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리 추모재(追慕齋)
이 재실은 청웅면 향교리 암포 마을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 최씨(全州 崔氏) 문중의 재실이다. 문중에서 단기 4317년(1984)에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가 걸려있다.
운수의 서쪽, 백이산 아래 암포촌 가운데에 우뚝 아름답게 솟아난 것이 바로 전주 최씨의 재실이다. 최씨는 고려 말에 정남장군(征南將軍) 시호 위정공(威靖公), 이름 칠석(七夕)75)의 후예로, 조선 선조 때에 화양군 수가(隨駕, 왕을 수행한)공신 양요당76)선생 최응숙(崔應淑)77)이 십 수대 손이다. 본현 상운령촌이 그들의 세거지이다. 최씨 선대 최상집(崔尙集)이 암포에 와서 우거하며 고기잡고 나무하며 자오(自娛)하였다. 후학들을 장려하여 진취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천수를 마쳤다. 옛 촌락 뒤 어유동(漁遊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자손들이 이어서 암포에 거처하게 되었다.
최공이 돌아가신 후 거의 몇 대가 지났는데도 재실이 없으니 공의 4대손 천필(天弼)과 그의 종질 종택(宗澤), 종영(宗永)이 머리를 모아 말하기를, “재실은 원래 산 아래 세우는 것이 본래 뜻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집안은 모든 힘이 미치지 못하여 감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또한 섬진강 둑을 확장하여 수로와 육로가 모두 험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비나 눈이 오면 시사 또한 부득이하게 받들 수 없다. 자손들이 거처하는 땅을 버려 잊게 되니 조촐하게나마 몇 칸의 재실을 지어서 망제소(望祭所)로 삼는 계책이 좋을 것이다.”
처음 공사는 재물을 거두어 모으고, 의견이 일치하여 인가를 사서 개조하여 재실로 삼았다. 아름답도다. 최씨의 신종(愼終)과 추원의 정성이 이에 깊도다. 재실에 이름이 없는 것은 소홀한 것과 비슷하니 지난봄에 족인 종춘(宗春)이 ‘추모’ 2글자의 현판을 써서 문미에 걸었다. 그러나 본기가 없을 수 없으니 천필(天弼) 씨가 나에게 청하여 첫머리에 놓게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천필 씨는 나와는 인척관계이고, 더구나 그 청이 더욱 지극하였다. 내가 또한 능하지 못하지만 문식이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졸렬함을 잊고 참람하게 오른쪽과 같이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한다.
계해년 7월일에 밀산(密山) 박상수(朴相洙)가 짓는다.
雲水之西 伯夷山下 岩浦村中 巍然華出者 卽全州崔氏 丙舍也 崔氏麗季征南將軍 諡威靖公諱七夕后 入韓宣廟 和陽隨駕功臣 兩樂堂先生諱應淑 十數代孫也 本縣上雲嶺村 其世居之地 而崔氏先世 有諱尙集 來寓岩浦 以漁樵自娛 獎進後學爲己任 而以終天年 葬于其故村后漁遊洞亥坐原 子孫仍居岩浦焉 崔公歿後今幾世 而無齋屋 公四代孫 天弼與其從侄宗澤宗永鳩首曰 齋屋元來山下營建爲其本志 然今吾家 則諸力不逮 不敢生意 又以蟾津堤擴張水陸兩路 皆入險澁 且有雨雪 則時祀亦不虔奉不得已而 子孫居地捐忘 草率數間營造 以望祭所爲計可也 營始鳩財 詢謀僉同 買得人家 改造爲丙舍 美哉 崔氏之愼終 追遠之誠 於玆深矣 齋無號 似涉疏忽歸 去春 其族人宗春 書額追慕二字 揭以華楣 然不可無本記 天弼氏請余而弁其首 余想天弼氏 與余爲烟族而其請尤極 余亦不能 以不文爲辭不獲 遂乃忘拙僣踰 略敍梗槪如右爾
癸亥 七月 日 密山 朴相洙 撰
각주 75) 최칠석(崔七夕): 이름은 지(池), 자(字)는 중연(重淵), 사명(賜名)은 칠석(七夕)이다. 정남이라는 훈장을 받아 정남장군이라고도 칭한다. 장군은 1390년에 대마도를 정벌한 날이 7월7일이어서 칠석(七夕)이란 사명을 받았다. 이밖에 오위도총관, 서북면 도지휘사를 거쳐 완산부원군에 봉군되고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76) 양요정(兩樂亭): 임실 소재 전라북도 문화제 137호이다. 조선 선조 25년 (1592년) 최응숙(崔應淑)이 임진왜란(1952) 때 난을 피해 이곳으로 낙향한 후 세운 것으로, 양요는 최응숙의 호이다. ‘양요’라는 말은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의로운 자는 강을 좋아한다.’는『논어』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의자요수(義者樂水)’에서 딴 것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아래 강가에 있었으나 섬진강댐이 만들어져 물에 잠기게 되자 1965년에 현 위치로 옮겨 왔다. 77) 생졸년 미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를 모신 공으로 1604년(선조37년) 6월 25일에 호성공신(扈聖功臣=忠勤貞亮扈聖功臣)에 오르고 화성군(和城君)에 봉해졌으며 녹권(錄券)을 받았다. 『선조실록』참조. |