봉수(鳳洙), 연수(演洙), 그리고 병덕(秉德) 세명이 주역을 담당하여 수개월 만에 준공할 수 있었다. 모두 3칸의 재각과 3칸문, 그리고 주위의 담장을 기와로 덮었으며 고사(庫舍) 4칸과 행랑 3칸도 아울러 건축하였다. 다만 묘사(墓祀)때에 재숙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강학할 장소로도 사용할 만하였다. 수백년의 숙원사업이 이제 성취되었으니 조상을 추모함에 있어서 거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존모하고 경애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절실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현판을 영목재(永穆齋)라 하였는데 목(穆)이란 공경하고 화합한다는 의미이다.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는 공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종족간에 화목하는 도리는 화합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는 공경하고 화합하여 대대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 종원들은 이 재실에 올라오면 영목(永穆)이란 재호(齋號)의 뜻을 생각하여 반드시 숙연하게 갱장지모(羹墻之慕)를 생각하며 평소의 음성과 안색, 그리고 평소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심중에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공경하고 화순하여 선조의 존영이 양양하게 계신 듯한 정성을 극진히 하면 추모보본(追慕報本) 하는 도리이며 또 선조의 덕행을 계승하여 닦으면 영원히 수호하고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재실에서 재계하고 제사를 받들며 회합하기도 하고 강학하기도 하여 시례(詩禮)를 전수하고 충효로써 입신양명(立身揚名)하면 선조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서술하고 학문을 닦아 덕행을 쌓는 길이 구비되어서 이 재각이 장차 썩어 없어지지 않도록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후일의 선조를 추모하는 자들은 더더욱 힘써야 하겠다. 이재각이 낙성되던 날에 나에게 기문을 청탁하기에 그 시말을 이상과 같이 대략 기록한다.
을사년(1965) 봄 3월 상한에 13세손 대연(大淵)이 삼가 기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